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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5강 - 1부(2012. 11. 13.)
答 江給事 少明
오늘 간화선 지침서, 그것도 제일 지침서.
간화선창시자인 대혜스님께서 직접지도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간화선으로서는 가장 좋은 교재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고려 때 고려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보조국사께서 서장을 도반으로 생각하고 늘 옆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 후부터 우리나라에 교재로 채택이 돼서 지금까지도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공부한 내용 중에서도 내용별로 간추리면 간화선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량은 충분히 됩니다. 오늘은 다시 약간 정리 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묵조선 불교는 앉아서 只管打坐(지관타좌), 오로지 앉아 있기만 하는, 몸도 마음도 다 앉는 겁니다. 앉아 있기만 하는 그런 불교에서 간화선이 들어와서 일으켜 세우는 불교로, 활동하는 불교로, 생활하는 불교로 전환을 하는 것이 바로 “대혜스님의 간화선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지도를 받는 소위 사대부들도, 출가한 승려로는 한사람도 없고, 일상생활을 하는, 세속에서 생활을 하는 사대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가르치는 내용을 여기다 묶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대혜스님 밑에는 1000명이 넘는 그런 거대 대중을 거느리고 선지식 노릇을 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출가대중을 위한 가르침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내놓을 만한 대표 간화선 지침서로써 사대부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대표 지침서로 이렇게 내놨다고 하는 것이 큰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앉아있는 불교에서 서서 활동하는 불교로, 앉아서 하던 참선에서 생활 속에서의 참선으로, 그래서 생활불교ㆍ생활참선. 그것은 뭔가 하니 생활이 참선이 되게 하는 것도 되지만 생활 속에서 참선이 되도록,
“참선의 정신ㆍ선의 정신에 입각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을 구체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하겠는가 하면 첫 시간에 제가 말씀 드린 선의 여덟 가지 정신. 그 정신에 입각한 생활이면 “그것은 선 생활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사실 순간이고 생활은 영원합니다. 깨달음은 순간이고 생활은 영원합니다. 그 생활이 중요한 겁니다. 깨달음도 생활을 위한 깨달음이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깨달음만 중요시하고 생활을 등한시하다 보니까, 문제가 많이 생기고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정말 경허스님 같은 이가 선불교를 중흥시킨, 아니 한국불교를 중흥시켰다고 할 정도로 공이 큰 분이지만, 그 분의 생활이 불교답지 못 했기 때문에 그 스님의 상수제자 만공스님이지요? 많은 제자가 있습니다.
많은 제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만공스님이 대표이고 상수제자라 하는데, 바로 그 상수제자로부터 경허스님을 어떻게 평을 하는가 하면, 한국불교전서에도 나와 있고 다 공인된 사실입니다.
경허스님을 惡果於虎(악과어호) 좋은 점으로는 부처님을 지나간다.
그랬습니다. 善過於佛. 불교에 끼친 영향중에서 좋은 점으로는 부처님보다도 더하다. 왜냐? 불교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가지고, 그야말로 불교가 유야무야한 그런 상황에서 경허스님 같은 걸출한 스님이 나타나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입장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지나간다.” 그렇게까지 표현하고,
惡果於虎(악과어호)라. 나쁜 영향을 미친 입장으로는 “호랑이 보다 더 지나간다.” 이런 평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평을 하면 큰일 나지요.
상수제자 만공스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궁금하면, ‘저 말이 진짠가 아닌가?’ 싶으면 한국불교 전서에 찾아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자기 바로 밑의 가장 믿을만한 수제자에게 그런 평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禪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면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활에 있다. 한 순간ㆍ한 순간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대혜스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그런 것을 말씀을 드렸고, 처음에 제가(1강-1)
簡素(간소)한 생활 = 간단하고 소박한 생활. 그리고
脫俗(탈속)한 생활. 그리고
自然(자연)스런 그런 생활. 그리고
幽玄(유현)한 생활.
枯高(고고)한 생활.
寂靜(적정)의 생활.
變化(변화)의 생활.
不動(부동)의 생활 = 8풍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비로소 그것은 진정한 선불교이고 선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늘... 근래에 제가 서장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번역도하고 해설도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그래요. 우리가 선을 좋아 하는 것은 사실인데, 참으로 선을 좋아할 자격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선을 좋아할 수 있는가?
