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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순, 이곳 알프스 자락은 이미 백설의 세계로 들어섰다.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겨울은 일찍 추위와 눈이 닥친 것 같다. 물론 가을 비수기에는 늘 다녀오는 보다 따뜻한 한국생활을 하다 와 그런지 추위는 더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항상 정답게 맞아준 고향의 악우들을 떠나 갑자기 홀로 된 외로움도 한 몫 했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 외로움과 추위를 잊게 한 책이 있다. 한국의 악우들이 건네준 고마운 선물 중에 같은 산악회의 선배 효순 형이 간직하고 있던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다. 형과는 20여 년 전에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이곳 알프스의 북벽들을 함께 오른 사이였기에 더없이 고마운 산서인 셈이다.
- ▲ 몽탕베르 돌탑 언덕에서 바로보는 드류 서벽의 장관.
- 시차적응이야 하루 이틀 지나니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지만 무엇보다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밭을 쏘다녔다. 낮에 녹초가 될 정도로 움직이고서 저녁에는 자연히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를 집어들었다. 이 책의 저자 로베르 테즈나 뒤 몽셀(Robert Tezenas du Montcel·1903-1986)은 우리 산악인들에겐 낯설지만 100여 년 전 이곳 프랑스에서 태어나 16세에 몽블랑 산군을 처음 접하고서 산의 세계에 매료되어 훗날 GHM(고산등산그룹·Groupe de Haute Montagne) 회장까지 하였으며, 특히 몽블랑 지역에서 왕성한 산악활동을 하였기에 더욱 흥미가 있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에 빠져 겨울밤을 보내고서 이 책을 지니고 산행할 만한 곳을 떠올렸다. 몽셀이 책속에서 활동한 무대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을 비수기에는 겨울 스키시즌의 시작인 12월 중순까지 모든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기에 활동반경이 좁아진다. 그래도 갈 곳은 있기 마련. 몽탕베르(Montenver) 언덕이 떠올랐다. 저자 몽셀이 몽탕베르 언덕을 기점으로 많은 산행을 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상쾌한 전나무숲 하이킹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숙소를 떠난다. 아침 9시가 지났는데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샬레의 굴뚝들에서는 연기가 퐁퐁 피어나고 있다. 겨울철의 흔한 풍경이다. 천천히 마을 외곽을 벗어나 플라냐르(Planard) 스키장으로 향한다. 시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 스키장은 아직 개장하지 않았지만, 며칠 전에 내린 자연설 위에 인공설을 잔뜩 뿌려 큰 눈 언덕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다. 크러스트가 된 설사면 위를 한 발 두 발 옮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다. 곧 스키슬로프를 지나 전나무숲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전나무숲은 언제나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한다. 얼마 가지 않아 숲속 오두막집에 이른다. 이 집 주인은 작은 키의 다부진 몸매를 가진 산악가이드다. 몇 년 전 이곳을 지나다 그의 모습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한사코 손을 내저었던 적이 있다.
- ▲ 샤모니 계곡을 내려다보며 그랑 발콘 노드를 따라 횡단하고 있다.
- 이 숲에서 몇 대째 내려온 그 집에 아들이 있는데, 20대 초반으로 암장에서 종종 만나는 사이다. 아들 또한 아버지의 대를 이을 생각인지 ENSA(프랑스국립등산스키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번은 우연히 3,600m 고지의 가파른 설사면에서 그를 만났는데, 대담하게 스키활강을 하며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숲속의 작은 목초지를 지나 산길은 꾸불꾸불 이어진다. 모퉁이 하나를 도니 가파른 바위사면에서 인부 넷이 작업하고 있다. 돌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작업으로, 가만히 보니 그 중 한 명은 산에서 종종 보는 인물이다. 손을 흔들며 그 아래를 급히 지난다. 비브람 등산화와 각종 등반장비를 착용한 채 바위사면에 매달려 있는 그들 모두 산악인이 아닐까 싶다.
- 꼬불꼬불 올라가던 길은 이제 산허리를 휘돌아간다. 드류와 베르트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참을 걸어 다시 작은 숲길에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두 명의 사냥꾼을 만난다. 위장복을 입고 사냥총을 어깨에 멘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헤어진다. 즉 자신들의 목표를 포획하기 위해 한 명은 아래쪽에,서 한 명은 멀리 돌아올라 위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한겨울이 오기 전이면 종종 목격하는 풍경이다. 이들의 목표는 주로 산양인데, 일정량의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사냥꾼에게 추첨으로 배당된 수만을 잡을 수 있도록 허가가 난다고 한다.
