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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12코스
쉬미항-청룡어촌마을-나리방조제-나리마을-건배산-죽전마을-우수영관광지
20220927
1.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 나리방조제, 건배산 범바위·건배바위, 울돌목
서해랑길 5코스 때 해남에서 진도로 들어와 서해랑길 12코스에서 진도와 작별하고 해남으로 넘어간다. 서해랑길 12코스는 대략 이렇다. 진도읍 산월리 쉬미항에서 진도 북동쪽 해안을 걸어나가다가 3.5km의 긴 나리방조제를 건너 건배산 능선으로 올라 범바위와 건배바위를 거쳐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죽전마을로 내려온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중 가장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13척의 판옥선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울돌목 진도대교를 건너 5코스 때 걸어왔던 해남 우수영관광지에서 서해랑길 12코스를 끝낸다.
쉬미항 방파제 공사 중인 곳을 지나면 진도낙원해안로에 '눈부신 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 조형 문구가 붙어 있다. 11코스에서 걸었던 진도낙원해안로에는 '그림 같은 동산 위의 푸른 빛 낙원길' 조형 문구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곳의 문구는 변형을 주었다. 진도 북쪽 해안로와 남쪽 해안로가 '동산 위의 푸른 빛 낙원길'과 '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이라는 길 이름으로 대구(對句)를 이룬다. 해파랑길 강릉 괘방산 구간은 '산 우에 바닷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진도 서해랑길은 동산과 바다로 대구를 이루어 이름을 지었다. 변화와 조화의 길 이름으로 표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채 '푸른'에 변화를 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눈부신 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은 길바닥에 '푸른 빛 낙원길 놀다 가시개!'라는 동판이 붙어 있고, 길가에는 '파도를 지켜보며 함께 흘러가보자',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해' 등의 문구와 '우리 지금 행복 여행 중', '우리 여기 오길 참 잘했다' 등의 조형물 문구가 설치되어 있다. 쉼터정자 옆 전망 좋은 곳에 '바람이 머무는 곳' 등대와 종소리 울리는 집 그리고 바람개비가 예쁘게 조형화되어 있다. 그 옆에서 북쪽으로 서해 바다의 여러 섬들을 가늠하며 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섬 이름을 불러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형물은 긴 벤치 모형의 조형물이었다. 진돗개 강아지가 멍멍 짖으며 노니는 모습의 조형물이 붙어있는 파란 색 벤치가 색감과 강아지, 의성어 '멍멍' 등 모두가 좋았다. 그런데 문구 '푸른 빛 진도'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푸른 빛 낙원 길이나 푸른 빛 진도에서 푸름은 초록빛을 나타낸다. 바다색이나 하늘색은 푸른 빛이 아니라 파란 빛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동산의 푸른 빛과 바다의 파란 빛이 적확하고 상상을 자아내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구간에서 나리방조제 걷기가 힘들었다. 11구간에서 안치방조제는 내려만 보았으며 대흥포방조제와 소포방조제는 방조제 길을 걸었다. 이번 구간에서도 나리2방조제는 바라만 보았고, 나리방조제 3.5km를 걸었다. 나리방조제 덕분에 거대한 담수호인 군내호가 조성되었으며, 군내호 주변에는 넓은 습지와 여러 수로가 형성되어 철새 서식지가 되었다. 그래서 고니류 새들이 월동하기 위해 서남해안의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군내호 주변에는 철새관찰대가 설치되어 있다.
