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공유 <사회를 바꾸는 아티스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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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야 하는 것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사회다 | <1> 1995년과 96년의 언저리, 어느 데몬스트레이션 동아리의 대표를 맡았던 적이 있다. 그래봤자 총원 열 두어넛에 불과하지만, 그 열두어넛이 무슨 일만 있다하면 전원 거리로, 철거촌으로, 파업현장으로 나갔으니 어찌 보면 참여도에 관해 선 대단한 동아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 동아리는 당시 동아리나 정치 조직의 패턴이었던 선배들의 교육과 의식화, 조직화에서 자유로운 <자생적>인 동아리였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3인칭의 화법을 쓸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달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영화와 문학을 업으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접한 존 세일즈나 켄 로치의 극영화들, 혹은 <칠레전투> 같은 다큐멘터리를 몇몇 동기, 후배들과 같이 보면서 세상일에 무관한 영화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낄 무렵, 고은과 백낙청, 이승하를 읽으면서 원고지에 글만 쓴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몇몇 친구들을 알게 되었었다.
그들과 어울리며 지내다가 우리는 <로자>를 읽었고, <공산당 선언>을 읽었고,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했다. 이진경의 책들과, 개중에 누군가는 윤소영의 알튀세르를 읽기도 했지만, 그리고 나는 <미학오딧세이>를 읽기도 했지만, 거리로 나갈 때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억누르고, 손에손에 짱돌이나 꽃병을 들고 스크럼을 짰었다. 386의 회고와는 틀린 297의 실제생활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집회가 끝나고, 뒷정리의 시간에 우리는 <인터내셔널>을 불렀었다. 공산당 선언의 첫 부분에 나와있는 구절을 외치고,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를 승리의 관점에서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천상 보수주의자 혹은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 부르지만, 그리고 나도 그런가보다 생각하지만,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고 해서 반동으로 몰려 숙청 당하지 않는 <그날> 이기'만'을 기원하면서.
그러나 그 열 두어넛이 매일 <철의 노동자>나 <단결투쟁가>를 듣고, 세미나 교재를 준비하고, 빨간 책들을 읽은 것은 아니다. 어떤 후배녀석은 조 새트리아니와 스티브 바이를 동시에 연구하는 기타광이었고, 또 다른 어떤 녀석은 셈 페킨파와 존 카펜터를 즐겨 보는 언더 폭력영화광이었으며, 어떤 녀석은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칭하는 박찬욱 매니아에, 어떤 여자 후배는 N.EX.T(New EXperiment Team)의 모든 노래를 외우고 있는 신해철의 광팬이었다.
집회 후의 뒤풀이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 후배녀석은 나에게 항상 <아! 대한민국>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해왔고, 지금도 간혹 가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기름진 땅과 꿀물이 넘쳐흐르는 이땅...>을 흥얼거리기도 하는 나는 정태춘의 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공개석상, 이를테면 집회현장이나 세미나, 독립영화제 같은 데서 언급하지를 않았다. 다만 각자의 집에서 그리고, 뒤풀이에서 웃고, 울고, 재잘거리며 떠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1996년의 패배(노동부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맞이하고 나는 군대로, 누군가는 졸업영화를 촬영하고, 누군가는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유학을 갔다. 지금은 연락마저 되지 않는, 아니 사실은 한 다리만 걸치면 연락이 될 법도 한데, 그리고 사실 이후에 다시 만나기도 했었지만, 우리는 그 데몬스트레이션 동아리에 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 개인적으로 그리워하거나 간혹 가다 엄청나게 술에 취했을 때, 눈빛으로 얘기했을 뿐.
