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교무수첩에는 제주도 용머리해안에서 2학년 여학생들과 함께 찍은 소중한 사진 한 장이 있다. 뒷면에는 “교감 선생님과 보낸 추억,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사랑해요, 교감 선생님! 참, 그리고 노래 너무 잘 부르세요. 앵콜, 앵콜! 다시 한 번 사랑해요.”라고 써 있다.
2004.5.5(수) 출발 전날. 메모장에 기록된 준비물 목록을 점검한다. 모자3, 티셔츠2, 런닝3, 팬티3, 양말3, 면도기, 로션(스킨, 밀크), 타월, 치약, 칫솔, 여벌 웃옷2, 여벌 바지1, 반바지1, 등산화, 허리 가방, 지갑, 용돈, 교직원 비상연락처, 손수건, 메모장, 필기도구, 수학여행 안내 책자, 휴지, 핸드폰…. 일일이 ○표를 해가며 여행용 가방을 챙긴다. 마치 일전을 앞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 같은 기분이다.
2004.5.6(목) 출발일. 09:20 운동장에 모인 2학년 446명의 학생에게 학교장의 당부 말씀이 이어진다. 교감의 입장에선 호연지기, 공동체 의식, 애국심, 자연 풍광, 송호인으로서의 품위, 안전사고 예방 등의 단어가 예사롭지 않건만 학생들의 태도는 듣는 둥 마는 둥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다.
09:40 관광버스 11대에 분승하여 김포공항으로 출발. 이제부터 2박 3일간 인솔교사 15명을 포함하여 461명의 수학여행에 관한 모든 책임은 교감에게 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여행사 가이드와 함께 1호차에 승차, 11:10 공항에 도착하여 2층 탑승구에서 반별로 담임에게 탑승권을 배부. 내 티켓을 보니 탑승시각 12:15, KE 1235호기이다. 학생들을 탑승구로 안내, 1진 251명이 탑승하여 12:35 이륙하였다. 동행한 가이드 왈 제주도의 경우, 워낙 수요자가 많아 원하는 내년도 학년 수학여행 숙소를 예약하려면 올 7월 이전에 해야한다고 귀뜸해 준다. 13:25 50분만에 제주에 도착하니 맑은 공기, 피부에 와 닿는 시원함이 육지와는 사뭇 다르다. (얼마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인가! 90년 신혼여행, 94년 스카우트 대원 인솔, 작년 친척과 함께…. 그러고 보니 이번이 네 번째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선두에 서서 대형버스 주차장으로의 학생 인솔은 과거 여행 기억이 도움을 준다. 버스 기사들은 관심은 온통 일정표에 쏠려 있다. 13:45 공항을 출발, 10분 거리의 인근 레포츠 공원에 도착한다. 학생들은 각자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데 9호차 기사와 학년부장간에 고성이 오고 간다. 사연인즉 45명 중 25명만 태우고 와 공항을 한 번 더 갔다와야 할 형편에 이른 것. 2박 3일간의 안전 운행을 위해 서로 화해를 하고 나머지 학생을 다시 태우고 왔는데…. 지리가 낯설어 무작정 앞차를 따라온 기사, 화장실에서 학생들과 늦장을 부린 지도교사가 원인 제공자다. 그러고 보니 인솔교사 15명 중 10명이 신규 또는 4년 미만의 초보교사다. 교감은 학생 인솔도 중요하지만 지도교사까지 신경써야 함을 새삼 느낀다.
1호차 기사가 안내원 역할을 하며 제주도 방언을 소개한다. 학교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학교장에게 이상없이 도착하여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를 하니 날씨를 물으면서 특별한 일이 발생하면 보고하고 일과 종료 후 1회 보고만 하라고 하니 보고의 부담감에서 조금은 해방이 된다.
15:05 제주 민속 자연사 박물관에 도착, 하차전 출발시각이 15:45 이라고 안내하여 준다. 16:00 한림공원에 도착. 견학 도중 학생 따로, 담임 따로 어울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인솔교사라는 소임을 잠시 잊은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지도교사 사전 교육의 효과가 의심스럽다. 18:00 바닷가 배경의 단체사진 촬영을 위해 협재해수욕장을 향한다. 산만한 모습을 보니 학급별 단체사진 촬영 장소 배분이 아쉽기만 하다. 담임에게 지시를 내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리더십이 필요한데….
19:10 숙소인 북제주군 애월읍에 소재한 W리조트에 도착. 숙소에 짐을 놓자마자 제일 먼저 식당에 들러 종사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배식 방법을 알아보고 관리사무실에 가서는 방송방법을 익힌다. 야간에 뛰어다니지 않기와 함께 배식 시간 안내 방송을 한다. 19:30 저녁 식사 시간. 식당 입구에서 학생들을 통제, 20명 단위로 입장시킨다. 그러고 보니 교감이 나설 일이 아닌데 얼마 전부터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던 역할에서 무언의 실천자로 앞장서게 되었다. 인솔교사 구성원으로 보아 저절로 움직이길 기다리다간 낭패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20:10 저녁식사를 마치고 학생 숙소를 둘러본다. 오락, 베개싸움, 태클 등 가끔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목격된다. 식당에서의 영화상영을 끝나니 21:30. 학교장에게 “이상없음”을 보고 드리니 숙소의 불편함을 묻는다.
