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에서의 결혼
그러나
그의 부모를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이 말도 없이 5일
동안이나 공장 문을 닫고 사라졌다가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동양 여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니 내가 부모라도
까무러칠 일이었을 것이다. 모계 사회 전통이 남아 있는 그리스에서는 아들이 아니라 딸을 시집 보낼 때
집을 사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 문화권에서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는 빈털터리 동양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결혼한다는 것은 그의 부모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에게조차 가히 폭탄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몸져누워 버렸고 아버지는 나를 맞이해준 이모부를 나무라고 화를 내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사는 이모 댁 식구들은 모두 내게 호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이모부가 나를 데리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이 아이는 나의 다섯 번째 자식이나 마찬가지이니
믿고 결혼을 시켜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집안에서의
이모부의 위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 인품이 존경스러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어머니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시댁에 와서 결혼 전에 살림과 그리스 예절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나를좋아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이모 댁에 있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결혼 전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함께 살게 되자 렙테리는 싱글벙글 좋아했고 시부모님도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웨딩드레스며 손님에게 줄 답례품을 사러 다녔지만 내게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값을 치를
때마다 송구스럽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고맙게도 이모부가 자기 자식을 결혼시키는 것처럼 나서서
이부자리나 가전제품을 사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시어머니와 언니인 돌아가신 이모와는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미묘한 관계가 있는 집안에 난데없이 외국에서 온 며느리인 내가 끼게 되었기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하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모네 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서 내 입장이
더 미묘했던 것이다.
렙테리
집안은 큰 형은 이혼하고 둘째 형은 미국에 살고 있었다. 남편과 이혼한 큰 형의 딸인 조카 티나와 부모님이
사는 집에 내가 시집을 온 것이다. 공처가인 시아버지는 입담이 좋은 호인 형이었고 티나는 통통 튀는
성격에 머리가 비상해서 가끔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주는 활력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시댁에 방이 모자라서 나는 티나와 한방을 썼는데 렙테리가 아쉬워하며 방을 기웃거릴 때마다 시어머니는 자기 방에 가서 일찍 자라고 나무라셨다.
그런데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골치 아픈 시어머니만 설득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교회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은 태어나면 자동으로 국교인 희랍 정교회
교인이 되기 때문에 결혼식은 당연히 희랍정교회에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국인인 내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교회 교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희랍정교회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나는
천주교에서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영세 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엄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다. 외국으로
나가 소식이 끊어졌다가 난데없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엄니가 얼마나 놀라실까를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어쩔 수
없어 편지를 썼다. 나로서는 그 동안의 사정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사실은 엄니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나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캐나다의 초희네가 최종 목적지인 줄 알고 있었는데 한국을 떠난 지
1년도 안되어서 엉뚱한 나라에서 결혼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도덕적 결벽증이 심했던 남동생의 반응도 걱정이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남동생은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오히려 어머니가 설득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남동생은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아서 나의 결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몇 년 후 남동생이 다시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을 때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눈물이 났다.
물론
편지를 보낼 때 김루미 사람들이 찾아와서 난리를 칠 경우를 대비해서 술집에서 찍어 놓았던 사진을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나중에 김루미가 동생이 하는 양복점으로 찾아왔을 때 그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두 말 않고 가버렸다고
해서 사진을 찍어 놓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내 편지를 받고 전후 사정을 이해하신 엄니가 서류와 함께 한복 한 벌을 보내 주셨다. 한복을 입고 시부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결혼을 승낙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을 때 시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시어머니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아들과 남편, 손녀까지 내 편을 드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생긴 것 같았다.
영세를
받은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다음 단계인 견진성사를 받아야 하는데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서 또다시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경(주기도문)을 그리스
고어체로 외워야 하는데. 아직 현대 그리스어도 못하는 내가 고대 그리스어를 외워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시험공부 하듯이 열심히 공부해서 외웠다.
드디어
이모 딸 스마라그다를 대모로 세우고 그리스 이름 Eftihia(영어로
Happy)를 받아서 결혼 준비가 되었다. 살 집도 장만하고 드디어 결혼식을 올릴 차례인데
그 동안 결혼식 준비를 잘 해오던 시어머니가 이번에는 갑자기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서 또 한 번 애를 먹였다. 또 다시 이모부가 나서서 시어머니를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결혼식장에 늦게야 나타났다. 결혼식장에는 이모부가 신부의 아버지가 되어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사진으로 본 이모부가 울고 있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나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이 공교롭게도 5월 16일이었다. 아마도 결혼식이 나에게는 혁명, 시어머니에게는 쿠데타였는지도 모른다. 결혼식 때문에 남편이 돈을 많이 써서 신혼여행은 가까운 섬으로 갔다. 2인용
자전거를 타거나 뉘였뉘엿 해가 지는 바닷가에서 손에 깍지를 끼고 산책을 하며 일주일을 보내며, 그와
가까워지는 노력을 많이 했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장난을 걸어주기도 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애교도 부려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가족들도 없이 치른 이 결혼을 과연 잘 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 때문에 그가 잠이 들면
밖으로 나와 바닷가에 혼자 앉아 골똘하게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정이 미쳐 생기기도
전에 선택한 사람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실망
안 시킬게, 많이 사랑해 줄게'하고 다짐하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댁에 들렸더니 시어머니가 이중으로 음식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요리 만드는 법도 배우고
그리스 예절도 배워야 하니 매일 시어머니 댁으로 출근을 하라고 했다. 결혼했으니 내 집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나로서는 반대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남편이 순순히 그렇게 하자고 하니 은근히 원망스러웠다.
다음
날부터 남편이 일찍 출근하고 나면 집안 청소를 대강하고 버스를 타고 시댁에 가서 함께 집 안 청소와 점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침은 허술하게 먹고 점심을 저녁 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모두 점심 때가 되면 집으로 가서 식사하고 낮잠을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남편도 점심시간에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 와서 식사하고 잠깐 낮잠을 잔 후 다시 출근했다.
시어머니는
매주 수요일에 꼭 생선과 삶은 채소 또 주말에는 양고기 혹은 감자와 함께 소고기 요리를 했다. 또 다른
날은 콩으로 만든 수프, 또 다른 날은 토마토나 호박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양념 된 쌀을 넣어 오븐에
굽는 요리 등을 했는데 매우 영양학적으로 식단을 짜서 그런 생각을 아직 하기 어려웠던 한국의 우리 집 식생활과 비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