오늘날 한국교회에 예배갱신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일고 있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갱신 세미나는 언제나 초만원이다. 이는 현재의 예배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목회자들이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현재의 예배는 무감각하며 형식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는 감격에 찬 은혜를 드릴 수 있을까?
1. 무감동한 예배- 누구의 책임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아야 한다. 현재의 예배가 무감각하고 무감동하고 형식적이라면 과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회중과 인도자에게 분명 문제가 있기는 있다. 회중이 진정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한다면 분명 감격을 맛 볼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목회자가 엄위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예배를 인도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모든 문제의 근본 발단이 다른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는 무감각한 목회자의 탓만도 아니요, 무감동한 회중의 탓만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예배의 형식에 있다. 잘못된 예배의 형식이 모든 다른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2. 한국교회 예배의 뿌리- 개척자 예배
현재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 형식은 시대적으로 볼 때에 19세기에 북미지역을 강타한 소위 '프론티어 예배'라고 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북미대륙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광활한 대지에 흩어져 살았는데, 워낙 땅이 넓다보니 서로 사람 구경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안수받은 성직자를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배가 평신도 지도자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가 흔했다. 설교도 평신도 지도자가 하는 것은 물론이요, 성례전은 더더욱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일년에 두 어번 목사가 방문하면 그때에 세례도 받고 성만찬도 실시되었다.
이때에 유행하고 성공한 것이 바로 대규모 천막집회이다. 당시 천막집회가 열리면 사람은 종교적인 동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인 동기 즉 사람들을 만나 친교한다든지, 혹은 단조로운 생활의 리듬을 깨는 어떤 자극을 얻기 위해서, 또는 심지어 색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몰려들기도 하였다.
대부분 음식이 바닥났을 때에 천막집회가 끝났던 사실은 이를 반증해 준다. 물론 개중에는 신앙을 얻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에 드려진 예배의 형식은 소위 '찬송 샌드위치'라는 말에 잘 나타나듯이, 예배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의 사이에는 찬송이 삽입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준비단계'로 풍자되는 찬송순서인데, 이때에는 찬송을 여러곡 계속해서 부르며 열정적으로 부른다. 그 다음에는 예배의 중심부로서 회심을 촉구하는 복음적인 설교가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결신자를 앞으로 불러내는 초청의 순서이다. 당시 실제로 행해졌던 예배의 모습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순서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수 있다: 오르간주악-찬송-사도신경-기도-주기도문-성가(anthem)-구약성경봉독-송영-신 약성경봉독-광고-헌금-찬송-설교-초청(이때에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동안 결신자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3. 개척자 예배의 특징
1) 설교중심의 예배- 이 예배의 첫 번째 특징은 설교가 예배의 맨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며 설교가 길다는 것이다. 설교는 전체 예배시간의 절반이나 혹은 그 이상도 차지 하는 예배의 중심항목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그 실효성은 대단히 의문시된다.
2) 실용주의적 예배- 또 한가지 특징은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예배의 으뜸가는 목적이 "하님의 영화와 인간의 성화"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교회들은 사회활동이나 자선 봉사가 아닌 예배를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예배가 좋은 예배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시금석은 그 예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회심자가 생겨났느냐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었다.
3) 복음적 메시지-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복음적이다. 예배를 통하여 결단과 회심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설교의 핵심은 언제나 "구원 아니면 멸망, 회심 아니면 비회심"과 같은 절대적이고도 극단적인 점을 강조한다.
4) 개인주의적 예배- 이러한 예배는 자연 고도로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신자 개개인의 회심과 결단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찬송가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애창되는 화니 크로스비 (Fanny Crosby)의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등 주로 일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찬송들이거나, "놀랍네! 기쁨과 구원이 내 영혼에 임했네,"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 등으로서 사용된 대명사는 항상 1인칭 단수형이며, 그 내용은 자신의 구원을 즐기거나 아니면 양무리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표현하는 찬송들이 대부분이었다.
5) 설교단 중심의 예배당- 당시 예배당의 구조는 높아진 강단과 설교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상의 뒤에는 대개 세 개의 웅장한 의자들이 놓여졌는데, 이는 예배의 사회자, 초청 설교자, 그리고 찬송 인도자를 위한 것이었다. 예배당의 전면에는 금박을 입혔거나 광택을 칠한 오르간 파이프가 설치되어 회중의 시선을 끌었으며, 성가대의 좌석을 높이 올리고 심지어는 성가대가 회중을 마주보고 앉는 형식의 음악회 무대 같은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가대는 회중들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도록 이용되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여흥을 돋구어 주는 기능으로 전 락되기도 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형식의 예배와 신앙형태가 19세기 북미 대륙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마치 블랙홀과 같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 퀘이커 등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로부터 복음을 전래받은 한국 개신교는 당연히 예배의 형태에 있어서도 그들의 것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현재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 형태가 놀라울 정도로 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4. 개척자 예배의 한계점들
문제는 개척자 예배 형태에 내재된 한계점들이다. 이 예배형식은 전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미국"이라는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풍미했던 예배형식으로서, 기독교 신앙과 예배가 배태되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예배와 비교해 볼 때 궤도를 많이 이탈한 "이상 한"형태의 예배이었다. 미국에 있는 대다수 주요 개신교회들이 20세기 후반에 예배의 형식을 초대교회의 예배 형식에 맞게 대폭적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그러한 예배형식을 유산으로 물려준 미국의 교회들은 더 이상 그러한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우리만이 그러한 예배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개척자 예배가 가진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해 보자.
