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물을 사랑해준 여인들
원귀옥
당신의 눈물을 사랑해준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지요? 라고 물어 온다면 과연 누가 생각이 날까?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살아오면서 유난히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살아왔기에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그러나 제일 먼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셔서 목숨과 나를 바꿔주신 주님이 생각나겠지요. 그리고 육십 여년 함께여서 좋았던 여인들을 손꼽으면 희생의 삶뿐이셨던 막내딸을 그토록 애지중지 사랑해 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하나 가득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 다음으로 엄마하고 부르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고, 너무 대견해서 눈물이 난다는 금쪽같은 고마운 내 딸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인생의 혹독한 겨울에 나의 아픔까지 사랑해준 정말 고맙고 소중한 두 여인이 있다. 한 분은 삼십 여 년 전 내게 재림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신 이윤수 집사님이시다. 오늘 날 까지 긴 세월 한결같이 영육 간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혈육 같이 보살펴 주시는 나의 믿음의 롤모델이 되어 주시는 분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복음을 전한 고옥순 집사 이다.
지극정성으로 챙겨주시는 이 집사님께 수없이 감동하며 겪어온 아름다운 관계를 곁에서 봐오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사모님은 그렇게 당신을 챙기시는데 당신은 왜 성장로님과 고집사님께 그렇게 못하는 거야?”
“맞아요. 나는 사모님의 흉내도 낼 수 없어요.”
나의 대답처럼 오히려 거꾸로 나는 고집사의 진정어린 배려와 보살핌에 익숙해 있었다. 어렵던 투쟁의 시절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손잡아 일으켜 주는 따뜻한 성도의 경험을 갖게 해준 내 인생에 나침반 같은 소중한 형제다. 어떤 상황을 하소연해도 즉시 믿음의 사람다운 통쾌한 처방전을 내주고 해결 방안까지 교통정리를 해주는 형제가 너무 든든하고 의지가 되어왔다. 또한 고집사의 그러한 지혜와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항상 부러웠다.
수년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가족이 엄청난 폭설 속에 예천으로 찾아와 택시를 타고 안일 약국을 데려다 달라고 할 때 그 운전사가 하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안일 약국요 그분은 예수님이예요.”
어떻게 살고 있었기에 이웃의 눈에 그렇게 비춰졌을까?
놀란 가슴은 남에게 내 자식 칭찬을 듣는 엄마처럼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맺었을 때도 느낄 수 있었던 큰 감사였다.
한분은 충청도에 그리고 경상도에 나는 경기도에 각자 떨어져 있지만 서로 오매불망 그리워하면서 기도로 교통하며 살고 있다.
“형제가 서로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기심을 떠난 마음의 동거와 형제 사랑이 행복해서 시편 기자의 간증이 생각난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마치 내일처럼 함께 기도해 주고 동고동락해 주던 그 위로와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내게 믿음의 향기 가득한 언제나 본이 되어준 거울 같은 두 여인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 아! 나는 행복자로다.
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한 평생을 선행과 구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보여준 아름다운 삶을 살아오신 이윤수 집사님을 도르가 여인 같이 보아왔다. 그런가 하면 고옥순 집사는 이스라엘의 어미의 심정으로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꽃피운 여성의 지도력을 대표한 용기의 여인 여선지자 드보라를 떠올리곤 한다.
이 집사님은 금년 오월의 어느 안식일에 아산교회로 찾아뵙고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 성치 않은 다리로 삼십 여분을 큰길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서게시다가 기뻐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지루한 여름이 문을 닫으려는 매미가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8월 마지막 주에 고집사를 만나러 갔다.
“언니 우리 집 지금 백합이 만발해서 향기가 온 집에 가득해요”. 전화로 그 말을 듣자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워 마음이 설레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끼리 가능성을 열어놓고 약속을 했다. 나는 그 집사님 정원의 꽃향기보다 그의 가정에 믿음의 꽃이 활짝 피어난 대견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 보고 싶어 졌다. 이십년 동안 그녀와 가족이 섬겨왔던 예천교회에서 행복이 넘치는 안식일을 재림문인협회 가족들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니 예천교회의 교우들과 믿음의 충전을 듬뿍 받을 날이 어찌나 기다려지는지 달력에 표시해놓고 칠월의 장마와 폭염도 수월하게 견디면서 팔월을 맞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나의 눈물까지 사랑해준 고맙고 그리운 형제들과 함께 비록 몸은 떨어져있지만 각자 주의 포도원에서 충성된 일꾼으로 봉사하다가 하늘 진주문을 통과해서 얼싸 않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까지 서로 기도의 끈을 이어가며 사랑의 줄을 엮어 갈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역사해 주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드린다.
<수필> 어머니의 가뭄
원귀옥
73년 전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 춘천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날 오빠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깡통에 담아 가지고 신나서 집으로 들어 왔고 어머니는 진통을 시작 하셨다고 한다.
훗날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 저를 낳으시고 핏덩이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히셨다고 하셨다.