망치산 자락의 아담한 어촌마을인 청룡마을의 평화로움, 망치산 자락길의 진분홍 여뀌꽃 군락지의 아름다움, 서해 바다에 떠있는 섬들 희어도와 굴도, 송도를 바라보며 해안에 자리한 전두1리마을의 단정함, 코스모스 여러 빛깔이 춤추는 군내호 남쪽 둑방 꽃밭길의 화려함, 백조호수공원의 조형물 '고니의 휴식'이 주는 사랑의 마음, 황금 이삭 물결이 출렁이는 들녘길의 풍요로움에 가슴이 얼마나 들떴는가. 그리고 걷기에 길고 지루하지만 나리방조제에서 조망한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해 바다의 여러 섬들, 거대한 담수호인 적막한 군내호, 낮지만 인상적인 금골산의 단단한 바위색과 모습, 멀리 울돌목의 사장교인 진도대교의 흰 주탑, 망금산의 진도타워 등을 나리방조제를 걸으며 조망하고 확인하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그뿐이랴. 힘들었지만 건배산 범바위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층꽃나무 보랏빛 꽃과 진분홍 색을 뿜어내며 반짝이는 수원잔대 꽃 아름다움에의 도취, 범바위와 건배바위에서 걸어온 길을 조망하는 추억과 걸어갈 길을 전망하는 동경, 울돌목에서의 이충무공의 환희와 비애, 이 모든 것들이 그날의 긴 거리의 트레킹의 고통을 씻어준다.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뎈전망대에서 회오리치는 물살을 바라보며 12코스의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교각벽에는 6코스 벽파진에서 감동했던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와 비문 일부 내용을 사진으로 짝어 붙여 놓았다. 비문이 소리친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이충무공승전공원에서 충무공이 울돌목을 향해 호령하고 있다. "후손들이여, 내 사랑하는 조선의 후손들이여! 이후 조선은 어찌되었는가? 울돌목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그대들의 현실은 지금 어떠한가. 조국을 위해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이 이충무공동상 뒤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2.탐방 과정
전체 걸은 거리 : 23.08km
총 소요 시간 : 5시간 38분
왼쪽 해안에 서해랑길 진도12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거리 22.2km, 소요시간 7시간이 적혀 있다. 안내산악회에서는 6시간을 주고, 오후 6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라고 한다.
맞은편은 소포방조제, 2주전 비가 내리는 날 소포방조제를 걸어 쉬미항으로 걸어왔다.
쉬미항-저도-광대도-송도-혈도-주지도-양덕도-방구도-쉬미항으로 운항하며, 요금은 2만5천이다.
가사도 여객선은 팽목항에서 운항하고, 신안군의 송도, 율도, 평사도, 고사도 여객선은 신안군에서 운항하는 듯.
쉬미항 방파제 공사 중인 듯. 서해랑길 12코스는 쉬미해안 북쪽으로 이어간다.
맞은편 중앙은 지산면 소포리 안치방조제, 그 뒤쪽 마을은 안치마을, 맨 왼쪽으로 대흥포방조제가 보인다.
쉬미항 북쪽 소포만 해안길을 따라 서해랑길 12코스 탐방을 본격적으로 탐방한다. 수유리 3.5km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쉬미항 방파제 공사 중인 곳에서 뒤돌아서 쉬미항을 바라본다. 맞은편 정면은 소포방조제, 맨 오른쪽은 대흥포방조제이다.
오른쪽에 안치방조제와 안치마을, 중앙 왼쪽에 대흥포방조제가 소포만 서쪽을 에워싸고 있다.
'눈부신 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 진도낙원해안로'에 '파도를 지켜보며 함께 흘러가보자' 조형 문구가 붙어 있다. 건너편 해안길은 11코스에서 걸었던 길로 '그림 같은 동산 위의 푸른 빛 낙원길 진도낙원해안로'이다.
소포만 입구 건너편에 흰 등대가 서 있다. 왼쪽에 작도도, 오른쪽 끝에 신안군 장산면의 구도, 제율도, 율도가 보인다.
맨 오른쪽에 희어도, 그 왼쪽에 골도, 중앙에 송도, 그 왼쪽에 신안군 장산면의 구도, 제율도, 율도가 가늠된다. 희어도 오른쪽으로 나리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쉼터정자가 있는 곳에서 바다 전망이 좋다.
맨 오른쪽이 구도, 제율도, 율도, 중앙에 작도도와 그 뒤 고사도, 그 오른쪽 뒤는 장산도, 맨 왼쪽은 상태도·하태도 일대인 듯.
'바람이 머무는 곳' 등대와 종소리 울리는 집 그리고 바람개비가 예쁘게 조형화되어 있다. 작도도와 그 뒤 고사도가 보인다.
바다에는 왼쪽에 신안군의 율도, 오른쪽에 진도의 송도, 맞은편은 망치산과 청룡마을. 서해랑길은 진도읍 수유리 청룡마을 위 망치산 자락길을 돌아서 수유리 전두마을로 넘어간다.
진도읍 수유리 청룡마을이 있는 곳은 섬이었었다. 서해랑길은 청룡마을 위쪽 망치산 자락길을 돌아간다.
'눈부신 바다 위의 푸른 빛 낙원길' 진도낙원해안로에 당종려나무를 가로수로 조성하였다.