1) 개척자 예배의 문제점 그 첫 번째는 예배가 목사 개인에게 특히 설교자에게 지나 치게 의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배시간의 절반 이상이 설교에 할애되고 설교가 곧 예배요, "예배는 곧 설교를 듣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서는 설교자 개인의 자질이나 영성 등 개인적(personal)이고 인격적인 요소에 의해 예배가 좌우되며, 심지어는 설교자의 말 주변에 의해 예배가 좌우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설교자 개인에 의해 전달되기도 하고 전달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에서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좀 말주변이 떨어지는 목사가 있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혹시 목사의 설교가 아닌 다른 자질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데, 예컨대 목사의 인품이 좋다던가 혹은 목사가 기도를 많이 한다던가 또는 심방을 많이 한다던가 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예배"와 "하나님의 은혜"가 목사 개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19세기 당시에는 챨스 피니(Charles Finny)나 디 엘 무디 (D.L. Moody) 같은 열정적이고도 탁월한 복음 설교가들이 많이 있었고, 설교를 통한 그들의 감화력은 천막집회에서 회심자를 만들어 내는데 크게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개척자 예배형식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현대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모든 목사가 다 그들처럼 탁월한 설교가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19세기 당시의 메시지와 전달 방법이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그렇기 때문에 개척자 예배 형식은 현대 한국교회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다.
2) 개척자 예배의 두 번째 문제점은 "회중의 수동적 참여"이다. 긴 설교와 회중 대표자(장로)의 긴 기도, 그리고 성가대의 긴 찬양, 이 모든 것은 회중들에게 예배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앉아서 듣기만 할 것"을 강요한다. 예배시간에 회중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려오는 설교를 들으며, 성가대의 찬양과 기도자의 기도를 듣기만 하는 것이다. 일년에 서너번 하는 성만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회중은 떡과 포도주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으며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배달해 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회중들은 예배에서 적극적일 필요도 없으며, 능동적일 필요도 없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좁고 긴 터널같이 놓여진 장의자" 속에 앉아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심지어 예배시간에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불편하니까 (너무나도 친절하게) 앞 의자의 뒤에 책 놓는 곳을 만들어 주지 않는가! 손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으며, 모든 것은 앞(강단)에서 알아서 다 해주는 형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중들은 예배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형편에서 회중들이 예배시간에 긴장을 한다던가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던가 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3) 개척자 예배의 세 번째 문제점은 "참회적 영성"이다. 개척자 예배는 근본적으로 비기독교인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전도집회였다. 그러므로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참석자의 "회심"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메시지는 언제나 죄에 대한 지적과 "회개해야 한다"는 촉구가 주된 기조였다. 성만찬에서도 언제나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갈보리의 희생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너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경건도 이런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언제나 무겁고 참회를 강조하며 "새사람이 되는 것"을 강조한다.
4) 개척자 예배의 네 번째 문제점은 예배의 "개인적 영성"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신자 개인의 "영적 온도"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 개개인이 영적으로 "뜨거운지 혹은 차가운지"만을 관심하고, "더 뜨거운" 신자가 되도록 독려한다. 그래서 예배당은 마치 어학실습실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예배시간에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옆에 앉은 사람은 나와 무관하고, 오로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나 자신이 하나님과 "직통"하느냐 하는 것이 신자의 유일 목표이다. 속칭 "다른 사람 다 은혜 받아도 내가 은혜 못 받으면 말짱 헛일"이라는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주고 있는 것이다.
5) 개척자 예배의 다섯 번째 문제점은 "불완전한 예배구조"에 있다.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 예배의 원형은 "말씀"(Word)과 "성례전"(Sacrament)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척자 예배는 이 중에서 한가지(Word)만 택하고 나머지 한가지(Sacrament) 는 상실한 예배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광활한 미국 땅에서 일년이 되도록 성직자 한번 만나기 힘든 특수한 상황에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런 문제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예배처럼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예배의 이중구조를 회복하여야 한다.
