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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관람과 발전하는 중국
2013년 3월 22일(금)~25일(월)간 주말여행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여행사는 하나투어다. 한국의 높으신 양반들은 수십 년 전에 다녀왔고, 방귀께나 뀐다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은지 오래된 여행코스를 이제는 서민인 내가 중국 실상을 신기한 눈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이날 22일이 시진핑 주석이 3월 14일 제14차 전인회에서 중화인민 공화국 주석으로 선출된 후 8일째 되는 날이다. 또한 박근혜대통령이 2012년 12월 19일 당선되고 2013년 2월 27일 취임한지 25일째 되는 날이다.
우리가 북경 수도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 15분, 전기 불 밝지 않은 컴컴한 공항현지외각이 인상적이다. 이광철이라는 조선족 현지가이드 안내를 받아 중국내 하나투어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중간에 스치는 북경의 변방은 고요하고 불빛은 음산했다.
北京東煌凱麗酒店(북경동황개려주점)이라는 호텔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었다. 중국인들의 호텔은 酒店이다. 한국 사람들은 호텔이 여관처럼 잠자리를 연상하지만 중국인들은 한잔 술로 휴식을 달래는 상점으로 생각 하는 듯하다.
3월 23일 토요일 호텔조식 후 오전 7시 출발한 버스는 천안문광장에 도착했다. 북경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장소로 우리도 80년대 천안문 기사로 일간지 1면을 도배한 그 시절이 눈에 선하다. 24년 전 1989년 4월 중국 총서기이자 개혁가인 胡耀邦(호요방)의 죽음의 계기가 되어 시작된 사태로 처음엔 학생 후에는 시민들이 가세하여 확산되자 당시 지도자 등소평은 6월4일 기관총을 난사하고 장갑차를 동원하여 무력 강제 진압시켜 무려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 이곳이 천안문광장이다.
천안문 광장은 3월 중순을 넘어섰지만 현지시간 오전 8시 바람은 싸늘하고 광장은 드넓고 천안문 입구에 사람은 인산인해다. 천안문에 모주석이 걸려있는 사진 좌우로 빨강바탕에 흰 글씨로 좌편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우편에는 ‘세계인민대단결만세’ 라는 글씨가 인상적이고 천안문광장 중앙에 인민영웅기념비에는 ‘人民英雄永垂不朽’(인민영웅영수불후) 라고 세워져있다. 1952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를 국역하면 ‘인민의 영웅들은 영원이 꼿꼿하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다
천안문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인민대회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중국국가박물관이 뒤쪽에는 모택동 기념관이 있다. 가이드는 천안문 기념사진촬영은 오직 기념비 앞에서만 가능하다며 모택동 주석 근접촬영이 금지되어 있음을 알려줬다. 특히 노래, 구호, 깃발올리기 행동은 금기사항이다.
자금성의 주인인 명나라황제 14명 청나라황제 10명 도합 24명의 황제가 409년간 통치하던 9,999개의 방과 999칸의 건물의 위용과 주요관리 3000명의 위압을 느끼며 구중궁궐의 위상이 드높았던 궁궐 자금성이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그 기능은 정지되고 뭍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02년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운명의 분기점인 천안문사태는 24년 되었다. 현재 중국은 세계 제2강대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중국 개혁개방 변증법의 현장 천안문광장은 오늘도 싸늘한 기온에 공안원의 감시에 표정을 가다듬고 천안문입구로 향한다. 자금성의 천안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다. 인산인해라는 단어를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는 천안문입구 외금수다리에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꿀벌처럼 들 끌었다. 각 나라의 남녀노소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새소리 잡소리로 소통을 하고 수수하면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여성들도, 방한복으로 화사하게 멋을 내는 아가씨들도, 한껏 멋을 자랑한다. 각국의 다양성과 광활한 중국의 특성상 입성과 머리털로 아줌마와 아가씨가 구분이 어려울 땐 옆에 따라다니는 남자들의 발걸음을 보면 짐작이 간다. 터벅터벅 걸으면 옆에는 아줌마이고 젊은 남자의 발걸음이 가벼우면 십중팔구 옆에는 아가씨가 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거운 여행지 자금성은 여의도 3배 크기로 궁내에는 자객방지 차원에서 나무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건물은 남북 중심선으로 좌우대칭 되게 배치되었고 6개의 전각과 여섯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있다. 천안문-단문-오문-태화문-건청문-퇴출구인 신무문이고 전각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세대전과 동서 양쪽으로 문화전과 무영전이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자금성은 세계인들의 유명관광코스로 중국내에서도 관심거리다.