산악열차 생기기 전 조랑말 타고 오른 곳
길은 이제 드류가 빤히 올려다보이는 로쉐 데 모테(Rochers des Mottets·1,638m)다. 메르데 빙하의 끝자락이다. 발레 블랑쉬에서 빙하 스키를 타고 샤모니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빙하 끝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숲길로 내려가야 한다.
- ▲ 몇 대째 전나무숲에 살며 산악가이드를 하는 부자가 사는 오두막. / 한겨울이 되기 전에는 어깨에 엽총을 멘 사냥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 여기서 몽탕베르에 오르기 위해 남쪽 방향으로 난 숲길을 오른다. 이제 길은 좁아져 깊은 눈을 헤쳐 오르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군데군데 산양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르니 좀 낫다. 산양 발자국에 고마움을 느낄 정도로 심설을 걸어 오른다. 좀 전에 만난 두 명의 사냥꾼을 생각하니 같은 인간으로서 산양에게 미안함 마저 든다.
이제 샤모니를 떠난 지 2시간 반이 지났다. 몽탕베르 전망대에 못 미친 숲길이다. 여름철 트레커들을 위해 세워둔 안내판이 보인다. 100여 년 전, 산악열차가 생기기 전에는 관광객들이 조랑말을 타고 올랐다는 내용이다. 1860년 나폴레옹 3세와 황후가 이곳에 올라 가이드가 빙하의 빙벽을 등반하는 모습을 관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곧이어 1,913m 고지의 몽탕베르 전망대에 올라 한숨 돌린다. 연중 가장 비수기라 관광객은 몇 되지 않는다. 설피를 고쳐 신고 전망대 뒤로 난 길을 걸어 오른다. 차츰 웅장하게 흘러내리는 메르데 글라스(Mer de Glace) 빙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좌우로 드류와 그랑 샤르모, 그리고 저 멀리 그랑 조라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2,000m 이상부터 눈은 더 깊다. 설피를 신었지만 가파른 사면의 심설을 헤쳐 나가기 쉽지 않다. 7월 초면 이곳은 알프스의 장미 알펜 로제가 지천으로 피어나 많은 이들이 찾는다. 빙하와 침봉, 알펜 로제 이 세 가지만으로도 알프스의 풍광을 대변하기에 충분할 텐데 거기에다 산양이나 마모트와 같은 야생동물들이 반겨준다. 하지만 이미 한겨울에 접어든 지금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 ▲ 다음날 아침 돌탑 언덕을 서성이는 필자.그랑 샤르모 등 침봉들이 구름에 가려 있다. / 텐트에서 본 드류.
- 가파른 사면을 지그재그로 오르며 진땀을 흘린다. 2시간 이상 오르니 마침내 몽탕베르의 돌탑 언덕(Le Signal·2,204m)이다. 전망대에서 약 300m 고도를 올리는 데 이처럼 힘든 경우는 처음이다. 이곳은 메르데 빙하를 가장 조망하기 좋은 언덕으로서 드류 서벽이 바로 건너다보이며, 그랑 샤르모가 지척이다. 케언을 쌓기에 좋은 돌들이 흔해 그 수가 날로 늘어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돌탑 사이의 눈밭에 짐을 부린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라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텐트를 친다. 고도가 낮은 태양은 그랑 샤르모 뒤로 숨어 있어 급히 텐트 속 침낭에 들어 땀으로 차가워진 몸을 데운다.
이제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를 읽을 차례다. 이미 읽어본 내용이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1914년 그의 나이 11세에 몽셀은 산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형들이 바로 전년도에 이곳 몽블랑, 즉 보송 빙하 중앙의 그랑뮬레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서다. 눈과 바위, 눈부신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한 자일파티를 보고서 그는 본능적으로 자일의 의미를 포착한다. 그것은 위험을 받아들여 그걸 나눠 갖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쟁으로 그는 5년 후에나 꿈에 그리던 몽블랑을 대면하게 된다. 이때 그는 제앙 안부에 올라 알피니즘의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몽셀은 대학에 들어 GMH(고산등산그룹)의 사무장 지골을 만나면서 매년 샤모니를 찾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곧 이 단체 회원이 된 그는 가이드 없이, 심지어 등반기록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순수한 개척정신으로만 어렵고 힘든 등반을 추구해 간다. 바로 이 단체의 결성목적인 순수 알피니즘의 정신을 이으려 노력했다. 그 후 그는 이 단체의 회장까지 된다. 오늘날 GMH는 세계 최고의 정예 산악인 모임으로 발전해 있다.
