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멀다 / 최미숙
9월인데도 여태껏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기승이다. 보통은 8월 15일이 지나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돌았는데 올 더위는 아직 물러가려고 생각도 않는다. 확실히 이상 기온이긴 하다. 그리스에서는 단 하루에 2년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고, 노르웨이는 빙하가 녹아 4000년 전 화살대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날씨만큼이나 사회도 교육 현장도 정상은 아니다. 특히 교육계는 연일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으로 아수라장이다.
더위가 한창인 8월 18일 2학기가 시작됐다. 방학 때 시작한 화장실과 복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 학교도 난리법석이었다. 한동안은 먼지 구덩이 속에서 살아야 할 판이다. 그래도 더운 날씨에 일한 인부들이나 계속 출근했던 관리자와 직원들 수고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학교 일정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거의 한 달 만에 본 아이들도 부쩍 컸다.
2교시, 6학년 수업 시간이다. 수석실을 나서니 남자아이 악쓰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교실에 들어가니 눈물을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작년에 쓴 글 ‘소외된 아이’의 주인공이다. 다문화 가정으로 아빠는 나이가 많고 엄마는 외국 사람이라 둘 다 아이에게 무관심하다고 들었다. 6학년 친구 중 키가 가장 작고 저학년 때부터 놀림을 당해서인지 피해 의식도 심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쉽게 받지 못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쓰여 자주 불러 이야기도 해서 나와는 믿음이 쌓였다. 글을 쓰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글쓰기도 같이 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안 봐도 뻔했다. 그래도 반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하필 담임이 병가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 다툼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가 가세해 둘이 몰아붙였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는데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반 애들까지 교실로 들어와 그 아이 필통 뺏기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 말라고 소리쳐도 실실 웃으며 계속 조롱한 모양이다. 듣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올라왔다.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고 관련된 친구 이름을 적은 후 수업을 했다. 그런데 다툼이 있었던 두 아이가 눈치 없이 계속 농담하며 수업 분위기를 흐렸다. 주의를 줬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아이들이 내 화에 놀라 교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나이에 어린아이와 실랑이 하는 나 자신이 처량했다. 온몸의 맥이 풀리고 기운이 다 빠져 밥맛도 없었다. 정년이 몇 달 남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학교에서 일이 있으면 그 기분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퇴근하고 집에 가자마자 자리에 누웠다.남편이 말을 거는 것도 귀찮았다. 저녁 내내 짜증 섞인 말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기분이 나빴나 보다. 영문도 모르는 남편이 화풀이대상이 됐다. 이틀간이나 데면데면했다.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6학년 담임 둘과 상담 선생님을 불렀다. 집단으로 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가장 질이 나쁜 폭력이다. 관심 있는 부모였으면 학교가 시끄러웠을 일이다. 가담한 학생 부모님께도 연락하기로 하고 반성문을 받았다. 다음날 담임(교직 경력 3년)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잘 살피라고 당부했다. 오후에 두 아이가 수석실로 찾아왔다. 죄송하다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지켜보겠다며 돌려보냈다.
수요일 글쓰기 시간에 아이가 왔다. 주제를 물었더니 월요일 있었던 일을 쓴다고 했다. 제목은 ‘사건’이었다. 아이는 글에서 그 자리를 피해 복도로 나가려는데 여럿이 막았다고 했다. 혼자 대항하지는 못하겠고 분한 마음을 소리 내어 우는 것으로 호소한 아이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일은 다른 교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이런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인 것도 모자라, 드센 학부모의 말도 안 되는 민원에 시달리며 1년이 어서 가기를 바라는 교사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내 자식 나이대인 서이초 교사가 처했던 상황을 공감하기에 더 마음 아팠다. 갈수록 학부모나 학생을 상대하는 것이 힘든 일이 됐다. 교사도 감정이 있는데 왜 성인군자가 되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예의 바르고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 착실한 학생이 더 많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한 번만 상대와 처지를 바꿔 생각하고 내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한다고 여긴다면 상대를 마음 아프게 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학부모나 학생 교사 모두 가슴 깊이 새겨 볼 일이다. 내가 아프면 남도 똑같이 아프다. 학교 현장은 언제 정상이 될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