신해혁명으로 자금성의 기능이 멎고 청황조가 멸망한 과거와 사회주의국가인 현재가 공존하는 북경은 대격변을 치르고 개혁의 빛과 그늘이 엇갈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소득은 노력에 비례하지 않고 자본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듯이 어디를 가나 시장경제가 판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가고 있는 중국은 자본주의만이 살길이라고 믿는 듯하다. 1000원짜리 물건을 목 타게 판매하려는 중국 상인들의 이념은 ‘사고파는 기능은 수급균형을 유도하는 따위의 가치중립적보다 이윤 극대화 투쟁의 최전선 이데올로기다.’ 라고 판단한 것 같다. 이윤은 자본을 부르고 자본은 자본주의를 부른다. 공산주의와 사화주의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가는 중국 변화의 변곡점에는 등소평이 앉아 있었다. 어떤 주의든 인민의 배만 부르면 된다는 등소평의 유지가 살아 숨 쉬는 중국이다. 이 엄청난 모험을 등소평은 성공시켰다. 아직도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 적인 중국이지만 사회주의 간판은 결코 내리지 않을 것 같다. 등소평은 ‘黑猫白猫能到老鼠就是好猫’ 이 한구절로 전 중국을 세계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이 말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라는 말로 등소평의 실용적 사고방식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했다.
이념과 주의에 구속받지 않고 경제발전과 인민의 배부름정도에 따라 정책과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자는 등소평의 경제이론은 이 고양이론에서 착안한 것 같다. 오늘날 중국이 溫飽(등 따시고 배부른 것)의 단계를 지나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형상이 총체적으로 흑묘백묘의 방향은 좋았다. 쥐 잡는 일에 몰두하다보면 고양이의 잘못을 못 볼 수도 있겠다. 단적으로 인민들의 사상적 변화 와 자본의 맛을 들인 부패다. 그래도 금전의 자극으로 사상이 변질된 인민들은 오늘도 중국 관광명소에는 판매호객해위가 마치 대전역 여인숙 앞 호객해위와 다름없다. 또 중국 各省이 경제발전에 올인하는 것도 이 고양이론이 뒷받침하는 자본에 눈 떠있기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금성을 나와 북경胡同의 골목길을 관람했다. 명대와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 골목은 수 백 년을 거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가이드의 안내로 정사각형 옛 가옥을 방문했다. 대지50평에 시세 50억 되는 건물이다. 옛 주인은 許대감이고 지금은 몇 대 許 씨 손자가 주인이다. 조상을 잘 만나 한 달에 우리 돈 700만원 보조를 받으며 허대감 후손으로 희희낙락 하며 산다. 이 골목에서는 대문위에 튀어나온 파란색 6각 단목 숫자에 따라 주인의 지위를 알 수 있고 대문입구 좌우에 새겨진 석주에 따라 무관과 문관의 집안 내력을 구분한다. 허대감 집의 구조는 동편이 주인집이고 좌편집이 아들 서쪽 집은 첩이살고 우편 집은 딸이 거처했다고 한다. 방의 크기는 2평 남짓하고 천정은 2미터 미만인 듯하다. 명대나 청대나 지금이나 집에는 화장실이 없다 한다. 그래서 이 골목에서 특이한 것은 옛날 화장실이다. 공중화장실인데 칸막이가 없다. 누구나 사심 없이 평등하게 거시기를 관람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을 이해심 깊게 터득한 옛사람들이 부럽다. 남녀 공용이라는데 공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옛 사람 선비들은 이미 행여 타고 북망산에 떠났고
그 사람 그 집엔 파란 6각형 각목만이 길손을 바라보고
사모관대 도포자락 귀한 몸 태워주던 당나귀도 돌아오지 않으니
맑은 하늘 흰 구름만 수 천 년을 흘러갔다.