- ▲ 샤모니 계곡이 아침을 맞고 있다. 건너편은 에귀 루즈 산군.
- 고산등반그룹 회장까지 지낸 독신
침낭 속에 따뜻하게 누워 1시간 즈음 읽었을까. 데워진 몸으로 밖으로 나온다. 오후 3시가 넘었을 때다. 아직 남아 있는 오후 햇살을 즐기기 위해 서쪽 언덕을 넘는다. 텐트 친 돌탑 언덕에서 100m 거리의 작은 언덕에 올라서니 햇볕이 반긴다. 눈밭이지만 선글라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태양빛의 세기가 약하다. 샤모니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냥갑처럼 작게 보이는 가옥과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한동안 플랑 드 래귀(Plan de l'Aiguille·2310m)로 이어지는 그랑 발콘 노르드(Grand Balcon Nord)를 따른다. 하지만 곳곳에 가파른 설사면이 이어져 있어 신경을 바짝 쓰며 횡단한다. 약 50m 전방에 산양 한 마리가 귀를 쫑긋하며 필자를 바라보고서 잽싸게 도망간다.
1시간 이상 걷자 태양이 한껏 고개를 숙여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기울어진 태양이 마지막 빛의 가루들을 뿌려 화강암 침봉들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렇게 해가 있을 때 최대한 멀리 와 보고 싶었던 것은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의 저자 몽셀이 바로 몽탕베르에서 이 길을 따라 그레퐁을 횡단했기 때문이다. 책속의 세 번째 이야기인 ‘필수코스’에 나온다.
발길을 돌려 돌탑 언덕으로 돌아온다. 샤모니 계곡은 이미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었으며, 태양의 반대편인 동북쪽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급히 텐트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니 메르데 빙하쪽의 일몰 풍경은 아쉽게도 끝난 뒤였다. 눈을 녹여 저녁을 먹고 나자 사방은 암흑의 세계다. 텐트로 들어와 침낭 속에서 다시 책을 집어든다. -
- ▲ 태양이 기울어 금빛으로 물들고 있는 침봉들을 향해 가고 있다. 몽셀이 오른 그레퐁과 블래티에르가 보인다. / 돌탑언덕에서 남쪽으로 본 풍경. 빙하와 그랑 조라스, 그랑 샤르모 등이 보인다.
- 12가지 이야기 중에 이제 네 번째인 ‘미지에의 제1보’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랑 샤르모 북벽’이다. 바로 이 텐트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침봉이 그랑 샤르모이며, 곧장 올려다보이는 눈 덮인 벽면이 북벽이다. 이곳서 몽셀은 친구 폴과 함께 등반을 시작하지만 악천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절하게 생환하는 이야기가 압권을 이룬다. 재미난 것은 발을 배낭에 넣고 신문지를 옷에 잔뜩 집어넣은 채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비박한 옛 산악인의 모습이다.
한편 그는 ‘체력과 유연성, 기술 등은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창조성과 자발성, 결단력은 결코 그렇지 못하기에 산사나이는 그를 나약하게 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가이드북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기 위해 랜턴을 두 개나 밝히며 읽지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눈이 피곤해 밖으로 나온다. 저녁 먹을 때보다 훨씬 더 짙어진 어둠 때문에 진정한 알프스의 밤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펼쳐진 침봉들의 어두운 형체가 마치 거대한 성당처럼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그 위로 수많은 별들이 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이 암흑의 공간에 박혀 있다. 바로 이런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저자 몽셀이 알프스의 풍광에 자신의 생애를 걸었던 이유가. 급히 삼각대를 펼쳐 카메라를 장착해 밤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추위도 잊은 채 한 시간 정도 눈밭을 오가며 사진을 찍는다.
구름이 빠르게 흩어지며 밤하늘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밤부터 날씨가 나빠진다는 일기예보에 따라 텐트를 다시 점검하고 안으로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밤 8시가 조금 지났다. 또다시 책을 펼칠 시간이다. 이제 책은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오후 해질 무렵에 보았던 침봉들 중에 그레퐁 바로 옆의 블래티에르 북사면을 몽셀이 초등반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텐트를 친 이곳에서 건너다보이는 베르트의 머메리 루트를 오른다. 오래 전에 필자는 바로 이 루트를 오르기 위해 샤르푸아 산장에서 자고 루트 초입까지 갔지만 심설 때문에 포기한 적이 있어 더욱 와닿는 대목이다.
