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후천황
치우(蚩尤)는 배달나라 제14세 천황으로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라고 불렀다. 자오는 까마귀를 뜻하므로 삼족오 까마귀 토템을 믿는 부족으로 치안과 국방을 담당한 치우씨의 후손이다. 배달국시대는 주로 장자 상속이었지만 능력과 신망이 있는 사람은 추대하여 천황이 될 수 있었다. 치우는 하늘을 빙빙 돌게 하는 힘과 바람과 구름과 안개와 번개를 부리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칼, 창, 활, 도끼를 만들었고 최초로 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가진 인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배달국이 처음으로 첨단기술인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서방의 중국은 지역이 다르고 교통이 트이지 않아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농사가 시작되면서 중국이 점점 번창하였다. 옥토는 천리를 뻗었고 기후가 좋아서 곡식과 삼베가 풍부했다. 인구가 늘자 중국인들은 점차 배달국 신시를 넘보게 되었다. 치우천황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들을 제압해야 했다. 안으로는 용감한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며,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어 무기를 만들고, 형제와 친척 중에서 81명을 뽑아 우두머리를 삼는 등 군대를 재편했다.
치우군대의 기세는 비바람 같아서 그 위력을 천하에 떨쳤다. 일 년 동안 12제후국을 빼앗았다. 그 기세에 중국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이때 중국에는 헌원씨(軒轅氏)가 임금이 되어 치우를 맞아 싸웠다. 그들의 무기는 돌로 만든 칼과 화살촉이어서 청동기 무기로 무장한 치우군대를 감당치 못하고 패하여 달아났다.
10년 동안 73회나 패한 헌원은 치우를 본받아 갑옷을 만들어 입고 청동 병기로 무장한 다음 탁록(涿鹿)에서 치우와 크게 싸웠다. 치우는 붉은 색 염초를 태워 큰 안개를 일으키고 앞을 분간 못하게 한 다음 공격하니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헌원은 자침을 이용하여 인형의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게 하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방향을 분간하였다. 치우가 하늘을 살피니 중국은 기운이 점점 왕성하게 번창하고, 염제의 백성들까지 합세하므로 이를 다 죽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제각각 제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쓸데없이 죄 없는 백성을 죽일 수 없구나 하고 되돌아 왔다.
이 대목은 우리 측 주장과 중국 측 주장이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헌원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치우의 부장 하나가 공을 서둘러 세우려 하다가 진 안에서 죽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치우는 화대 땅을 굳게 지키며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치우가 물러나오자 헌원은 화하 지방을 제패하고 천자에 오르니 백성들은 그를 황제(黃帝)로 추앙하였다.
중국의 삼황오제 시대
중국의 역사는 반고(盤古)가 세상을 연이래 삼황오제(三皇五帝)부터 시작한다. 삼황은 팔괘로 역술을 만든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그리고 복희씨의 누이이며 아내로 인류를 낳은 여와씨(女娲氏)다. 책에 따라서는 여와씨 대신 불을 만들었다고 하는 수인씨(燧人氏)를 넣기도 한다. 복희씨는 우리나라 《규원사화》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오제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일컫는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삼황시대는 역사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오제본기(五帝本紀)》부터 중국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한결같이 “황제의 자손”으로 역사를 배워왔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은 염제를 추가하여 삼황시대도 중국역사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황제의 고향으로 알려진 중국 하남성 신정시 황제고리(黃帝故里)에는 “염황자손(炎黃子孫) 불망시조(不忘始祖)”란 글귀가 적혀있다. 염제와 황제의 후손들은 시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염조까지 추가한 것은 다민족 일체론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추축된다. 최근에는 치우까지 추가하여 탁록 땅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세웠다. 그들이 염제와 치우까지도 조상으로 섬기는 것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이다. 즉 현재 중국 땅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 것이라는 논리로 고대 동북아시아의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황제는 BC 2704년경에 태어나 염제와 연합하여 탁록에서 치우를 물리친 후 BC 2697년 최초의 국가를 세우고 천자에 올랐다. 천자가 된 그는 의복, 궁실, 배, 수레, 악기, 간지, 문자, 양잠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황제의 손자 전욱은 군사적 정복에 힘써 영토를 많이 넓혔으며, 우주 운행에 따라 계절에 맞는 일을 하도록 하고, 예의를 제정하였다. 황제의 증손 제곡은 해와 달의 운행을 헤아려서 역법(曆法)을 만들었다. 제곡의 아들이자 황제의 고손인 요(堯)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춘분, 하지, 추분, 동지와 1년을 365일로 정하였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이용하여 사계절의 오차를 바로 잡게 하였다.
요는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가 덕이 없음을 알고 적당한 후계자를 찾았다. 결국 순(舜)을 찾았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후계자로 삼았다. 순은 계절과 한 달의 날짜를 바로 잡았고 하루의 시각을 바르게 정했으며,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오례를 제정하고, 물길을 잘 통하게 하였다. 요와 순의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태평성대 했다. 순임금도 아들이 아닌 치수(治水)를 잘한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우가 세운 나라가 하(夏, BC 2183년)나라 이며 이때부터 황하문명의 시작으로 본다.
황제고리(黃帝故里)는 헌원황제의 고향이란 뜻으로 문헌을 바탕으로 최근에 복원을 하였다.
필자는 중국의 동북공영을 비롯한 역사왜곡을 깨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보았다.
'염황자손 불망시조' 즉 염제와 황제의 자손들은(중국인 전체)는 시조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본래 중국 한족(漢族)은 황제(黃帝)를 시조로 섬겼는데 최근에 역사를 앞당겨 삼황의 염제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 외곽에 세운 황제와 염제의 거대한 석상.
중국 하북성 화이라이현 탁록에 위치한 중화삼조당(치우, 황제, 염제)
중국인들은 동북공영의 일환으로 이제 치우까지도 그들의 조상으로 삼으려고 한다.
<붉은 악마 치우천황 문양>
<대한민국 축구응원단 붉은악마 공식 응원깃발 치우천황기>
<붉은악마 응원도구 머플러에 있는 치우천황 문양>
<우리나라 전통 기왓장에 있는 치우천황 문양>
<치우천황의 후예 붉은악마들>
<치우천황의 후예 붉은악마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 민족의 장래는 밝다.>
첫댓글 2:8 새신랑같은 교수님 등장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