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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아내(신현주)가 중국에서 딸을 낳았다. 나로 인해 없었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만큼 큰 선물이요, 영광일 것 이다. 더구나 이국 땅에서 아이를 낳은 것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가진 후 병원에서 아들을 확인하면 미국에 가서 아이를 낳는다는 소 식을 들었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을 경우 미국의 국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병역이 면제되고 조기 유 학을 보내기에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아이를 낳을 경우 우리나라 보다 좋은 시설과 기술로서 아이를 낳기 때문에 안 전하고 또한 커서도 장래성이 있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한국보다 좋지 못한 전 근대적인 시설과 기술, 그리고 아이가 커서도 장래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도 중 국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선교를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아이를 낳음으로 중국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그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는 생각에서 아이를 이곳에서 낳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 아이를 낳고 보니 역시 우리의 생각대로 중국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그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아내는 매우 건강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기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곳 중국 에 와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함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또한 건강의 악화로 일찍 한국으 로 돌아가는 분들도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중국에 온지 1년 6개월 동안 한번도 약을 먹거나 아파 누워 본적이 없을 만큼 건강하였다.
임신을 하고 난 후에도 입덧으로 인한 어려움과 임신 중독증이 거의 없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을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건강하였다. 심지어 아이를 낳던 전날까지 아내는 예배드 리러 가고 이곳 자녀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로서는 기쁘고 고맙기 그지 없었다.
출산 예정일은 2000년 5월 18일이었는데 아이는 그날 나오지 않았다.
첫 아이는 며칠 늦어진다는 말대로 며칠 늦어지려니 생각하였는데 5월 18일 밤 12시가 지나자 아내의 진통이 시작 되었다. 처음엔 저녁을 잘못 먹어 배가 아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0분 간격으로 배가 아픈 것을 확인하고 급히 육아책을 펴 보았다. 출산하기 전 처음엔 10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다가 5분 간격, 3분 간격으로 줄어들다가 출산을 한다고 기록이 되었다.
처형은 진통이 시작된 후 3시간만에 아기를 출산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병원에 갈 준비를 하였다.
새벽 1시에 집을 나서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중국 강소성 석산시 동장진으로 진(镇)은 한국의 읍에 해당된다. 그곳에 작은 종 합 병원이 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출산하기로 하였다. 우선 집과 가깝고 세 번에 걸쳐 그곳에서 혈액 검사, 소변 검사,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산모와 아이 모두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순산이 확실함으로 시내에 있는 전문병원에까지 가서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새벽 1시여서 아무래도 집 근처에 있는 동장병원에 가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또한 그 시간에는 비전문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시내에 있는 전문 산부인과 병원으로 방향 을 잡았다.
병원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친 후 응급실에 가서 간단히 진찰을 받고 임산실로 갔다. 시계는 이미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곳에 낮과 다름없이 많은 의사,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 고 역시 큰 전문병원이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대기실로 가서 출산 준비를 하였다. 아내의 진통이 10분 간격에서 5분 간격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고 곧 출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출산 시간은 갈수록 길어졌다. 집에서 나설 때에는 3시간 후 출산 을 하고 아기를 데리고 온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였는데, 아내의 진통은 9시간 계속 되었다.
내가 잠깐 밖에 전화하러 나간 사이에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출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밖에서 기다렸는데 얼마있지 않아 아내가 침대에 누운체 그냥 나오 고 있었다. 초음파 검사를 한 결과 아이의 위치가 정상이 아니어서 인위적으로 양수를 터트려 아이의 위치를 바로 잡아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아내는 양수를 침대에 가득 적셨다.
그로인해 아내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아이가 나오려면 통로가 6~10센치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 3센치라고 하였다. 보통 1시간에 1~1.5센치 커지는데 3시간 후인 정오가 되면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3시간만 참 으면 된다고 위로하고 찬송을 불러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 렀다. 양수가 터진 후 3시간 동안 진통을 한 후 다시 분만실로 들어가 출산을 준비하였다.
분만실에는 본인외의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나는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의사들과 같은 수 술복으로 갈아입고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는 침대가 놓여서 있었고 침대 위에는 손을 잡는 기둥과 발을 의지하는 기구가 있었다. 아내의 발을 양쪽으로 벌여 발판에 발을 얹고 손으로 기둥을 잡게 한 후 힘을 쓰라고 하였다. 힘을 다 써 보았지만 양수가 터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아이의 위치가 바르지 않아 아이 의 머리만 조금 보일 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성도님들이 도착하여 미역국을 끓여 들여 보내 주셨지만 국물만 조금 마실 뿐 더 이상 먹지를 못하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산모가 힘을 잃어가자 전문의사 선생님이 나를 밖으로 불러 내었다.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지속되다간 아이도 나올 수 없을 뿐더러 산모도 위험하니 아래를 찢어 집게로 아이를 꺼내어야 한 다면서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요구하였다. 수술 계약서를 읽어보니 수술 후 산모와 아이의 어떠한 결과 도 책임질 수 었다는 내용이 나로 하여금 사인을 미루도록 하였다.
담당 의사 선생님의 설득이 이어졌다. 이곳에 있는 의사들은 모두 일류 의사로서 실력이 있고 경험이 많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하면서 사인을 계속 권면하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켜 본 나로서도 역시 산모의 힘은 점점 잃어가고 진보는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사인을 하였다. 사인을 하고 나니 지금까지는 내가 산모와 같이 있었지만 이제는 밖에 나 가야 한다고 하였다.
수술 장면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내가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여러 중국 의 사들에 둘러 쌓여 홀로 침대에 누워 그 끔찍한 수술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놓이지지 않아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옆에 있어야 아내도 안심이 되고 수술도 잘 할 것 같아서 끝까지 남아 있겠 다고 주장하여 결국 남아 있기로 하였다. 역시 그들은 스스로 말한데로 일류였다. 능숙한 실력으로 수술 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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