최고 지성인, 최고의 이성을 가져야 됩니다. 최고의 감성을 가져야 됩니다. 이런 것이 만약에 보통 사람이하로 된 된다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지성과 그 이성과 그 감성과 이런 것이 타고나기를 그렇지 못하면 이것은 선에, 그저 선이 좋다는 말을 듣고, “선ㆍ선” 하지만, 선하고는 거리가 먼 겁니다. 선은 이것이 아무나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선이라고 하는 그 원칙에 우리가 제대로 부합한 선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제가 보기에ㆍ제가 보기에 그것은 정말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감정과, 물론 어느 시대든지 역사상에 나와 있는 선사들은 다 그랬습니다. 그 시대에서 최고의 지성을 갖춘 분이고, 최고의 인성을 갖춘 분이고, 타고난 인성이 최고의 인성을 가졌어요. 그래야 이 선에 뭔가 접근 할 수 있는 근기가 되겠더라고요. 그렇지 않고는 어디서 선이라는 말을 듣고, “선ㆍ선” 하는 것이지, 선하고는 전혀 사실 거리가 먼 것이지요. 그러한 것을 우리가 스스로 실천은 못하더라도 ‘아~, 선은 이런 것이다. 간화선은 이런 것이다.’ 그런 것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 이것이 일단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오늘 교재는 45쪽 江給事 少明(강급사 소명)에게 답한 내용입니다.
答 江給事 少明
人生一世에 百年光陰이 能有幾許오
公이 白屋起家하야 歷盡淸要하니 此是世間에
第一等受福底人이나 能知慚愧하야 回心向道하야
學出世間脫生死法하니 又是世間에 第一等討便宜底人이라
須是急着手脚하며 冷却面皮하야 不得受人差排고
自家理會本命元辰하야 敎去處分明하면 便是世間出世間에
一箇了事底大丈夫也리라
人生一世(인생일세)에 百年光陰(백년광음)이,
사람이 일생을 사는데 100년을 산다손치더라도
能有幾許(능유기허)오? 얼마나 되겠는가?
100년 세월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돌이켜보면
公(공)이, 강급사 소명이라는 사람은
白屋起家(백옥기가)하야,
가난한 집에서 집을 일으켰습니다. 우선은, 그래서
歷盡淸要(역진청요)하니, 淸要 = 아주 중요한.
淸은 직책 중에서도, 정부 중요 직책 중에서도 거의 이판에 해당되는 그런 직책, 그러면서도 아주 중요한 직책. 이러한 것을 전부 다 맡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직책을 다 거쳤고, 그러니
此是世間(차시세간)에 第一等受福底人(제일등수복저인)이나,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등가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能知慙愧(능지참괴)하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개 세상에서 부귀공명을 누리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써 끝이지요. 세속적으로 성공한 인생치고 발심해서 불교공부를 한다든지, 하는 사람 이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참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없습니다. 태국 같은 데는 가끔 장관출신들이 스님이 된다든지 그런 예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유한 사람이 발심해서 불교공부를 한다든지, 벼슬이 높은 사람이 불교공부를 한다든지 하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라고요?
能知慙愧하야,
스스로 능히 그런 세속적인 성공적인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겨서
回心向道(회심향도)하야, 마음을 돌이켜서 도를 향하고 있어요. 그래서
學出世間脫生死法(학출세간탈생사법)하니,
출세간의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又是世間(우시세간)에 第一等討便宜底人(제일등토편의저인)이라.
그랬습니다. 또 한 번 이 세상에서 제일등가는 便宜를 찾은 사람이다.
정말 討便宜底人이라. 라고 이런 표현을 했지만, “便宜를 찾은 사람이다.” 라고 하는 말은 정말 해탈 감을 누리고자하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아무것도 세속적인 것은 바랄 것이 없고, 다시 또 출세간에 있어서 해탈을 한번 맛보고 싶어 하는, 그래서 최고의 어떤 좋은 삶. 이렇게 표현해도 사실 표현이 부족하지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須是急差手脚(수시급차수각)하며,
모름지기 급히 手脚. 수단을 써서 이런 말입니다. 급히 무슨 방법을 써서,
이것은 “방법” 입니다. 급히 방법을 써서,
冷却面皮(냉각면피)하야,
그야말로 안면을 싹 바꿔가지고, 말하자면 얼굴을 싹 냉정하게 해서
不得受人差排(부득수인차배)하고,
다른 사람이 이러고저러고 차별안배 라고 자주 나오는 말이지요. 지휘하는 것. 세상의 어떤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 출세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어떤 가치관. 자네가 출세간인 인데, 뭘 그렇게 살면 되느냐? 고, 그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느냐? 고 하는 등등의 그런 주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듣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 받아들이지 말고
自家理會本命元辰(자가이회본명원진)하야,
自家 = 자신이 本命元辰을 이해해서, 本命元辰 = 본래면목.
