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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주일설교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9:1~8
‘9988234’가 무슨 말인지 아시죠?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는 것이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 때문에 고생하다가 결국 병 때문에 죽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는 죽더라도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의술이 발달하고 전문의가 많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질병 문제에 시달리는데 2000년 전 사람들은 오죽했겠습니까?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다양한 병을 치료해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1세기의 신자들은 자기들의 병도 그렇게 다 고쳐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신자들에게 마태는 9장에 와서 중요한 교훈을 주려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원보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 신자는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합니다. 심지어 일부 설교자조차도 본문을 잘못 이해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설교합니다.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질문 1> 2절의 “믿음을 보시고”는 무슨 뜻인가?
<질문 2> 5절에서 말씀하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질문의 정답은 무엇인가?
<질문 3> 8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 1. “믿음을 보시고”는 무슨 의미일까요?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이 자기를 고칠 수 있음을 확실히 믿는 것을 보셨다는 말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같이 생각해 봅시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2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중풍 병자는 침상에 누운 채 네 사람이 메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 곁으로 환자를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그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겠다고 남의 집 지붕을 때려 부수다니 이거 제정신이예요? 지붕(석회로 만든 슬라브)를 때려 부수는 소리라 온 집에 울렸겠죠. 주인이 달려와서 무슨 짓이냐고 말렸을 것입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 석회 부스러기가 쏟아졌겠지요. 그런 열정이라면 차라리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더 쉽지 않겠어요?
그런데 마태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지붕 뜯었다는 이야기를 생략했습니다. 마태가 설마 그 극적인 사실을 깜빡 잊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태는 사람들이 지붕을 부순 이야기에 관심이 빼앗겨 이야기의 핵심을 놓칠까 봐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생략했습니다. 마태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생략하면서까지 꼭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환자를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여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반드시 중풍 병을 고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께 중풍 병자를 데려온 그들의 믿음은 대단하고 칭찬할 믿음이죠. 그런데 그들의 믿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런 생각을 좀 해 봅시다.
대기업 회장이 신입사원을 만나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입사원이 ‘사람’, ‘남자’, ‘멋진 할아버지’라고 대답하면 정답이 아닙니다.
손녀가 할아버지 뒤에서 눈을 가리고 “내가 누구게?”라고 물을 때 할아버지가 ‘꼬맹이’, ‘여자’라고 대답하면 손녀가 화를 내든지 울어버릴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손녀”라고 해야 손녀가 행복하게 웃을 것입니다.
중풍 병자와 그 친구들은 예수님을 중풍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자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이는 마치 신입사원이 회장님을 돈 많은 멋쟁이 할아버지 정도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회장님이 신입사원 곁에 있는 과장과 부장에게 뭔가를 지시하면 즉시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입사원이 저 할아버지가 누수시길래 과장, 부장도 순종하지? 생각하며 정신이 번쩍 들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말은 그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을 보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병이 나을 수 있음을 믿는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을 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데 예수님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 이렇게 설교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풍 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람들이 앞길을 막았지만, 주인이 지붕을 부수지 못하게 말렸지만 어떤 난관도 헤치고 반드시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 여러분도 이런 믿음이 있으면 병 나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설교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마태의 의도를 반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단지 병이 나을 수 있음을 믿는 수준임을 보시고 그 믿음을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환자를 치료하기에 앞서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질문 2.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혹은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그 자리에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좋은 건수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만 해도 예수를 종교 재판에 넘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소관인데 이 예수가 지금 신성모독적 발언을 했으니 이건 사형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서기관이 그런 생각을 하자 예수님은 서기관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오해합니다. 죄를 사한다는 말은 그냥 말만 하는 것이니까 쉽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중풍 병자가 어렵다고 생각하면 완전 오해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병 환자, 중풍 병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은 원격으로도 치료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하나님만 할 수 있고 사람은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 가운데 병을 치료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특별한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갑자기 죄 사함을 선언하자 인간이 되어 감히 하나님 흉내를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오해와 착각을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질문 3. 이제 세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하신 후에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침상에 들려왔던 사람이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돌아갔습니다.
무리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왜 두려워했을까요? 전에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 즉 하나님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질병의 원인을 죄로 생각하는데 죄와 질병을 동시에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어 그들은 그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6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니엘서 7:13에 나오는 표현인데,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 “인자”같은 분이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께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인자’라는 말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서 무리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8절의 ‘사람’과 6절의 ‘사람의 아들’에서 ‘사람’이 같은 단어입니다. 무리는 자기들 눈앞에 와 있는 그 예수님이 바로 다니엘이 예언한 사람의 아들인 것을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처음에 했던 질문, 오늘 설교 제목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여러분이 하는 일도 형통하게 해 주시는 것을 기대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그런 것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축복을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족을 건강하게 하시고 사업을 형통하게 하실 분으로만 믿으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의사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는 분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질문할 테니 대답해 보세요. 예수님이 중풍 병자, 나병 환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병에 걸려 죽었을까요? 혹은 예수님이 고쳐 주셨으니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고쳐 주신 사람들도 언젠가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 주시지만 언젠가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때가 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할 것은 계속해서 건강하고 계속해서 형통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약속하신 천국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이유, 우리가 살기가 힘든 이유,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해서 억울하고 속상하고 가족끼리, 친구끼리 관계가 나빠지는 이유는 모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용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할 것은 첫째,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죄가 없고 병이 없고 죽음이 없고 눈물이 없는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예수님을 우리 죄를 사하시며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모시고 이 땅에서 주의 은혜를 누리다가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https://youtu.be/HlOIFpZ5m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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