뒤쪽에 망치산과 진도읍 북서쪽 수유리 청룡마을이 있다 서해랑길은 청룡마을 위 망치산 자락길을 왼쪽으로 돌아간다.
청룡마을 남쪽에 진도읍 수유리 수유마을이 자리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수유마을 방조제길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작도도, 맨 왼쪽에 상·중·하 방구도, 그 오른쪽에 혈도와 광대도, 중앙 뒤쪽은 신안군 상태도·하태도인 듯.
수령 200년 해송 5그루가 있었으나 고사하고 남은 소나무들이 쉼터정자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파밭에서 풍겨오는 파 향기가 나른해진 정신을 곧추세워 주었다.
건너편 산은 연대산인 듯. 연대산 뒤쪽으로 부주산이 있는 듯.
수유리(水流里)는 바굼섬이라고도 불리다가 1789년에는 수유미(水流尾)라 했으며 천유리(川游里), 지소동(紙所洞) 등의 동네가 있었다. 1895년 진도군 군이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전두리(箭頭里)를 병합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진도읍에 편입되었다. 국영 목장이었던 부주산 북쪽 갯가에 위치하고 있다. 1970년대 간척 전에는 간재미 주산지였으며 천연기념물 백조도래지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 오른쪽에 작도도가 기준이 된다. 맨 오른쪽에 고사도, 맨 왼쪽에 저도, 그 왼쪽 뒤로 양덕도(발가락섬)와 주지도(손가락섬)가 흐릿하게 보인다. 그 오른쪽에 상·중·하 방구도, 그 오른쪽에 혈도와 광대도, 중앙 뒤는 신안군 상태도·하태도인 듯.
청룜마을이 망치산 아래 해안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청룡안방파제와 뒤에 작도도가 보인다.
밭에서는 두 여인이 무엇인가를 파종하는 듯. 바다에는 왼쪽에 작도도와 그 오른쪽에 고사도, 맨 오른쪽은 율도, 그 왼쪽 뒤는 장산도인 듯. 바다에는 전복양식 설치물이 떠있다.
망치산자락길을 돌아서 수유리 전두1리 마을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앞의 들판을 돌아서 나리방조제로 나간다.
앞의 산 너머는 전두2리마을, 산 너머로 나리방조제가 살짝 보인다. 서해랑길은 앞의 산 오른쪽 아래의 들녘을 돌아서 나리방조제로 이어지는데, 단축하고자 하면 앞의 산 왼쪽 도로를 따라 나리방조제로 나가면 된다.
파밭이 펼쳐져 있고, 바다에는 희어도와 굴도가 중앙에 보인다.
전두1리마을 앞으로 지방도 803호선 서부해안로가 지나고 있다. 서해랑길은 서부해안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녘으로 나간다. 단축하고자 하면 서부해안로를 왼쪽으로 따라가면 곧바로 나리방조제로 이어진다.
전두1리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서해랑길은 도로를 건너 들녘으로 나간다. 단축하고자 하면 전두2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뒤 망치산자락길을 내려와 전두1리마을 앞 서부해안로에서 들녘으로 나왔다. 태극기가 게양된 전두1리회관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진도읍 수유리 간척농지를 빙 돌아서 나리방조제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바로 앞 이정목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군내호 둑방으로 나간다. 단축하고자 하면 곧바로 직진하여 나리방조제로 나가면 된다.
수유리 간척농지를 빙 돌아서 오른쪽 군내호 둑방길을 따라 정면 중앙의 나리방조제 남단의 백조호수공원 앞으로 나간다.
나리방조제 군내호 남쪽 둑방에 꽃밭을 조성하여 금계국과 코스모스를 심어 놓았다. 코스모스 꽃이 피어 장관이다.
드넓은 잔디밭에 럭비장이 조성되어 있다.
고니들이 진도군 군내면 해안 일대와 다도해 해안에서 12월과 2월 사이에 월동한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고니는 한국 남해안 지역에서 월동하는 고니류 집단의 일부에 불과하나 진도의 고니류도래지는 우리나라 서남해 해상에서 고니 집단이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한다. 고니는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고니를 기념하는 조형물 '백조의 휴식' 고니 한 쌍이 사랑스럽다.
서해랑길은 지방도 803호선 서부해안로에서 방조제로 올라가 이어간다.
