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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스님의 장군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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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 스크랩 11조 부나야사존자 ~ 23조 학륵나존자
무애심 추천 0 조회 49 14.12.23 22: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0.1.28 원명정사 법문.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11조 부나야사 존자 ㅡㅡ>마명대사

이 11조 부나야사가 바라나국(처음 석존이 다섯비구를 위하여 설법한 장소: 4대성지는 佛生迦毘羅,成道摩竭陀,說法波羅奈,涅槃 俱尸羅)에 갔을 때, 12조가 될 마명대사가 예배하고 영접해 묻기를,

“제가 부처를 알고자 하니 어느 것이 곧 부처입니까?”

“네가 부처를 알고자 한다니 알지 못하는 것이 부처니라”

“부처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것임을 알 수 있겠음?”

“이미 부처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아느냐?” 이런 문답에서 마명보살이 확연히 깨달아 출가를 원했다함~

대승기신론을 쓰신분” 마명이란 이름의 설화가 몇 가지 있는데

①마명대사가 전생에 비사리국의 왕으로 있을 때 헐벗은(말처럼) 백성들을 위해 누에로 변신하여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서 입게 했다는 인연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말과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기쁨의 눈물을 울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②월지국왕이 마명보살의 도를 시험하여 일주일을 굶긴 말들 앞에 물과 풀을 놓아두게 하고 마명대사가 설법하게 했더니 말들이 풀을 먹지 않고 울면서 설법을 들었다 해서 말들이 슬피 울게끔 감응시켰다(感馬悲鳴)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③마명보살이 악기를 잘 다루는 분이라 부처님설법을 노래로 연주하니 말들이 그 소리에 울었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함~

 

11조 부나야사가 12조 마명보살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에 이르기를

 

미혹과 깨달음은 숨겨진 것과 나타남과 같나니

밝고 어두움이 서로 여의지 않느니라.

지금 숨고 나타나는 법을 부촉하노니

하나도 아니요 또한 둘도 아니로다.

 

했으니 미(迷)혹은 여래를 깨닫지 못했으니, 어리석어 어두워 여래 즉 불성이 숨어 나타나지 못함(여래장, 본각 -?)이요,

오(悟)는 깨달음이니 불성의 반야지혜가 밝음으로 나타남(시각)이니 밝게 드러냄인 것임-

이 같은 숨은(미혹)것과 나타남(깨달음)을 부촉하는 이 법은(진리) 하나도 둘도 아니요, 어두움(迷-숨겨짐, 깨닫지 못한 것) 밝음(悟-드러남, 나타남-여래)이 하나라면 상대가 있음이 되고, 둘이면 상대를 세우는 것이 되니, 일체를 초월한 경계이므로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라 하는 것임~

그러나 또한 하나도 되고 둘도 됨을 알아야함~

 

4.법문

12조 마명존자 ㅡㅡ> 13대 가비마라 존자ㅡㅡ> 14대 용수보살ㅡㅡ>15조 가나제바 존자ㅡㅡ>16조 승가난제ㅡㅡ> 17조 나후라다 존자.

 

제 12대 조사 마명존자에게 어느 날 외도가 논쟁을 요구해. 왕과 대신들과 사부대중이 모인 장소에서 먼저

마명“그대의 뜻은 무엇을 으뜸으로 삼는가?”

외도“무릇 있는바 모든 말들을 내가 능히 깨뜨린다” 하므로

마명이 국왕을 가리키며“지금 국토가 편안하고 대왕이 장수하니 청컨대 그대가 한번 깨뜨려 보아라.”하자. 이에 외도가 말을 못하고 굴복했다함~

이분이 가비마라 존자에게 법을 전하시니 13대가 되시고 이어 법을 이으신 분이 14조 용수보살인데,

이분이 남인도에 갔더니 그곳 사람들은 복업(기복)만을 믿고 있었는데 용수보살의 미묘한 법문을 듣고

“사람에게 복업이 있는 것이 제일인데 한갓 불성만을 말하니 누가 능히 불성을 보는가?”하니

용수“너희가 불성을 보고자 할진대 먼저 모름지기 아만을 없애라”하자. 그들이 묻기를“불성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하니

용수“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니며,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복도 과보도 없고 죽지도 나지도 않느니라.”하자

이 말에 마음을 돌렸다 함~

 

이 용수보살이 가나제바가 오는 것을 보고 시자를 시켜 바루에 물을 담아 그 앞에 놓게 하니 가나제바가 바늘을 물에 던지므로 용수보살이“물이 맑은 것 定(머물러)은 나의 덕(반야지혜 곧 법)에 비유하는 것이요, 그대가 물그릇에 바늘을 던진 것은 그 밑바닥을 다(확철)하고자 함이로다.”하시고 법을 전하시니 이분이 15조가 되신 것임~

