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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남박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박창서[昌緖]
충남 토성(土姓) 및 입향성씨-(8)반남박씨(潘南朴氏) | ||||||||||||||||||||||||||||||
김진우의 성씨(姓氏)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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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상월 지역 반남박씨는 임진왜란때 박동민(朴東民,1556~1593)이 입향(入鄕)하여 세거(世居)하기 시작했다.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고려 제23대왕 고종때 지방행정관인 반남호장(潘南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역임한 박응주(朴應珠)를 1세조로 받들고 있다. "반남박씨대종회"의 기록에도 신라의 국운이 쇠퇴해지자 정국혼란으로 박씨(朴氏)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반남, 고령, 죽산, 밀양 등지로 분산거주하는 동안 약 280여년간 연락두절되어 신라 경애왕(景哀王,?~927)으로부터 호장공(戶長公)까지 약 280여년간의 사적(史蹟)을 알 수 없어 계통(系統)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호장공의 4세손 밀직공(密直公)의 계축호적(癸丑戶籍)을 기초로 하여 상계(上系)로 호장공 까지의 계통(系統)을 밝힐 수 있으나, 호장공 박응주의 상계(上系)는 선인(先人)들도 [기선(其先)은 부지(不知)]라 하였으므로 호장공의 4세손 밀직공 박수(朴秀)의 호적에 의하여 추정하면 호장공 박응주는 고려 희종(1205-1211)초 서기 1200년대에 반남에서 생장(生長)해 고려 고종(1214-1259) 때에 반남호장(戶長)을 지내면서 반남박씨의 가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호장(戶長)이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고려 성종때는 향직(鄕職)의 2품이었고, 현종 때에는 1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호장은 군(郡), 현(縣)의 으뜸가는 행정관(行政官)이다. 반남박씨는 박응주(朴應珠)를 1세조로 하고 반남(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삼았다. 반남박씨는 고려 말 문정공 박상충(朴尙衷,1332~1375년,자는 성부,시호는 문정)으로부터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였다.문정공 박상충은 신진 유생(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였다. 전교시판사(典校寺 判事,전교시는 고려 후기에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보관.인쇄하는 일을 맡고,종묘 및 초제의 축문을 작성하던 관청이며 판사는 정3품) 재임시에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간관(諫官) 이첨(李詹) 등 친명파와 함께 북원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인임일파의 축출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에 의해 귀양갔으며, 도중에 죽었다. 경사(經史).역학(易學)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지은 사전(祀典,제사 지내는 예법)을 썼다. 박상충의 아들 평도공 박은(朴訔,1370~1422년,자는 앙지,시호는 평도)은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이방원의 2번에 걸친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우의정(정1품정승),좌의정(정1품정승)에 올라 반남군과 금천부원군에 봉해져 반남박씨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특히 의금부판사(義禁府 判事,왕명으로 죄인을 추국하던 사법기관의 종1품으뜸벼슬) 때 신장의 정수를 1차에 30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장(刑杖,죄인을 심문할때 쓰던 몽둥이) 제도를 시행했다고 역사에 전한다. 반남박씨는 조선시대에 재상 7명, 대제학 2명, 공신 5명, 호당 6명, 문묘 배향 1명, 문과 급제자 215명 등을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반남박씨의 논산 입향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선조 25)경이라고 한다. 박동민(朴東民,1556~1593)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처가가 있던 현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로 가족을 이끌고 이주해와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박동민의 처는 전주이씨 익안대군(이방의)의 7세손으로 이눌(李訥, 1552~1631)의 딸이다. 당시 전주이씨 익안대군파는 논산에서 사족으로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처가와의 인연으로 박동민 일가는 논산 지역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1920년 간행된 "조선의 성(姓)"에는 현재의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에 반남박씨 약 27가구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에 박동민의 묘소와 재실인 영사재(永思齋) 및 박동민 신도비가 있다.
박동민 형제로 박동현과 좌참찬(左參贊,의정부 정2품)을 지낸 박동선이 있다. 박동민은 예빈시(禮賓寺,조선 왕실과 재신들의 음식물을 공급하던 관청) 참봉(參奉,종9품)을 지냈으며, 문장에 뛰어났고 절의가 높았다고 한다. 박동민의 논산 입향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선조 25)경 이라고 한다. 박동민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가 있던 현 논산시 상월면 대우리로 가족을 이끌고 이주해 와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박동민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질부사(腸窒扶斯,티푸스균이 장에 들어가 급성일으키는 장티푸스) 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