참 생명자리를 잘 깨달아서
敎去處分明(교거처분명)하면,
去處 = 갈 곳으로 하여금, 죽어서 돌아갈 곳. 살아서도 보내고, 사실 자기 본분 생명자리를 모르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요. 去處分明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뒤에 가는 것보다도,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자기의 참 생명자리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거처로 하여금 분명하게 할 것 같으면
便是世間出世間(변시세간출세간)에
一箇了事底大丈夫也(일개요사저대장부야)리라. 그랬습니다.
세상에 있어서나 출세간에 있어서나 하나의 일 마친 대장부다.
정말 일을 제대로 마친 了事底大丈夫다.
이것이 다 선장에서 잘 쓰는 말이지요. 또 어떤 때는 부처님이나 조사님을 “일 마친 사람ㆍ일 없는 사람ㆍ일 마친 사람이다.” 공부하고 제대로 확철대오 해서 생사를 해탈했다면 그야말로 일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선불교의 특색인데요. 대승불교하고는 차원이 또 다릅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하면 “일 마친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衆生無遍誓願度(중생무변서원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적인, 불교전반에서 보면요? 선불교. 이것은 사실은 소승입니다.
자기 깨달음과 소견이 아주 고준해서 석가모니를 훨씬 더 뛰어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을 제도하는 그런 노력이 없으면 이것은 소승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了事底人이라고,
일 마친 사람이다. 라고 하지만, 대승불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소승불교이고, 대승불교는 衆生無遍誓願度입니다.
衆生無遍誓願度. 중생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맹세코 다 건지리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으로써 건지고, 헐벗은 사람은 옷으로써 건지고, 미련한 사람은 지혜로써 건지고, 백방으로 중생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을 노력해서 다 건지겠다고 하는 이러한 자세가 대승불교입니다.
이 시대에 제가 그런 스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늘 존경해 마지않는 스님, 증엄스님. 대만에 자제공덕 회를 이끌어가는 그 스님이 왜 그런 발심을 했는가? 지금부터 한 50여 년 전에 대만도 전쟁이후에 아주 피폐했을 때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힘들 땐데, 수녀들이 이 증엄스님, 젊은 스님을 말하자면 교화하기 위해서 자기 절에 찾아왔어요.
절에 찾아와가지고 서로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한 50년 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젊은 비구니스님들에게 수녀들이 한 서넛이 그 사람을 교화하려고 찾아와가지고, 그 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대만의 사정도 서양에서 구호물자가 엄청 밀려들어와 가지고, 동양을 전부 천주교하고 기독교화 하기 위해서 엄청난 그런 구호물자가 밀려들어왔었어요.
그래서 곳곳에 유치원 짓고, 병원 짓고 학교 짓고 이렇게 해서 사회활동을 엄청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고 대만도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병원이 연세대학교 광혜병원인데, 기독교병원 아닙니까? 전부 그래요. 유치원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대만도 똑 같은 사정이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수녀들은 기가 등등한 겁니다. 좋은 일을 너무 많이 하니까요. 그래 절에 와가지고 천주교 믿으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이 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 교리는 게임이 안 되잖아요. 무슨 뭐, 사람을 죽이지 말라. 했는데 생명을 죽이지 말라하고, 불교는 이야기를 해보면 교리 상으로 차원이 다르거든요. 차원이 다르니까 수녀들이 앞발 뒷발 다 든 겁니다. 교리가지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 수녀들이 일어나면서 한 마디 딱 던진 것이 있어요.
“스님, 그렇게 좋은 교리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이러더래요. “그 좋은 교리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 때 그 수녀들은 한참 사회활동 하느라고 전국에 피폐된 그런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학교를 짓는다. 유치원을 짓는다. 병원을 짓는다하고, 온갖 사회사업을 그냥 불같이 일으키고 있는데, 도대체 불교는 그 좋은 가르침가지고, 또 역사가 좀 깊나요? 그걸 가지고 뭘 한거냐? 이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대만사회에서 세상을 위해서 한 것이 뭐냐? 이겁니다. “그 좋은 교리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더랍니다.