 

15조 가나제바 존자가 어느 날 비라주에 가셨을때 그곳에 범마정덕 이라는 장자가 있는데 그의 집 정원 큰 나무에 맛좋은 큰 귀처럼 생긴 버섯(능이버섯)이 열려 장자와 둘째 아들 라후라다 눈에만 보여 따서 먹으면 또 다시 나곤 했다함~

장자가 가나제바 존자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너의 집에서 옛날(전생) 한 비구를 공부하도록 뒷바라지(공양)를 했으나 그가 도안을 밝히지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으므로 빚을 진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된 것이요, 그때 그대와 그대의 둘째 아들이 정성껏 공양했기 때문에 그 버섯을 보게되고 따먹게 된 것이다" 하시고“장자의 나이 몇이냐?”하니“79세입니다”하자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도에 들어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다시 몸으로 시주은혜를 갚게 되나니

너의 나이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하였는데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다함~

 

이렇게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도 삭이기 어려운 것임~

장자가 탄복해 이르기를“제자는 늙어 스승을 오래 섬길 수 없으니 원컨대 둘째 아들을 스승님을 따라 출가하게 해 주십시오”하여 가나제바 존자“옛날 석가 여래께서 수기하시기를 이 아들이 천년 후에 대교주가 될 것이다”하셨으니 이 말씀에 부합된다"하셨음~

 

이 아들 라후라다 존자에게 법을 전하시니 이분이 16대임~

일체가 해탈문 이라 들어가고 들어가도 안이 없고 나오고 나와도 밖이 없슴~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님이요, 속인을 속인이라 하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부르며, 높은 것은 높고 낮은 것은 낮다 하는 도리 또한 알아야 함~

 

 

5.

17조 승가난제 존자 ㅡ>18조 가야사다 존자ㅡ> 구라마다 존자

 

범마장덕 장자의 아들 제16조 라후라다의 법은 승가난제 존자로 이어져 17조가 되셨는데 이 17조가 한 동자를 만나 구리로 된 방울이 울리는 것을 보고 묻기를

“방울이 울리느냐? 바람이 울리느냐?” 하니

“바람도, 방울도 울리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울린 것입니다”하자

다시“그럼,그 마음은 무엇인가?”하니 동자가 모두가 고요하기 때문이나 삼매(정= 산란하지 않고, 망념이 없고, 움직임이 없음)가 아님(연을 만나 움직임) 때문이옵니다.”하자

승가난제“과연 잘 알았다. 나의 도를 계승할 자가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하고 법을 부촉하니 이분이 18조 가야사다 이심~

 

동방의 6조께서 5조로부터 법을 이어 의발을 받아 15년을 은거(보임)하시다가 광주 법성사(인중 법사)에서 스님들의 시비를 가릴 때와 같은 도리임~

 

이 마음이 일체의 근본이요, 이 마음을 밝히면 일체를 알고 편한 대로 쓰는 것이기에, 이 마음 밝히는 일인 수행이, 중생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임~

이 마음을 밝혀 신통을 부리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체의 진리를 깨달아 영원히 바르고 편안한 삶을 살자는 것이 그 목적임을 알아야함~

그러므로 핀돌라와 목건련이 같이 길을 가다가 부자인 부발타의 아들 주데카가 전단향 바리떼를 만들어 장대 끝에 매달아 놓고 신통으로 가져가라고 하자 신통제일 목건련은 사양했으나 핀돌라가 신통으로 올라가 가지자,

주위로부터 갈채를 받고 의기 양양하였다는 것을 들으신 세존께서 꾸짖기를 핀돌라여!그것은 승려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돈을 위해 재주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구들이여! 재가자에게 신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승가의 규율이다.”하셨으니 신통은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짓이며, 이것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편하고 중생과 더불어 좀더 잘 살고 재물을 갖는 것에 목적으로 한 수단에 불과한 중생심이며,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임~

 

세존께서 신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스낙카가 곁을 떠났을 때 세존은 나의 가르침은 진리와 일체 경계가 본래 없는 법을 증득케 하는 것이다.

