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6
현용준은 거녀였기에 그만큼의 아들들을 낳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으로 해석하면서 실제 사례를 들어 전승의 양상을 보여준다. “오백장군의 어머니 설문대할망은 굉장히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힘도 세었다. 흙을 파서 삽으로 일곱 번 떠 던진 것이 한라산이 되었으며, 도내 여러 곳의 산들은 다 할머니가 신고 있던 나막신에서 떨어진 한 덩이의 흙들이다. 그리고 오백 형제나 되는 많은 아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아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흉년이 든 어느 해, 아들들이 도둑질하러 다 나가 버렸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돌아오면 먹이려고 죽을 쑤다가 잘못하여 그 커다란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다. 아들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돌아오자마자 죽을 퍼 먹기 시작하였다. (중략) 그리하여, 남편과 또 그 많은 아들들을 잃어버린 설문대할망은 홀몸이 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의 말잣딸로서 제주도를 창조한 여신이다. 설문대할망은 천상에서 부왕의 명을 잘 받들어 신들과 궁녀들에게 밥과 물을 잘 주고 효성도 지극한 여신이었다.” 라고 하여 설화가 아닌 창작으로까지 변모되는 현상을 지적했다. 설문대할망이 부모의 뜻을 거슬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것도 그 구조가 제주시 삼도동 소재 각시당 본풀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설화가 아닌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창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설문대할망이 끊임없이 창작되는 현상에 대해 설화 연구자로서 엄청난 시련이라며 개탄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해녀의 부엌에서 ‘해녀 이야기’ 공연을 봤다. 첫 번째 답사 때 해녀의 부엌에서 본 진한 감동의 연극 공연과 제주 음식에 집중된 ‘부엌 이야기’ 공연과 달리 권영희삼춘의 해녀 이야기와 Q&A가 집중된 공연이었다. 두 공연을 연이어 본 이유도 해녀들의 삶에 더 가까이, 더 깊이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돌아오기 전날에는 양승필 이장님의 안내로 종달리의 수호신을 모신 종달리 본향당에 갔다. 종달리 본향당 관리자인 고보살을 통해 전달받은 열쇠로 열었다. 외부는 당집을 슬레이트로 지어 놓아 일반 가정집과 비슷한 모습이며, 내부에는 불당과 유사한 형태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단 앞에 <탐라의 딸들> 초고 원고를 올려놓고 “종달리 글을 쓰고 있으니 잘 부탁드린다” 며 인사를 드렸다.
사실 돈과 시간, 품이 많이 든 두 번의 종달리 집필 답사가 옛이야기를 쓰는 데 얼마만큼의 공헌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작가에게 글과 연관이 있는 실재 공간이 있다는 것과 글을 응원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사실은 집필 능력과 다시 쓴 글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지고 지칠 때마다 다시 시작할 힘을 주었다.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창조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제주도 종달리 주민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에너지로 함께 만든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