그 까닭은 38세 노산으로 이다음에 막내딸이 장성해서 시집을 갈 때 쯤 엔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올케 손에 출가 시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때 어머니의 산바라지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둘째 언니가 해 드렸다고 한다.
그러니 따뜻한 미역국인들 제대로 드셨을까?
피난시절 방공호 속에 숨어 살 때 홍역을 앓던 딸을 안고 약하나 써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시다가 결국 숨을 멈추어 통곡을 하며 사과 궤짝 하나 주워다 거기에 누이고 우시다보면 또 깨어나 색색 숨을 쉬곤 하기를 수차례 할 때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애간장이 타들어 가셨을까
어머님의 가슴에 말라비틀어진 가뭄이 계속된 것은 6.25 사변이 나고 충청도로 피난을 가서 8남매 자식들의 끼니를 걱정하기 시작하셨을 때도 계속 되었던 것 같다.
장마철이 되어 비가 초가지붕 처마 밑에 온 종일 주룩주룩 내릴 때도 어머니의 가슴은 쩍쩍 갈라지는 가뭄 때의 논, 밭처럼 타들어 가셨다.
쑥을 뜯어야 밀가루 한줌 넣고 치대서 느루 가라고 감자 몇 개 솥 한 켠에 넣고 개떡을 쪄서 온 식구가 저녁 끼니를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가뭄은 겨울에도 계속 되었다.
보리쌀을 자배기에 담고 동그란 돌멩이를 넣어 땟겨서 쌀 한줌 넣어 밥을 지은 다음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언니 도시락에 쌀이 조금 보이는 밥을 퍼주고, 쌀은 거의 볼 수없는 꽁보리밥을 지어서 아침에 식구들 밥을 푸고 난 후 누룽지를 내 어린 주먹만큼 긁어서 뭉쳐 주셨다. 그다음 솥에 물을 부어 숭늉을 한 대접 퍼서 마시는 게 어머니의 아침이었다. 30리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니는 큰아들에게는 점심 대신 고구마를 쪄서 싸주면 오빠는 학교 파하고 올 때 너무 배고픈 걸 면하려고 아침에 다 가지고 가면 한꺼번에 다 먹어 버릴까봐 고구마를 학교 가는 길목 나무 밑에 숨겨 놓고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을 걸어 올 때 한 개씩 찾아 먹고 오곤 했다. 나름대로 오빠의 지혜였다.
그리고 막내인 나는 몸이 유난히 허약하여 여름 마다 하루거리를 앓느냐고 고열이 며칠씩 계속되는가 하면 늑막염을 앓아 들쳐 없고 언덕을 단번에 넘어 보건소로 데리고 가곤 하셨다.
나의 바로 위의 언니는 학질에 걸려서 심히 앓을 때 이웃에서 양귀비를 닳여 먹이면 좋다고 하자 양귀비를 준 것이 독해서 그 길로 깨어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엄마 등에서 죽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으로 자식을 잃었을 때 오죽하셨을까?
돌아가시는 날까지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가셨겠지
그러고도 두 딸을 앞세워 잃으셨다.
어머니는 그 모든 일이 어머님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가슴을 치며
비가 오나 눈이오나 동저고리 바람으로 새벽 마다 그먼 교회로 달려 가셔서 찬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 마를 날 없이 자식들을 위한 기도로 한 평생을 사셨다.
아! 불쌍한 우리 어머니 노년에 중풍으로 오랜 세월 몸져누워 계실 때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이 얼마나 보고 싶고 기다려지셨을까?
생각할수록 그 불효가 절절히 가슴 아파 온다.
설날이 되면 더욱 일평생 혹독한 가뭄처럼 애간장을 태우고 사셨던 엄마 생각이 나서
시를 써서 먼 이국땅에 잠들어 계신 어머니께 띄워 보냈다.
설 날
원 귀 옥
까치만 울어도 설레며
세월은 외로움의 집을 짓고
동구 밖 어둠 몰려 왔건만
혹시 막내딸 오는 소리 일까
문풍지 바람소리에 귀 기우리시다
기다리다 지쳐 눈시울 붉히시던 병상에서
할미꽃이 된 어머니가 아프게 그리운 오늘은 설날입니다
걷지 않은 눈길을 동저고리 바람으로
미명을 열고 정성으로 쌓은 기도의 제단에
또 자식들의 한해를 눈물로 아뢰든 나의 어머니
청솔가지 하얀 눈꽃 덮어쓰고 이슬에 목축 이는 숲들 사이로
눈사람 되어 사립문 열고 웃으시며 들어오시던
고우신 어머니가 서럽게 그리운 오늘은 설날입니다.
바보처럼 왜 그랬을까?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아린 가슴이
세월의 흔적 찾아 먼 하늘 바라보며 용서를 비는
이제는 머언 이국땅 장미의 언덕에 잠드신
쓸쓸한 돌비에 꽃 한 송이 드리지 못하고
정성으로 끓여주시던 떡국 못 잊으며
사랑하는 어머니를 가슴으로 그리워하는 오늘은 설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