나는 그때 그들이 보았던 박찬욱과 들었던 신해철, 그리고 어떤 여자 후배와 내가 공유했던 정태춘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감정을 관통했던, 취미생활이 아닌 본령이었다고 자꾸만 생각이 든다.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2> 몇 년이 지난후, 지승호를 알게 되었다. 그가 모은(?) 첫 번째 책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역시 흥미롭게 읽었지만, 그것은 2002년이 가지는 당대의 시간적인 특수성(대선이라는 시간적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다)과 무엇보다 이성적인 관찰자 마인드로 읽었다. 물론 고종석이나 오연호의 인터뷰는 개인적인 인연으로 인해 깊이 빠져들기도 했지만.
그런데,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인터뷰 모음집 <세상을 바꾸는 아티스트>는 이성적인 관찰자 마인드로 읽을 수가 없었다. 왜 일까? 그리고, 인터뷰 대상자인 강헌, 권해효, 김미화, 박재동, 박찬욱, 신해철, 안치환, 장봉군, 정태춘 중에서 박찬욱과 신해철, 정태춘에게 가장 먼저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세 명의 인터뷰를 읽으며 공시성을 생각한다. 내가 지금 여기 동경의 하늘 아래에서 2003년 7월 10일 3시에 읽고 있는, 211 페이지의 '크게 힘든 것은 없었고, 힘든 일은 없었어요. 검열철폐 운동할 때 외로웠던 적이 한 번 있었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아! 대한민국>으로 3년을 했고,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재판을 받고 할 때...'라는 구절을, 7년 전 집회 후의 뒤풀이에서 나에게 <아! 대한민국>을 신청한 그 여자 후배녀석도 읽고 있을까 하는 공시성.
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어떤 매개체를 통해, 시간의 공유를 생각하게 만들 때, 그것은 추억으로부터 빠져 나와 현실이 된다. <넥스트> 시절부터 줄곧 견지되어 온, 지금은 아마도 '고스트스테이션'의 열혈팬이 되어 있을 또 다른 후배녀석은 신해철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MP3 다운로드보다는 직접 인디밴드들의 음반을 사면서 잠이 안 올 때 듣겠지. 문득 5년간이나 연락하지 않았던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추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참, 안치환의 팬이었던 녀석도 떠오른다. 노래방만 가면 사족을 못쓰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불러 제끼던, 집회현장에서 <철의 노동자>를 목에 핏발이 서도록 부르던 그 녀석이 지승호의 '요즘은 철의 노동자 같은 노래는 안부르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안치환의 웃음을 공유한다면 좋을 텐데.
'가끔 부르죠. 분명히 내 노래인데, 내 노래 같지 않은 것이 있어요. 연주로서는 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빼놓죠. 너무너무 고민하면서 만든 노래여서 애정이 있는데, 사람들이 불러주는 게 고맙죠. 저작권 생각을 안하게 만드는 게 저작권 리스트에 없어요(웃음). 그걸 많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게 저한테는 기쁨이죠.'
(기쁨이란다. 너도 안치환의 기쁨에 일조하는 거야. 잘 살고 있냐? 보고 싶다. 임마)
원래 서평이라는 것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데, 이번 책은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다. 왜냐면 내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비록 28살밖에 안되었지만,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회고하는 그 시절의 기억, 그때 만난 녀석들이 책 한 권으로 떠오르는 것은, 또 하필이면 책 한 권에 왜 그 기억의 관계자들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인지.
혹시라도 95년과 96년 언저리를 기억하는 20대의 동년배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중에 혹시라도 정태춘과 박찬욱과, 신해철과, 안치환을 동시에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 분들과 아마도 비슷했을 법한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3> 지승호는 심심하면, 잊을만하면 자신은 전문적인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는 패배주의자의 말을 한다. 그런데 지승호는 착각을 하고 있다. 자신의 작업의 중요성과 의미를 <글쓰기>로 치환해 버리다니. 당신은 지금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글은 그 인터뷰를 옮기는 하나의 형식적인 방법론에 불과하다. 콤플렉스 덩어리.
그 콤플렉스 덩어리를 고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일 테다. 하늘이 주신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보시길 바란다. 내가 좀 지켜보니까, 당신의 재능은 이것밖에 없는 듯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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