5. 한국교회 예배갱신을 위한 제언
1) 예배가 설교에 의존하게 될 때에 그 예배는 필연적으로 목사에게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회중은 은혜를 받으며(?) 목사가 설교를 못하면 회중은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는 목사는 신자들에게 추앙을 받 으며 그가 목회하는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한다. 이런 예배에서는 목사가 그리스도보다 더 부각되고 회중의 주목을 받게된다. 혹 설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목사의 영성이나 인격에 의존하는 교회와 예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며, 특정 목사의 리더쉽이 사라지면 예배와 목회가 모두 타격을 받는 등 부작용도 크다. 이는 결코 성서적이지 않으며 바람 직하지도 않다.
설교중심의 예배가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설교 자체가 가진 제한성이다. 예배에서 회중이 직면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의 은총" "하나님 나라" 등 모두 영적인 실재(reality)들이다. 이러한 영적인 실재들을 인간의 언어(설교)로 모두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고 이것을 상징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배를 "설교 위주"에서 "설교와 성례전 위주"로 바꾸어야 하며, 목사의 퍼스낼리티에 의존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예배, 다시 말해서 성례전적 시스템에 의존하는 예배로 바꾸어야 한다.
2) 회중의 수동적 참여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회중의 능동적 참여를 제고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회중이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순서를 가급적 지양하고, 회중 스스로 움직이는 순서를 늘려야 한다. 예컨대 한 사람이 대표로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는 전체 가 하는 통성기도가 좋으며,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보다는 수시로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든지, 성찬을 위해 걸어서 앞으로 나온다든지 하는 것이 좋다. "앉아서 (설교를) 듣기만 하는" 예배의 또 한가지 문제점은 감각의 단차원성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가 인간의 오감 중에서 오로지 청각 하나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좋은 예배란 인간의 오감을 모두 활용하는 예배이다.
3) 한국교회는 예배의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자리였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과 대망의 축제가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 역동적인 예배, 그리스도 부활의 기쁨과 감격에 회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고백의 기도 등 참회적인 요소를 제거하며, 둘째, 느슨한 순서를 제거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송을 도입하고, 예배의 순서가 진행감 있게 흘러가며, 역동적인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4) 예배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예배를 위해서 모인 사람들은 회중(congregation)이지 군중(crowd)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 떡을 뗌으로써 공동체가 "한 몸"이 된다 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전 11:17-26 및 10:16-17).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공동체적 인 것이었으며 결코 개인적인 사항이 아니었다.
현대와 미래의 세계는 소위 전자매체의 시대요, '사이버' 시대이다. 예배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며, 또한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예배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은, 직접 교회당에 나가서 사람들과 부닥치는 것을 싫어하고, 집에서 T.V.나 라디오, 또는 컴퓨터의 가상공간을 통해 예배를 때우려고 한다. 소위 "재택(在宅)예배"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중심의 예배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가 바로 이 점이다. 어차피 예배가 설교를 듣는 것이라면 굳이 예배당에 나가서 들을 필요가 무엇인가? 집에서 편하게 앉아서 전파매체 또는 가상공간을 통해 설교를 들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능 하며, 이를 비판할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교회 회중의 급격한 감소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실제로 북미대륙에서는 19세기 부흥운동을 통하여 그렇게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던 개신교회들이 설교 중심의 예배를 지켜 오면서 지난 30년 동안 교세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에, 매주 성례전을 시행해 온 로마 천주교회 등은 꾸준히 교세가 증가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여러모로 미국의 개신교회를 따라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앞으로 수년 혹은 수십년 이내에 텅 빈 예배당을 목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려를 불식키시고 한국교회가 지속적인 양적 성장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예배를 " 설교" 위주에서 "설교와 성례전" 위주로 바꿔야 한다.
5) 예배의 온전한 구조는 "설교"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설교와 성례전" 중심의 예배 이다. 설교와 성만찬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지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은혜"가 선포되었다면 뒤따라 나오는 성만찬은 이 하나 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직접 "맛보고 경험하는" 자리이다. 이렇듯이 성만찬은 설교를 보완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에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 성만찬 을 자주 거행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성만찬이 주일 예배의 정규 순서로 되는 일이다. 매주일 말씀이 선포 되듯 매주일 성만찬이 거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가는 말
회중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온전한 참여"(full, conscious, active participation)라는 제2차 바티칸 회의의 예배 개혁에 관한 명제는 우리 개신교 예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중은 예배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때에 내가 할일은 무엇인지 등을 알고 참여하여야 한다. 또한 회중은 예배의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온전한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예배갱신의 초점은 회중이 얼마나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하고 회중이 얼마나 예배에 참여하는가 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초대교회의 예배와 같이 부활의 기쁨과 천국의 대망이 있는 예배여야 한다. 이러한 예배가 될 때에 그 예배는 회중에게 감격과 감동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나아 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변화시키는 예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