오른쪽 뒤에 진도대교 흰 주탑, 망금산의 진도타워, 그 오른쪽에 금골산이 암갈색 바위를 빛내고 있다.
금골산은 ‘진도의 금수강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금골산은 뒤쪽에서 보면 평범한 산이다. 그러나 정면과 옆면에서 바라보면, 보는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난다. 아주 큰 사람의 얼굴 모습, 커다란 짐승을 연상시키는 모양 등 다양하다. 금골산 정면에는 크고 작은 석굴(타포니)들을 비롯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들이, 그것도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르게 뚫어져 있다. 특히 산 정상 부근과 중간 부근에 파여 있는 커다란 석굴 3개는 산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그 가운데 산 정상 부근 석굴에는 좌우 3.5m 크기의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있다. 이 좌상은 1470년경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도군에서 최근 행하고 있는 간척사업으로는 군내지구와 보전지구 간척지 개발사업이 있다. 그 중 군내지구의 나리방조제는 진도 간척사상 소포 간척 다음으로 규모가 큰 사업장이다. 나리방조제에는 이미 건설된 나리2방조제와 군내지구에 현재 건설 중인 나리방조제가 있다. 1878년 준공된 나리2방조제는 간척 면적 30㏊, 몽리 면적 29㏊, 방조제 길이 230m로, 군내면 나리의 가는목마을과 건너편 만입부 사이에 축조되었다. 군내지구방조제는 군내면 나리에서 진도읍 전두리 사이에 건설 중인 방조제이다. 199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2008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총사업비는 1095억 7200만원이 투입되었다. 나리2방조제는 군내면 나리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다. 803번 지방도에서 갈라진 가는목길이 나리2방조제로 이어진다. 군내지구의 나리방조제는 나리2방조제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803번 지방도가 방조제를 통과한다. 나리방조제 안의 간척 면적은 900㏊이며, 그 중 464㏊가 개발되었다. 나머지 436㏊에 군내호(郡內湖)를 수원공으로 하여 새로 만든 논 464㏊와 배후 논·밭 640㏊ 등 1,104㏊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나리방조제의 길이는 총 3.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부터 희어도와 굴도, 송도가 중앙에 누워 있다.
오른쪽에 송도, 왼쪽에 희어도, 골도는 희어도 뒤에 숨어 있다. 중앙에 작도도, 그 왼쪽 뒤에 양덕도와 주지도가 가늠된다.
왼쪽부터 희어도와 송도, 그 오른쪽에 구도, 제율도, 율도, 족도인 듯. 그 뒤에 장산도가 희미하다.
중앙에 가는목마을이 보이는데 그 앞에 320m 길이의 나리2방조제가 있다고 한다.
왼쪽부터 희어도, 골도, 송도, 고사도, 구도, 제율도, 율도 등의 섬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왼쪽은 군내호의 담수, 오른쪽은 서해 바다, 정면 중앙에 보이는 산이 진도읍 수역리(壽域里)의 부주산, 바다에는 오른쪽에 상·중·하 방구산, 그 오른쪽에 양덕도(발가락섬)가 흐릿하지만 분명히 확인된다.
1445년 진도에 국영 목장을 신설할 때 이곳 수역리 부주산(浮舟山)[富支山, 富之山]에서는 덕병, 지산면과 함께 3대 목장의 하나로 말 300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중종 33년(1533년) 이곳 말은 지산목장으로 옮겼고, 그 일대를 개간하여 10결(結)의 국둔전(國屯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 일대에는 수역, 북치, 매향, 월평, 신흥 등의 마을이 생겼다. 1789년의 기록에는 이 지역에 매화동(梅花洞), 수억리(水億里), 북치(北峙) 등의 지명이 등장한다. 수역리(壽域里)는 1973년까지 군내면에 속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바로 앞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서부해안로와 헤어져 왼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 나리마을로 향한다.
진도군 군내면 나리(羅里) 나리마을을 통과하여 맞은편에 보이는 건배산 등산로 입구로 이어간다.