인솔교사 회의 시간. 교감으로서 당부사항, 빼놓을 수 없다.
“수학여행 첫날, 새내기 교사들이 많았는데 학생들 인솔에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몇 가지 부탁드립니다. 지도교사끼리 다니지 말고 담임은 학급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고, 수학여행 사전 업무분장대로 역할 수행하며 단체사진 촬영은 장소를 나누어 주기 바랍니다. 2박 3일간 인솔교사로서 능동적으로 학생들 지도하기 바랍니다.”
22:30 학교 홈페이지 학교 소식란에 “제주도 수학여행 제1일 보고”를 여정과 함께 학부모님께 감사드리는 글을 남기다. 00:00 가이드가 준비한 야식으로 비공식 평가회의가 진지하게 열린다. 01:00 드디어 취침. 권한은 작고 책임만 엄청난 인솔책임자여, 그대 이름은 교감 아니던가!
2004.5.7(금) 제2일째. 04:00 눈이 저절로 떠진다. 책임감이 무엇이길래? 05:30 세면을 마치고 숙소를 둘러보았다. 스피커에선 경쾌한 음악이 울려퍼지고, 학년부장 식사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젠 제법 정상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06:15 아침 식사가 배식되고 학년부장이 입장인원을 통제하고 있다. 식사 후 버스 11대의 구성을 살피니 각양각색이다. D관광이 5대로 제일 많고 H, J, N, Y관광으로 혼합 구성된 것. 행정실장으로부터 제주도의 특수성, 불가피성을 들었건만 이건 너무하다 싶다.
07:40 숙소 출발. 해발 970m의 어리목에서 1,750m 윗세오름까지 4.7Km, 장장 4시간에 걸쳐 등반하는 난코스이다. 등반 전 교감의 훈화 시간, 스카우트 지도자 생활이 많은 도움이 된다. 메가폰을 메고서
“여러분, 혹시 아픈 사람 없습니까? 누가 무어라 해도 건강이 최고입니다. 생활의 즐거움은 누가 주는 것 아닙니다. 친구와 선생님과 함께 즐거움 만들면 더욱 좋고요. 그리고 이번 여행 기간 중 인사를 생활화하여 봅시다. 선생님, 기사님, 가이드, 행정실장님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드립시다. 때로는 교감선생님한테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하는 어리광도 부려보세요. 또한 이번 여행을 통해 제주 방언 등 지방색을 익혀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
08:15 등반 시작. 체력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비탈길에선 땀이 비오듯 한다. 도중에 지나치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무리하지 않도록 자제시킨다. 사제비, 오름 약수터를 지나 10:10 윗세오름 1,700m 휴게소에 도착, 까마귀 10여 마리의 반가움을 받으며 표지판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학교에서부터 출발을 함께 한 2-1 담임 선생님께 1,500원짜리 사발면을 선물한다. 이 곳에서는 쓰레기 봉투를 무료로 제공하여 자기쓰레기는 되가져가게 하는 교육적 의의를 살리고 있다. 봉사활동으로 쓰레기 봉투 5개를 가득채워 주위를 깨끗이 하는 학생을 발견, 칭찬한다. 10:45 하산을 시작. 발목이 겹질려 절룩거리는 학생을 발견, 맛사지하고 위로해 주는 가이드가 믿음직스럽다. 12:00 다시 집결지인 어리목에 도착해 매표소에서 안내 팜플렛을 구한다. 교감은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 학생, 교사들의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하기에…. 방문한 주요 곳의 안내자료 소지는 필수다.
13:10 K식당에 도착하였는데 뷔페식이다. 식사 질서 지도가 교사들의 몫이다. 14:00 하멜선이 있는 용머리 해안가 도착. 이곳은 발을 헛디디면 익사의 위험이 있고 파도칠 때는 더 위험하다. 15:00 주상절리 도착. 버스 기사의 환상의 섬, 신들의 섬, 전설의 고향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건립비용으로 1,450억 들어간 월드컵 경기장이 보인다. 16:40 천지연 폭포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숙소로 향한다.
18:30 저녁식사. 제법 20명 단위로 학생들이 질서있게 입장하고 교사들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학교장에게 오늘 “이상없음”을 보고하고 레크리에이션 진행자를 만난다. 전체 진행 개요를 설명 듣고 당부사항을 전한다. 신나고 흥겹게, 재미있게, 질서를 지키면서 품위있게 진행할 것을 부탁하며 교감 인사말 순서와 노래 넣기를 예약 확인한다. 20:00 이벤트팀이 주관하는 레크리에이션. 학생들이 잘 놀 줄 모른다고 판단한 담임들이 분위기 띄우기에 일조를 하니 고맙기만 하다. 교감 순서에서는 나도 덩달아 오버 액션이다. 트롯트에 감수광에…. 작정하고 체면을 벗어 던진다.
22:00 인솔교사 회의. 오늘 점심메뉴 부실이 성토 대상이다.
