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두 언]
긴 겨울밤의 소고(小考)
엄 원 지
한 해가 넘어갈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병을 않지도 않았는데 한 해를 코로나에 감염되어 정신과 육체가 진이 다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코로나19 사태는 필자나 모든 사람에게 끔찍스럽도록 고통을 안겨주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올해는 본지도 제대로 일 다운 일 한번 못해보고, 연례행사 역시 전혀 진행하지 못하고 계획만 세우다가 한 해를 보내버렸다.
그러나 ‘펜에 잉크를 묻히지않으면 삶의 낙이 없다’는 옛 선배 문인들의 정신만은 일찌감치 숙지한 터라 그래도 이 시기에 펜을 잡는 기쁨으로 삶의 고뇌를 자족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주위 문인들이나 특히 신인들에게 강조하는 말이지만 ‘어떻게 써야 하나?’ 보다도 ‘무엇을 써야 하나?’가 문인이 추구해야 할 기본 자세이다.
많은 문인들이 가장 원천적인 이 물음과 해답을 잊고서 문인의 길을 간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수필을,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합니까?”라는 물음은 기술적인 훈련으로 누구나 노력하면 습지하게 되고 노력만 하면 능숙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기술에는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문학에도 기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매한 정신과 세상을 선도하는 사고관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인의 글은 방향 설정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영향을 미쳐 한 시대의 역사를 창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 시대를 퇴행시키기도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인지할 때에 우리 문인의 사명과 자세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요즘같이 온갖 부조리와 부패가 시대적 유행과 관습이 되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혼란스러운 시절에 문인의 신선하고 진실한 글이 세상의 밝고 맑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총칼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펜의 힘이고, 열 마디의 그 어떠한 사랑의 말 보다도 한 줄의 글이 사랑의 감동을 주는 것이 펜의 힘인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할까?’ 하고 고뇌하는 펜의 목적이 여러분의 문학적 소양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긴 겨울밤이 찾아오니 지나간 세월의 절반이 기억나고, 그 절반 속에서 소유했던 온갖 희노애락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길어진다.
후회스러운 순간이 너무나 많고, 조금만 더 아껴주고 사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절절한 회상의 시간 들을 갖게 된다.
인생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사회 인과적 관계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관계를 소흘히 해 소중한 사람들과 이별해야 했던 순간들이 이 긴 겨울밤에 마음 한 구석에 들어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회한이 채워지는 것이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인 것이 인생이라 했지만 그래도 함께 만나서 평생을 교류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회상의 언덕에서 못내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슴을 쓰다듬는 것이다.
문득 당나라 대 시인인 이백(701~761)의 싯귀가 떠올랐다.
시의 원조격인 삼오칠(3· 5· 7 三五七)조 시(詩)로 고전 중 명시이다.
삼오칠언(三五七言)
이태백(李太白)
秋風清(동풍청) : 가을바람이 맑고
秋月明(동월명) : 가을달이 밝구나
落葉聚還散(락엽취환산) : 낙엽은 갑자기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寒鴉棲復驚(한아서부경) : 찬 까마귀는 잠들었다 다시 깨어난다
相思相見知何日(상사상견지하일) : 생각하는 님은 어느 때나 만나며
此時此夜難為情(차시차야난위정) : 이 밤 이 때에 그리운 정을 어찌하리
긴 긴 겨울밤의 고적함과 그리움을 이 한 편의 시에서 위로받으니 수 없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고독한 자를 위안케 하는 펜(붓)의 위대한 힘에 저절로 숙연해 진다.
이런 밤에는 한 편의 시라도 짓고, 한 폭의 산수화라도 치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도 좋다.
역시 무엇을 쓸까, 무엇을 그릴까 하는 생각이 중요하다.
그것이 서정적이든 서사적이든 자신만의 창작이면서 모든 이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다.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이백이 읊은 것처럼 밤 바람이 맑고, 달도 밝으며, 가로수 잎은 스스럼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 뒹굴고, 숲에서는 엄마의 품을 그리는 아기새의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어느 하늘 아래에선가 저 달과 별들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님이,
생각나는 밤이다.
그리움이 슬며시 가슴에 자리 잡는다.
「한국신춘문예 2020년 겨울호」에 즈음하여
발행인 엄 원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