나리(羅里)는 진도군 군내면에 속하는 법정리이자 행정리로, 마을의 입향조는 나씨와 이씨이다. 본래 군일면의 지역으로서 나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범바우, 신기를 병합하여 나리라 하여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동쪽의 건배산[118m]이 있을 뿐 대체로 주변 지역이 낮게 형성되어 있다. 마을 뒤에 있는 나리저수지의 물로 논농사를 경작한다. 또한 마을 앞은 바다를 막은 방조제에 의해 넓은 호수로 변하여 군내호를 이루며,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로 되어 있다. 군내면의 북서부 해안가에 있으며, 동쪽은 녹진리, 서쪽은 바다, 남쪽은 한의리, 북쪽은 신기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교통은 마을 앞으로 지나는 803번 도로가 있으며, 이 도로는 녹진리에서 18번 국도와 만나 면소재지와도 쉽게 연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금물결의 벼이삭들이 출렁인다. 농로를 따라가다가 다시 만나는 서부해안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들녘으로 넘어간다.
헤어졌던 지방도 803호선 서부해안로와 재회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들녘으로 넘어간다.
나리 들녘을 돌아서 왼쪽에 보이는 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건배산 등산로 입구, 오른쪽 건배산의 범바위로 이어간다.
중앙의 언덕을 넘어 나리마을을 통과하여 들녘으로 나온 뒤, 서부해안로를 가로질러 이쪽 들녘을 둘러서 이곳으로 왔다.
군내면 나리 가늠목선착장이 아래에 보인다. 나리2방조제가 저곳에 있을 것이다. 바다의 섬은 왼쪽에 율도, 중앙에 족도, 그 오른쪽은 장산도일 것이라 추정한다.
뒤에 범바위가 보인다. 나라0.5km, 범바위0.45km라고 이정목 날개에 적혀 있다.
옛날에 나리마을에 나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바닷가 외딴집에 백구 한 마리와 외롭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어미를 닮아 복스럽게 생긴 강아지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산고 끝에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게 되자 할머니는 온 정성을 다했다. 어느날 마을 뒷산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밤마다 강아지를 잡아가지만 어미개는 속수무책이었다. 강아지를 모두 잡아먹은 호랑이는 할머니를 잡아먹으려 하자 어미개는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를 유인해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를 어쩔까? 어미개 앞에는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것 같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벼랑 끝에 밀린 어미개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개를 삼켜버릴 듯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몸을 숨기고 공포에 떨고 있던 할머니는 개의 울부짖음을 듣고 겨우 목만 내밀어 바라보았다. 벼랑 끝에 있는 개를 향해 호랑이가 달려드는 모습을 본 할머니는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개를 그냥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하늘의 신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지 호랑이는 서해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모습으로 그대로 돌이 되고 개도 바닷가에서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이곳 범바위에는 범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턱바위, 똥바위, 호랑이 항문의 모습이 그대로 있다.
호랑이 모양처럼 보일까? 범바위 전설 속 호랑이는 못된 호랑이로 묘사되어 있다. 범바위로 올라가 조망한다.
군내호와 나리방조제, 바다 오른쪽에 희어도와 굴도가 보인다. 아래는 나리구지 들녘으로, 큰골, 가는목, 언건네, 웃골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웃골까지 들어왔는데 고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소장골에서 가늠목으로 갯막이 그물을 설치하여 잡은 물고기를 소달구지로 밤새 실어 날랐다고 하며, 갯벌에 고기 비늘이 쌓여 이 갯벌을 비늘등이라고 했다고 한다.
걸어온 범바위둘레길이 앞에 있다. 바다의 왼쪽에 희어도와 골도, 송도, 오른쪽에 율도가 조망된다.
아래는 신기마을, 바다 왼쪽에 족도, 그 오른쪽 뒤에 장산도, 중앙에 마진도, 신기항 방파제 앞 작은 섬은 수서도인 듯.
북쪽으로 벋은 해남군 화원반도 서쪽에 임하도가 누워 있다. 오른쪽 건너편 작은 섬은 항도이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들녘이 나리구지로 큰골, 가는목, 언건네, 웃골이 있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웃골까지 들어왔는데 고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소장골에서 가늠목으로 갯막이 그물을 설치하여 잡은 물고기를 소달구지로 밤새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갯벌에 고기 비늘이 쌓여 있어서 이 갯벌을 비늘등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 진도에는 간척사업으로 농사를 짓지만, 만약에 자연 그대로 보전했다면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 뒤지지 않게 어족이 풍부한 어촌으로 부를 누리면서 살고 복받은 섬으로 남았을 것이다.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며 살아야 하는데, 일시적 안목으로 후대에 남겨줄 유산을 잃어버렸다. 지금이라도 자연환경을 보호하여 사람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산림을 사랑하고 보호하자.