사는 나이 백년도 차지 못하거늘
어찌 천년의 계획을 품고 살았는가.
대문 앞 섬돌에 말을 타던 대감은 북망산에 계시는데
우리 또한 수명을 계산하면 그와 같기 어렵지 않으리니.
이 나이 일 년의 목숨인들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이곳 찾은 관광객들이시여 오늘 즐기지 않는다면
또 어느 때를 예약할건가 즐김은 제 때에 즐겨야하느니
오늘 숙소에 가신다면 좋은 안주에 진한 술 많이들 하소.
첫날 저녁을 때우고 호텔에 들어섰다. 방 번호는 2005호다.
탁자에 앉아 메모지를 꺼내 오늘의 느낌을 메모했다. 커텐을 밀치니 밖은 칠흑 같은 암흑에 가로등이 힘겹게 불을 밝힌다.
부인은 잠들고 TV혼자 놀고 있는 북경의 한밤은 피로를 풀기도 전에 의문이 많다. 고속성장을 낳은 중국의 경제체제다. 심지어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이상주의자이고 등소평은 철저히 현실주의자인데 중국이 자본주의로 가면서 사회주의 간판을 쳐드는 이유다. 14억 인민의 먹거리로는 자본주의가 복지로는 사회주의가 적격인가. 시장경제는 손오공의 여의봉이 아닌데 그 경쟁의 치열함은 세계인들이 터득한 바이고 이제는 시진핑의 小康(샤오캉)사회가 가능할까 小康이란 말은 조선 태종이 시무책에서 언급했고 정도전이 전시책에서 언급한 단어로 공자의 대동사회의 조금아래인 소강사회를 언급함이다. 한마디로 그럭저럭 살만한 세상을 말한다.
모택동은 시인이며 개혁의 이상주의자이고(紅) 등소평은 개방의 현실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이다.(專) 이는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개의 축이다. 중국은 이 두 개의 다리로 걸어야한다는 것이다. 중국신세대인민은 毛도 鄧도 있어야한다는 생각이다(應該有毛有鄧). 중국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다. 한국으로 돈벌러간 중국인들은 속속 중국으로 귀국하고 있다. 한국의 LH가 고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어 길 위에 먼지처럼 날아다니는 것.
흩어져 바람 따라 굴러다니니 이것은 이미 無常한 몸이라
땅위에 태어나면 모두가 형제이니 어찌 반드시 骨肉만을 따지랴
기쁜 일이 생기면 마땅히 즐겨야만 하는 것이니
한 병의 술이라도 받아놓고 아는 사람들을 모은다.
한창때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있기는 어려운 것
때를 놓치지 말고 마땅히 힘써야만 하는 것이니
세월은 사람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陶淵明)
북경관람 잘했습니다.
2013년 3월 29일(금요일)
이 권행 謹感
첫댓글 낙양에 가면 실제로 북망산이 있고 낙양에 도읍을 틀었던 당시 귀족과 왕후장상의 무덤이 즐비하다네....
중국 허난성 야트막한 산이라는데, 명사들 무덤이 많았는데서 유래한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통칭하여 이름하는데 북망산천이라고도 하던데........ 실제 왕후장상의 무덤이 있는줄은 몰랐네. 그곳이 귀족 공동묘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