“점심, 저녁 식사 질서 지도를 하여 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 아침에는 밤새 이상유무와 함께 환자 발생 여부를 확인하여 주기 바랍니다. 학교 도착하여 귀가까지 안전사고 예방에 신경을 써 주고요. 그리고 내일이 어버이날입니다. 학생들이 부모님께 감사 전화 드릴 수 있도록 교육적으로 지도하여 주세요. 내일 학급 단체 사진 촬영은 성산 일출봉, 성읍 민속마을, 산굼부리, 제주공항 등으로 나눕니다. 내일 종례는 성산일출봉에서 있습니다.”
행정실장은 그 동안에 지출한 예산을 공개하고 우리처럼 따로 떨어진 숙소가 학생관리에 좋다고 하며 버스 기사들의 정보망으로 여러 학교 모이는 곳을 피했기 때문에 일정이 순조롭다고 자화자찬이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2004.5.8(토) 06:00 음악 방송에 잠이 깨다. 피곤한 탓일까, 벌서 여행에 적응이 되었나? 기상과 동시에 식당으로 가니 한가하기만 하다.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으니 마이크를 잡고 식사 재촉과 짐정리 안내 방송을 한다. 그래도 식당 줄이 이어지지 않는다. 모두 피곤한가 보다. 학생의 반 정도가 아침 식사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식당 종사원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
“음식이 깔끔한 것,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이 좋다고 해야 되는데요….” 소비자 중심이 정착되었나보다.
07:15 관리 당직자가 각실 열쇠를 거두어 간다. 객실 유리 파손 변상 이야기가 나온다. 시계를 분실한 학생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도 보인다. 행정실장과 담임이 나서서 처리한다. 아침 기온이 초가을 날씨처럼 서늘하다. 일기 예보를 들으니 80~120mm의 강우가 예상되며 호우와 폭풍이 몰려온다고 한다. 귀로 걱정을 하며 이후 대비책을 생각해 본다.
08:10 해발 500m의 신비의 도로. 버스 시동을 끈 상태에서 움직임을 체험해 보고, 하차하여 물을 뿌려도 보고 패트병을 굴려보고 과학적 원리를 생각해 본다. 08:40 분화구에 도착하여 기생화산 360개 중 유일한 폭렬공이라는 안내문을 유심히 읽는다.
10:00 성산일출봉. 461명을 대상으로 한 교감의 종례 시간이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아직 감사 전화 못 드린 학생은 점심시간 전까지 꼭 전화 드립시다. 그리고 2박 3일간 인솔하여 주신 선생님께도 감사 잊지 맙시다. 여러분은 이번 여행을 통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가정이 최고라는 사실, 건강관리의 소중함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진전, 보고서, 여행기 작성 준비를 하기 바랍니다. 일일 여정은 학교 홈페이지 학교소식란에 1일 탑재하였습니다. 학교 도착 후에는 곧바로 귀가하기 바랍니다.”
11:20 300명을 동시 수용하는 K식당. 제주 고사리와 섞어 먹는 독특한 통돼지 불고기가 입맛을 돋운다. 11:50 국가지정 2호 마을인 성읍 민속마을. 483 가구 중 한 집을 방문, 실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소중한 기회다. 성읍마을을 출발하여, 13:20 공항 근처 J 장터 도착하니 학생들은 선물사기에 바쁘다.
13:55 제주 공항 도착, 교감이 계속 선두에 선다. 탑승구 1번 게이트를 통하여 KE 1234호기에 탑승, 14:20 이륙, 15:20 김포공항에 도착. 그러나 아뿔사! 가이드와 행정실장이 2진으로 도착하니 버스까지 안내하여 주는 사람이 없다. 버스 승차 위치를 사전에 알아두거나 버스 회사 책임자 휴대전화를 알아 두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계약한 H관광버스 직원을 겨우 만나 15:55 공항을 출발 학교로 향한다. 교통 체증으로 18:20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장과 학부모님들이 반가이 맞이해 준다. 제2진은 20:30 학교에 도착, 평소 소요시간보다 2시간 이상 지체되어 마중 나온 분들 얼굴 대하기가 민망스럽다. 끝마무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무사고인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자위하여 본다.
이번 수학여행을 통해 새내기 교감으로서 느낀 점 몇 가지!
교감은 교직원 뿐 아니라 학생에 대한 봉사직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감은 항상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교감은 사태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신속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교감은 사태에 대한 현명한 대처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감은 사고 예방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감은 구성원들이 능동적으로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 교감은 행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교감이 인솔책임자로 가려면 사전 답사도 반드시 교감이 가야 한다. 이것이 교감으로서 얻은 큰 소득이다.
제주도 2박 3일간 동고동락을 같이한 본교 2학년 학생과 열다섯 분의 선생님, 그리고 학교 도착까지 노심초사 무사고를 기원하여 주신 학교장님과 뒷바라지하여 주신 학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새내기 교감, 이번 행사로 조금은 성숙된 기분이다.
첫댓글 200 자 원고지 35장 분량입니다. 경기교육 가을호(2004.9 발간)에 투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