건너편은 해남군 문내면 해안. 바로 아래는 공사 중인 진도 군내 일반산업단지인 듯.
중앙에 우뚝한 건배산 범바위가 보인다.
범바위1.1km, 건배바위0.8km, 나리1.3km. 이정목에 범바위둘레길 맷돌바위라고 적혀 있다. 맷돌바위가 어디에 있을까?
왼쪽에 나리방조제, 앞산 뒤 왼쪽에 희어도, 그 오른쪽에 송도, 오른쪽 뒤에 고사도, 그 앞 오른쪽에 족도가 가늠된다.
나리방조제와 군내호, 중앙에 부주산이 확인된다.
중앙 앞에 나즈막하게 둥근 산이 금골산인 듯. 그 뒤쪽 방향으로 맨 뒤에 첨찰산과 하얀 빛깔의 진도기상대가 보인다.
왼쪽 건너편에 양도 섬과 그 뒤 전라우수영마을, 중앙에 진도대교, 그 오른쪽에 망금산의 진도타워가 한눈에 조망된다. 왼쪽 해안에 진도 군내농공단지가 조성되고 있고, 바로 아래는 죽전마을. 서해랑길은 죽전마을을 거쳐 지방도 803번 군내산단로로 나가 군내산단로를 따라가다가 이충무공승전공원을 거쳐 제2진도대교를 건너 해남 우수영관광지로 이어진다.
진도 해안에 군내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고, 바다 왼쪽 위에 임하도, 건너편의 해남 화원반도가 북쪽으로 벋어간다.
건배바위에서 죽전마을로 내려간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죽전마을이 건배산 동남쪽 아래에 있다. 중앙 뒤에 진도대교 흰 주탑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죽전마을을 거쳐 공성구지길을 따라가다가 앞에 보이는 군내산단로로로 나가 진도대교로 이어진다.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며 마을 김장배추밭에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있다. 평화롭다.
죽전(竹田)마을은 본래 진도군 군일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지형이 사슴의 뿔처럼 생겼다 해서 녹진(鹿津)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죽전리, 대사리, 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녹진리라 불리면서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울돌목, 망금산, 노적봉 등의 고적이 있어서 유명하다.
죽전마을에는 1400년대 말 능성 구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 후에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무안 박씨, 원주 이씨 등의 다양한 씨족들이 모여 살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밀양 박씨의 선산이 있는 곳이지만, 마을에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꽤 이른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전마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살 때는 120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78호가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과 월동배추, 대파이다. 현재 주요 성씨는 무안 박씨, 원주 이씨, 문의 박씨 등이다. 마을 공동재산으로 마을회관과 마을 공동창고, 저수지 1, 2, 3호가 있다. 마을조직으로는 55세 미만의 사람으로 구성된, 회원 30여 명의 청년회, 마을의 전 부녀자가 참여하는 부녀회, 65세 이상의 노인 약 70여 명으로 구성된 노인회,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상두계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에 금골산이 솟아 있다. 금골산 아래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보물 제529호 금골사5층석탑이 있다. 10여 년 전에 금골사5층석탑을 답사한 적이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있는 금골산은 해발 193m에 불과하지만,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은 기이한 산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일일이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관직을 빼앗기고 진도에 유배되어 온 이주(李胄)는 금골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금골산록」이라는 글에서 금골산에 대해 기록했는데, 서거정의 『동문선』에 실려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금골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없으나 쇠 금(金)자에 뼈 골(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전체가 철분함량이 높은 화산암과 누런 금빛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고, 뼈처럼 골격미가 드러나 있는 산지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산 아래 위치한 초등학교 교정에는 금골산 5층석탑(보물 제529호)이 있다. 이 탑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을 모방한 백제 양식을 채택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판단돼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골산 5층탑은 해언사탑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 탑이 서있는 곳에 해언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외 금골산 동쪽에 사리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군내면 녹진리 공성구지마을과 죽전마을을 잇는 공성구지길을 따라가다가 지방도 803번 군내산단로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이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충무공승전공원 방향으로 꺾어간다.
녹진리와 금골리로 갈라지는 녹진교차로를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 이충무공전승공원으로 들어간다.
앞에 골든비치모텔이 보인다. 저곳에서 2박하며 서해랑길 진도코스를 탐방했다.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진다.