- ▲ 몽탕베르 언덕 개념도
- 1시간 정도 읽다 랜턴을 끄고 눈을 감는다. 얼마쯤 잤을까. 후두득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바람에 실린 눈송이가 텐트에 부딪치는 소리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지났다. 침낭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책을 몇 페이지 읽다 랜턴을 끈다. 텐트를 두들기는 눈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눈을 뜨니 아직 밖은 어둡다. 그러나 눈은 내리지 않는다. 차 한 잔을 마시고 몽셀의 책속에 빠져든다. 열 번째 이야기 ‘유럽의 지붕 위에서’다.
‘단란한 가정 꾸리면 위험한 등반에 나설 수 있을까’
몽블랑으로 출발하기 전 그는 친구 넷이 체르마트의 브라이트호른에서 전원 사망한 소식을 접하고서 등산은 무욕의, 또한 가족과 같은 세속적인 끈에서 벗어난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지 않았나 싶다. 결코 독신론자가 아닌 필자는 만일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 진정 위험한 등반에 나설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이제 날이 밝아오고 있다. 아침 8시인데도 해는 뜨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온다. 돌탑 언덕의 가장자리로 가 샤모니 계곡을 내려다보니 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주변 침봉들에도 짙은 구름들이 걸려 있다. 이 언덕에서 멋진 아침 풍경을 기대했건만 단념하고 다시 텐트 속으로 든다. 침낭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책을 펼친다. 이제 후반부다. 낙석에 맞아 죽음을 앞둔 친구를 보며 몽셀은 되뇐다.
‘알피니스트는 (전쟁에 임한 병사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곤란에, 위험에, 더구나 적어도 그가 있다고 생각하여 정확하게 계량된 위험 앞에 몸을 노출시킨다. 그 곤란이나 위험을 그는 숙련, 저항력, 그리고 용기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알피니스트가 자기의 기쁨과 보람으로 삼고 있는, 자기 자신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은 운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의 판단력의 정확함에 따른 것이다.’
아침 10시가 지났을 무렵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텐트에 닿았다. 책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간다. 여전히 짙은 구름이 침봉들을 에워싸고 있지만 햇살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순수 알피니즘의 정신을 지키려한 몽셀과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잠시 수많은 돌탑들 사이를 오가며 하룻밤 그의 책과 함께 한 향기를 음미하며 텐트로 돌아와 짐을 싼다. 텐트를 걷어낸 눈밭에는 하룻밤 머문 한 인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다음엔 알펜 로제가 필 7월 초에 와 자리라 생각하며 돌탑 언덕에서 긴긴 하산길에 접어든다.
얼마 후 몽탕베르 전망대에 이르니 저 아래서 누군가 설피를 신고 올라오고 있다. 산악열차를 운전하는 직원이다. 쉴 때 잠시 설피를 신고 올라온 것이다. 서로 좋은 하루 되라며 인사를 건넨 뒤, 필자는 알프스 풍광에 내 생애 또한 걸어볼 만하지 않은가 생각하며 샤모니로 내려왔다.
다음날 샤모니 시립도서관에 가 몽셀의 <알프스의 풍광에 내 생애를 걸고>(1979년 한국어판)의 원작을 찾았다. 산악서적만 따로 모아두는 서가의 두 번째 칸에서 <Ce monde gui n'est pas le notre>(1965년 출판)를 찾을 수 있었다. 몽셀을 보다 가까이 만나보는 기쁨이었다.
- 꼬불꼬불 올라가던 길은 이제 산허리를 휘돌아간다. 드류와 베르트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참을 걸어 다시 작은 숲길에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두 명의 사냥꾼을 만난다. 위장복을 입고 사냥총을 어깨에 멘 둘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헤어진다. 즉 자신들의 목표를 포획하기 위해 한 명은 아래쪽에,서 한 명은 멀리 돌아올라 위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한겨울이 오기 전이면 종종 목격하는 풍경이다. 이들의 목표는 주로 산양인데, 일정량의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사냥꾼에게 추첨으로 배당된 수만을 잡을 수 있도록 허가가 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