그것이 증엄스님 가슴에 화살처럼 콱~~ 박힌 겁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고민하다가 ‘불교도 좋은 일을 많이 하긴 하는데, 저 사람들처럼 어떤 단체가 돼가지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그렇게 못해서 그렇지,’ 여기서 개인이하고ㆍ저기서 개인이하고ㆍ이 절에서 하고ㆍ저 절에서 하고, 하는 것은 많은데 도대체 이것이 표가 안 나거든요. 그러면서 그것 참,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너무 부족한 겁니다.
100분의 1도 안됩니다. 천주교에서 하는 것에 비하면 100분의 1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스님이 작정하기를 자기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을 모았습니다. ‘모아서 우리도 한 단체를 만들어서 하면 되겠다. 그 단체가 차츰 차츰 커지고 커지면 큰 봉사단체가 돼서 불교도 얼굴을 들고 세상에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딱 들어가지고는, 그 다음부터는 신도들 모아가지고 소위 “죽통세월” 이라 그래요.
대나무, 대만에 대나무 굵잖아요. 대나무 통을 하나씩 깎아가지고서 그 때 신도들 다 모이면 30명이 모이더라는 겁니다. 그 30명에게다가 통을 다 전해주고는 (원화를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하루에 14원씩 내라. 그것도 못하겠느냐?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져가라. 30명이 통을 가져가서 한 달 동안 모아가지고, 노동하고 장사하고 하니까 절에 자주 올 수도 없어요. 불교만 믿었지, 절에 올 수 있는 형편도 못돼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통을 들고 와가지고 쏟아요. 쏟아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네 동네에 제일 불우한 사람. 제일 급한 사람. 병들어서 병원에 못가는 아주 힘든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그 돈 가지고 그 사람들에게 도와주는 겁니다. 절에 돈 10원도 안 들여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50년 세월동안 한 번도, 그것이 말하자면 봉사한다든지, 사회활동에 기여금 쓰는 돈 내면요? 절 운영에, 그 전자상가에 본사가 있어요. 그 절에서는 지금도 자급자족 하지, 10원도 절의 운영비로 쓰는 경우 절대 없습니다. 50년 세월을 그랬습니다. 한 번도 회비가지고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스님들이 그 단체를 위해서 어디 모임에 나가지요? 나가면 개인 차비를 냅니다. 그 단체를 위해서 모이는데도 그 단체돈은 절대 10원도 안 씁니다. 30명이, 예를 들어서 한 달에 10000원을 모았으면 만원이 몽땅 빈민구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소문이 그냥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나도 하겠다ㆍ너도 하겠다ㆍ나도 하겠다ㆍ너도 하겠다.” 그래 가지고 지금 전 세계에 700만 명이라고 하는 그런 세계에 제일 큰 구호단체입니다.
이 세상에 지금 제가 알기로는 대만불교가 제일 훌륭한 불교입니다.
스님들 생활도 그렇고, 봉사활동도 그렇고, 그래서 제가 아는 것만 하더라도 종합병원이 여섯 갠가 되고, 중국 본토에도 두 갠가? 벌써 몇 년 전에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다 완성했을 겁니다. 그 단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면 몇 날 몇 일이야기해도 다 못할 겁니다. 우리나라는 불교 T V 틀었다하면 그것은 불교 T V가 아니라 광고 T V입니다. 그런데 그 자제공덕회는 T V 채널을 두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1분1초도 광고하나 안 나와요. 하루 종일 틀어도 광고하나 안 나와요. T V가 두 개 채널이 있어요. 말레시아에 T V를 한 대 틀어도 계속돼요. 불교신문에 들어가서 찾아보면 지금도 다 나옵니다. 말레시아는 회교 국가입니다. 회교 국가에 T V채널을 하나 만들어 T V방송국을 세워서 무상 보급입니다. 그런 단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하고, 말하자면 그것이 대승불교의 표본입니다.
저는 그 불교가 가장 바람직한 불교라고 봅니다. 여기 보세요.
一箇了事底大丈夫라. 그랬잖아요. 선불교는 이렇게 자기의 깨달음이 고준하면 그것으로써 “일 마친 사람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을 일 마쳤다고 생각 안 하는 겁니다. 그 안목이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선불교정신이 깊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이해도 안 되고요. 또 禪이 대세잖아요. 禪이 대세니까 이런 것은 아주 귀에 잘 들어오고 이해가 잘되는데, 옆집에 무슨 불이 났는지 굶는지 뭐 먹었는지 도대체 생각을 안 하는 그런 풍조지요.