서해랑길은 이충무공승전공원의 이충무공동상 앞을 거쳐 뎈길을 따라 울돌목주말장터 방향으로 이어진다.
뎈길을 따라 거북선 용머리 모형물 앞을 거쳐 울돌목주말장터, 울돌목판옥선, 전망뎈, 제2진도대교로 나간다.
이충무공승전공원 충무공동상 아래 뎈벽면을 따라 십경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인데, 이들 십경도는 아산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기자협회에서 기증하였다고 한다.
울돌목주말장터 앞에 판옥선을 재현해 놓았다. 판옥선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갑판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울돌목과 진도대교, 건너편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해남 우수영관광지이다. 울돌목의 물살이 울면서 거세계 흘러간다.
울돌목(鳴梁海峽)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있는 해협이다. 길이 약 1.5km이며, 폭이 가장 짧은 곳은 약 300m 정도가 된다. 밀물 때에는 넓은 서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서해로 빠져 나가 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이를 이용하여 정유재란 당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였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 불린다. 유속은 약 10노트(10knot, 시속 20km 정도)라고 한다. -위키백과
1984년 완공된 명량을 가로지르는 길이 484m, 너비 11.7m의 진도대교가 건설되어 진도와 해남군이 연결되어 있다. 2005년 12월 15일 제2진도대교가 개통되었다. 진도대교는 한국 최초의 사장교(斜張橋)로 길이 484m, 너비 11.7m, 해면에서 상판까지의 높이 20m, 주탑의 높이 96m로 건설된 쌍둥이 다리이며,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여 건설하였다. 울돌목은 11노트(초속 6m)의 빠른 조수가 흐르기 때문에 물속에 교각을 세우기 힘들어 해안 양쪽에 높이 69m의 철탑을 세우고 68개의 강철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 형식을 취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교각 기둥에 벽파진전첩비 사진과 비문 내용 일부를 적은 사진이 붙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조선 전선(판옥선)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대첩 해전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다리 출입구 한쪽에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 다른 쪽에는 거북선 모형을 세워 놓았다.
서쪽으로 해가 기을고 있다. 이충무공승전공원의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을 호령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화원반도가 북쪽으로 뻗어 있고, 바다 위쪽에 임하도와 멀리 신안군의 장산도가 가늠된다.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서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로 넘어간다. 서해랑길 5코스에서 제1진도대교를 건너 진도로 넘어갔으며, 12코스에서는 제2진도대교를 건너 해남으로 넘어간다.
오른쪽 건너편에 망금산의 진도타워, 바다 위에 울돌목 해상케이블카, 판옥선 뒤에 울돌목스카이워크가 보인다.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전승 명량대첩을 기리고자 개설된 울돌목 스카이워크는 2020년 착공하여 2021년 7월 준공하였다고 한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 위를 거닐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고 하지만 그냘 통과한다.
영화 '명량'에서 회오리바다 울돌목을 촬영한 것을 기념하여 '명량정'을 세운 것 같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조선수군의 전력은 대략 군함 300여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근…' 그 수군이 1597년 7월 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왜군의 수륙 합동작전 앞에 무력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는 교서 하나만 들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명량해전(울돌목 싸움)은 이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인원이 적었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왜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왜 함선이 명량해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되었다. 왜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수로의 평균 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 수심은 1.9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왜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 왔다. 왜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이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 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이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왜군은 이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왜군 배의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선 선두함이 걸렸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연달은 추돌현상으로 왜군 함선들은 급속도로 진형이 무너져갔다. 혼란에 빠진 왜 군함을 향해 일제 공격이 벌어졌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이 발사됐다. 머리통만 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이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이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왜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쪽으로 기울었다. 왜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 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순신이 왜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17차례, 그는 이들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17전 17승을 거둔 것이다. 이들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이겨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이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망금산에 진도타워와 해상케이블카, 오른쪽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해남 해안에 스카이워크와 판옥선 모형물이 있다.
명량대첩 축제가 2022년 9월 30일~10월 2일까지 진도군 녹진관광지와 해남군 우수영관광지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는 축제의 꽃 명량해전 재현 행사가 없다고 한다. 축제를 위해 수문장 교대식을 연습하고 있다.
강강술래 기념비 광장 앞에 있는데, 명량대첩 축제를 위해 설치된 점포들이 안내도를 가로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