 

신통은 아무 소용이 없는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 지말적인 것이니, 네가 맑은 수행을 버리고 떠나가면 네가 청정행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할 것이다.”하셨음을 알아야 함~

 

그러므로, 상이나 쫓아 법을 구하고 믿음을 내지 말고, 진리를 설함을 바로 보고 쫓으며, 그 알고 깨달은 바를 행함으로 수행을 삼아야함~

도를 닦는 자들이 자기는 항상 옳다하고, 비록 참회를 하고 입으로는 반성을 하나 마음속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그 뒤 행으로는 달라짐이 없으면서 남의 허물이나 보고 뒷공론이나 쑥덕이면서, 수행을 하고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짓이며, 물이 고요하기를 바라면서 솥에 불을 더 많이 지피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함~

 

아무 소득 없는 짓에 자기를 훈습해서 결과적으로 불과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업만 짓고 원결이나 맺는 일들을 하지 않기를 바람~

 

동자 즉 야사다 존자(18조)가 승가난제 존자를 만나 법을 잇고 교화를 하던 중, 큰 월지국에 이르러 한 바라문의 집에 이상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집을 들어 가려하니 집주인 구마라다가“어떤 무리들이냐?”하자

“부처님의 제자다”한 말에 정신이 아찔해서 즉시 문을 닫아버리자 다시 문을 두드리니 “이 집에는 사람이 없다”하므로

“없다고 답한 사람은 누구냐?”하자 그 말에 이상하게 생각해서 문을 열고 영접하니“세존이 수기하시기를‘내가 열반에든 천년 후에 큰 보살이 월지주에 출현하여 불법을 이어 높이리라’하신 것과 그대가 부합하도다.” 하고 법을 부촉 하게 되었음~

이분이 제 19조 구마라다 존자임~

 

6. 법문

19구마라다 ->20조 야사다 존자.

 

제18조 가야사다 존자로부터 법을 이은 구마라다 존자가 제19조가 되셨는데, 이 분이 중인도에 이르게 되었는데

거기에 큰선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사야다임~

그가 묻기를“우리 부모가 일찍이 삼보를 믿으나 항상 병에 걸리고 하는 일도 모두 뜻대로 되지를 않으나, 이웃집 사람들은 백정짓을 하는데도 몸은 항상 건강하고 일마다 잘되니, 저들은 어찌 행복한데 우리 집은 어찌 불행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어찌 의심하느냐, 선과 악의 과보(인과응보)는 3세가 있거늘 범부들은‘어진 사람이 빨리 죽고, 나쁜 사람이 장수하며, 어진 자가 흉한 일을 겪고, 나쁜 자가 좋은 것을 보고, 인과가 없고 죄와 복이 허망하다’고 말하면서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이 터럭 끝만치라도 어긋나지를 않아서 비록 백천만겁을 지날지라도 또한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하자

이 말에 의심을 풀었음~

 

이어 “너는 비록 이미 3업(과, 현, 미래업:구,신,의 업)을 믿으나 업이 비록 미혹(번뇌장-무명)으로부터 생기고 미혹이 알음아리(識)로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식은 깨닫지 못한(不覺)때문이요, 미혹은 마음(本覺)에 의지함을 밝히지 못한 것이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생멸이 없고, 조작도 없으며, 인과응보도 없이 천연하여, 적적하고 지극히 밝으니(공적영지) 내가 만약, 이 법문에 들어가면 여러 부처님과 더불어 같을 것이다.

온갖 선악과 유위법, 무위법이 모두 꿈과, 눈 깜박임과 같은 것이다”하자 이에 사야다가 출가 할 것을 간청하였음-

법을 전하여 제20조가 되셨음~

 

7. 법문

20->24조

제19조 구마라다 존자의 법을 이은 제20조 야사다 존자가 바수반두가 하루 한끼를 먹고(1종식) 눕지 않고 여섯때를 예불하며

(6시는 주야를 말하는데 낮은 아침, 낮, 석양이고 밤은 초저녁, 밤중, 새벽으로 여섯 때인 것임)

청정해서 욕심이 없어 대중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그를 제도하시고자 그의 제자들에게 묻기를 “이 변행두타 즉, 두타행을 잘하는

(두타행은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사치하지 않고 1종식으로 먹는 것도 절약하고 정진에만 집중하고 어렵고 고달픈 행을 즐겨하는 것임)

그런 너의 스승 바수반두가 능히 그러한 청정행을 닦고 있으니 어찌 불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하니

“우리 스승의 정진이 그와 같은데 어째서 바르게 닦아 불도를 이루지 못하겠습니까?”하자

“너희 스승은 도와는 멀다. 설사 그러한 고행을 겁이 다하도록 닦는다 해도 허망의 근본 즉, 상으로써 상에 집착하고 구함이 있어 인과를 여의지 못하는 것이니라.”하니