기독교하고 우리나라 지금 불교 상황하고 비교해보면, 기독교에 그 무슨 교리가 있습니까? 그것이 人天因果敎(인천인과교)지요. 戒(계). 그것 잘 봐주고 人天因果敎인데, 人天因果敎는 불교 안에 안 들잖아요. 불교에서 人天因果敎는 소승교 밑에, 소승교부터 불교입니다. 人天因果敎는 소승교에도 안 든다고요. 불교 5교. 다섯 개의 교를 말 할 때, 小乘敎(소승교)ㆍ大乘始敎(시교)ㆍ大乘頓敎(돈교)ㆍ大乘終敎(종교)ㆍ一乘圓敎(일승원교). 이렇게 칠 때 인천인과교는 불교 안에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실 따지고 보면 기껏해야 인천인과교입니다. 좋은 일 하면 천당 간다는 것이 바로 인천인과교니까요. 그런데 왜 이렇게 세력이 그렇게 크냐? 1700년의 불교를 다 잡아 먹느냐? 이것은 구체적으로 “범어사 불 질러라.” 라고 기도를 해도 꼼짝 못할 뿐입니다.
동네마다, 동래구의 사찰 30개면 30개, 40개면 40개를 전부 그 지역마다 불이 나올 정도로 딱 해놓고 “저 사찰 무너져라.”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대덕사 무너져라ㆍ안국사 무너져라.” 사정없이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도 1700년 역사가 된 불교는 눈도 하나 깜짝 못하고 있습니다.
소리 한번 못 지르고 있습니다. 3개월인가 4개월 뒤에 백석포에서 우리가 모임 한번 가진 것, 그것뿐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에 인과가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왜 그런 종교가 그렇게 득세를 하느냐?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에 기여한 공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이론 가지고, 좋은, 말하자면 뛰어난 가르침과 지견 소견가지고 세상에 기여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게임도 안 되는 교리가지고 불교를 그냥 완전히 뒤덮어도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인과는 불교에서 제일 잘 알잖아요. 그 사람들은 세상에 복을 많이 지은 겁니다. 6ㆍ25이후에 그 사람들은 구호물자를 가지고와서 얼마나 많이 복을 지었습니까? 병원이다ㆍ학교다. 온갖 그런 복지시설 같은 것을 엄청나게 해가지고 국민들에게 복을 많이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곳곳에 요소요소마다 흘러들어 언론계ㆍ정치계 무슨 뭐야ㆍ뭐야, 전부 연예계할 것 없이 전부 기독교인들이 꽉~~ 차있는 겁니다. 어디 가서 허가 하나 받으려고 해도, 예를 들어서 구청에 기독교인이 꽉~~ 차있으니까 계속 미루고ㆍ미루고 꼭 해줘야 할 것도 안 해주는 겁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는 일이 우리나라에 스님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것이 전부 우리가 복을 안 지어서, 그 사람들은 복 짓는 사이에 우리는 고준한 “이 뭣꼬?” 한다든지 방망이 쾅 치면서 “이 소식을 알겠는가?” 하고 그냥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이 불교인줄 알고... 그러니까 지금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 아닙니까? 善因善果 惡因惡果(선인선과악인악과)라면서요? “좋은 일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 라고 우리가 해놓고, 그런 말하자면 복을 짓지 않았고, 저 사람들은 그런 소리 별로 않아요. 안 하는데도 그 사람들은 복을 많이 지어 놓으니까 세력이 그렇게, 우리 불교보다 열 배 이상 세력이 그렇게... 관청이나 언론계나 문화계나 이런 데는 열 배가 훨씬 넘습니다. 관료인 열 명 중에 불교인 하나 있는가 모르고, 하나 안 됩니다. 국회의원 숫자하고 비교해 보세요. 알잖아요. 장관숫자하고도 비교해 보면 알고요. 상황이 그렇고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말하는 불교. 진짜불교가 무엇인지 사실 새롭게 우리가 인식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가장 바람직한 제대로 된 불교가 무엇일까?
우리가 실천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해서 제가 제대로 실천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자 이겁니다. ‘알고 있으면 어느 때인가 기회가 되면 한번 발 벗고 나 설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 了事底人. 일 마친 대장부라고 이것이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대승 경전에는 이런 말없습니다. 衆生無遍誓願度입니다.
첫댓글 _()()()_
“범어사 불 질러라.”라고 기도를 해도 꼼짝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부처님의 黙擯對治의 聖人차원입니다.
소인배들에게 대꾸해서 뭘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_()()()_
...()()()...
禪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있다. 8풍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비로소 그것은 진정한 선불교이고 선 생활이 되는 것이다...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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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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