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景一齋記
〇年代: 一八八一(高宗一八, 辛巳), 原文에는「上之十六年 辛巳),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記文을 筆寫하는 이가 「上之十八年」을 「上之十六年」으로 잘못 기재한 것 같다.
〇作成者: 張時杓(北靑都護府使, 本實: 仁州)
〇內容: 京一齋는 咸陽 南城山아래에 있는 鄕士林들의 講學處이다. 鄭汝昌을 추모해 지은 건물이다.
景一齋 記
州古文獻公一蠹鄭先生 杖屨之地而其後孫搆堂于州南城山之下命曰景一齋 蓋景慕一蠹 之義也堂旣成鄕之士因之爲講學之所而屬余以記其事嗚乎先生沒道未嘗亡先生沒三百年先生之道不明於世何哉天有日星地有河嶽人有斯道日星可晦盲河嶽可崩渴斯道不可亡斯道之亡特由行道者之不率爾今夫鄕之士搆是堂而慕是道讀先生之書服先生之行則先生之道可復明於斯世而若乃慕其風而不能深信尊其道而不能篤行則升是堂也居是室也寧不愧哉雖然先生之道亦有時而晦明而況於是齋之興廢歟而昔之荒烟敗草今爲是齋而是齋之復爲榛荒又未可知也之齋之興廢在人先生之道之盛衰關世敎先修夫在人者而以明乎關世敎之道亦在是齋之學者爾余嘗南至花開 之頭流山 中見千山峨峨孤舟杳茫慨然想夫先生之風而覿其彷佛者矣今奉 命北來登先生之堂北望天山西望五嶽仰先生壁立之像南望大洋慕先生淵源之德因歎曰先生之道在是欲學先生之道者宜於是齋求之乃出廩錢百金以助其講學之資而使玆州學者有以明夫先生之道也
上之十六年辛巳 暮春後學通政大夫行北靑都護府使 仁州 將時杓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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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장시표(張時杓) 경일재기(京一齋記)
분류· 작성주체· 작성지역· 작성시기· 형태사항· 인장서명· 소장정보· 비고
고문서-시문류-기 / 교육·문화-문학저술-기 |
발급: 장시표(張時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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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
1881년 / 상지16년신사모춘 |
크기: 26x52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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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현소장처 : 함양 남계서원 |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24 -남계서원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본 이미지는 원본 소장처인 영암 장암 남계서원의 협조에 의해 촬영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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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표 (張時杓)
조선 후기에, 현풍현감,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응칠(應七)호운고(雲皐)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출생 연도1819년(순조 19)사망 연도1894년(고종 31)본관인동(仁同)주요 관직현풍현감|병조참의|북청부사
정의
조선 후기에, 현풍현감,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응칠(應七), 호는 운고(雲皐). 아버지는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장보(張보)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관운(李觀運)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49년(헌종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제수받았고, 1857년(철종 8) 지평이 되었다. 1862년 민란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교당(校堂)에 모여 민란의 원인을 분석하여 미연에 방지할 계책을 논의하였는데, 이 일로 오히려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였으나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고종 1) 장령·장악원정이 되어 경연에서 강의하였으며, 1865년 이후 현풍현감·집의·교리·동부승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 북청부사 재임시에는 지방의 교육기관을 활성화시켜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교량을 수리하며 관개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역발전에 힘썼다.
또한, 글도 잘 지었는데 장시표가 남긴 글 가운데 전문(箋文)이나 기우제문 등은 그 문장이 간략하면서도 웅장하며 엄격한 절제미가 돋보인다. 저서로는 『운고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운고문집(雲皐文集)』
집필자 한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