“그럼 존자께서는 어떠한 덕행을 쌓았길래 우리 스승이 잘못한다 하십니까?”하자

“나는 도를 구하지도 않고 또한 정신이 뒤바뀌거나 즉, 흐리거나 산란하거나 거짓인 허환한 것을 참으로 알지 않으며, 예불하지도 않고 또한 소홀히 생각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장좌불와 하지 않으나 또한 게으르지 않으며, 한끼를 먹지도 않으며 또한 여러번 먹지도 않으며, 나는 만족할 줄도 모르고, 또한 탐욕을 내지도 않노라. 그러므로 마음이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을 도라 하니라.” (이 말을 치우쳐 받아 들여 한 쪽만 생각들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들은 바수반두가 무루(샘이 없는, 항상하는)지혜를 얻게 됨~

 

이 바수반두 존자가 제21조가 되며, 이 분의 법을 이은분이 제 22조 마노라 존자인데,

학륵나라는 이가 가는 곳마다 5백마리 학이 따라 다녔으나 이학을 제도할 법력이 없다하므로 마노라 존자께서

“과거 전생에 5백명의 제자를 네가 거느렸는데 그들이 학이 되어 너를 따라 다니게 된 것이다. 너는 법사로써 무생법을 설하는데 어떤 신도가 공양을 초청할 때 너만 가서 공양을 받으니까 그 제자들이 평소 항상 설법하시기를‘법에 평등한 사람은 먹는 음식도 평등하다’고 하셨는데 공양을 받을 때 혼자만 받고 우리 5백제자는 공양을 주지 않으심? 하고 불평불만-

그 후로 공양을 받을 때마다 5백제자를 거닐고 다녔는데, 학륵나는 법력이 있어 시주은혜를 녹일 수 있었으나 5백제자들은 공부의 힘이 부족하여 그 시은을 녹이지 못해 죽어서 사람 몸을 받지 못하고 축생인 학이 되어 너를 따라 다니는 것이다”하고 이들을 위해 게송을 읊으시니,

 

마음이 만가지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이 참으로 실다운 그윽함이네

흐르는 것(用) 따라 본성을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느니라

 

하는 법문으로 이들 5백학을 제도하였음~

 

이 학륵나 존자가 23조가 되시어 교화를 행하며 중 인도에 이르렀을 때 사자라는 수행인을 만났는데 그가 묻기를“제가 도를 구하고자 하니 어떻게 마땅히 마음을 써야 합니까?”하자

“네가 도를 구하고자 하면 마음을 쓸 바가 없는 것이다.”하니

이미 마음을 쓰는 바가 없다면 누가 불사를 짓(도를 이룸)습니까?”하자 “네가 만약 마음을 쓰는 것이 있다면 곧 공덕이 아니요,

네가 만약 마음을 쓰는 것이 없으면 곧 그것이 불사이니라(무위). 내가 지은바 공덕은 내 다, 내 것이다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이 말씀에 지혜를 얻어 법을 이으니 이 분이 곧 제 24조 사자 존자임~

마음을 쓴다하는 것은 곧 유위의 것이며, 도와 계합하는 이것을 무심이라 하는 것임~

내다(능), 내것(소)이다 하는 능소심이 있으면 그것은 유위법으로 공덕이 아닌 때문임~

(상에 의연하는 복덕과 공은 차이가 있음)

그런데 백운화상의‘불조 직지 심체 요절’을 번역 강설한 *성스님이라는 분이“도를 제대로 알게 될 때는 무심이 되어야 된다. 그러나 무심도 좋지 않다고 해서‘무심 유격 일중관’이라고 하지만, 처음에는‘무소용심’곧 마음을 쓰는 바가 없어야 된다, 간단히 말하면 무심이 되어야 도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했는데, 자칫 그럴싸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렇게 언구를 빌려 잘못 해석하고 이것으로 법을 설했다하면 법을 그르치는 것이니, 조심해 살펴야 하는 것임~

왜냐하면, 이 분이“무심도 좋지 않다고 해서 ‘무심 유격 일중관 즉, 무심도 한 관문을 격해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심이 되어야 도를 구할 수 있다”한 말은 무심 그 자체가 도와 한 관문을 격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잘못 알게 하는 것이니, 처음에는 무심이 되고 나중에는 무심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말인가? 이 분은 도와는 십만 팔천리 멀뿐이니, ‘무심이 관문을 격했다’한 도리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임~

또 무심이 곧 도인 것인데 무심이 되어야 도를 구한다고 했으니 무심과 도를 둘로 보는 소견임~

이토록 법은 이 짧은 한 마디로 전체의 선지가 어긋나며 그 분의 법위가 드러나게 됨을 살펴 알아야 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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