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村의 詩 0007>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세나.
시비(柴扉)를 여지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랴.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2020년 1월 올 해는 겨울 같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음력 설날이 양력 정월에 들어있다. 그리고 更子년이니 이 시조가 인목 대비 폐위 사건인 癸丑년 1613년(광해군 5) 옥사로 고향인 춘천에 유배되었을 때 작품이라면 대략 400년 전 춘천이 그 배경이다.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 지게나 지고 겨우 오를 돌계단 길에 사립문은 닫혀있다. 짧은 겨울해가 기울고 노을이 지고 이윽고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하늘에 달이 떠오른다.
달은 춥다... 추운 만큼 씻은 듯이 맑고 밝다.
그리고 보름 동안 부풀고 보름 동안 이지러진다... 그것이 작가에게 보내는 달의 유일한 표정이다...
어떤가?! 400년 뒤나 전이나 그 느낌이 다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편지를 보내면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 외로움이 반은 줄어들지 않을까?!
‘불러도 대답 없는 임...’이거나 ‘편지를 써놓고도 주소를 몰라...’ 안타까운 마음이 象村(申欽)에겐들 없겠는가?!
時調 : 시조는 시가 아닌 시를 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시조는 '단가'라 불린 것이 일반적이었고, '시여'(詩餘)·'신조'(新調)·'신성'(新聲)·'신번'(新飜)·'신곡'(新曲) 이라고도 했다. 또한 18세기 초·중엽의 〈청구영언 靑丘永言〉·〈해동가요 海東歌謠〉에는 '영언'이나 '가요'였으니 가창문학으로서의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소월의 시가 맨 처음 문학잡지에 소개될 때는 ‘시’라는 장르가 아닌 “노래”로 소개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문제는 운율인데, 유목민족의 전투적인 행진곡풍이나 춤곡에 기반을 둔 서양음악에 익어버린 고막에서 시조 창이 울려퍼지면 무슨 하품하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시조의 가락에 막걸리 한 잔으로 친구들과 정을 나누던 시절이 멀지 않게 있었다... 3-4, 4-4 등등의 음수율은 3장45자내외의 틀을 잡은 세월이 오래이니 흐려져 가는 이 가락을 다시 더듬어보면 어떨지?!
申欽의 별호는 경숙(敬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문정(文貞)으로, 그의 문집은 방대한 『象村集(상촌집)』이 전한다.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628년(인조 6)에 세상을 떠났는데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성균관학유(9품)에서 출발하여 ...,예조판서...영의정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 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 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正宗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임진-정유-계축-정묘년의 난리를 겪었으니 기구한 시절이었으리라...
** 신흠의 글 가운데는 民心(백성의 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요즘 세태에 비해서 어떤지?!
벼슬아치들은 항상 백성을 가리켜...
不曰民心惡則必曰民俗薄.
백성의 마음이 악하다고 하지 않으면 반드시 풍속이 천박하다 한다.
民心固善矣, 民俗固厚矣,
백성의 마음은 진실로 착하고 그 풍속은 참으로 도타운데
人顧不之省也.
그들은 백성들을 되돌아보지도 살피지도 아니 한다.
何以知之? 以宰民者知之.
어찌 그것을 아는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今之宰民者, 非以賄用, 卽權倖之家也
요즘 관리들은 뇌물을 쓰지 않았으면, 곧 권세가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집안이고
非權倖之家, 卽權倖之家之所拔也.
권세가가 아니면 곧 그들에게 줄을 댄 경우이다.
始乎賄者, 常卒乎墨; 始乎權倖者, 常卒乎虐,
뇌물로 시작한 자는 곧 더럽혀저 마치고 권세로 시작한 사람은 바로 탐학으로 마치니...
** 문자의 전승 : 신흠은 조선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이 한글로 쓰인 시조가 그의 육필로 남아있다면 추사(秋史)를 제치고 국보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존재여부는 알 수가 없고 필사된 것이 靑丘永言이나 甁窩歌曲集에 있을 터인데 그 영인이나마 훗날 찾아 여기 보태야겠다.
사진의 시집은 1946년 정음사 출판이니 나와 동갑이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쓰다듬어 본다... 부독본 시리즈(叢書)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정가는 7圓이고 인쇄는 조선정판사로 되어있고, 振替 주소는 京城으로 되어있으니...<*>
1946년 조선시조집
섯가래 기나 저르나...이 또한 신흠의 시조다.
조선정판사 인쇄의 7원짜리 시조집...
시조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