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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중생)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토론
holyjoy (2011.12.12. 10:12)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 달렸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인해서는 안될 사실입니다.
우리의 중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중생케 하시는 이 역사에서
전도하는 일, 설교하는 일, 기도하는 일 등은 어떤 역할이 있는 것일까요?
나아가서, 구원이 무엇인가 궁금해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찾아보고 또한 기도하곤 하는 일들은
어떤 위치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애씀은 알미니안적 요소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지금 등산하러 갑니다.
다녀와서 이 부분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싶군요.
어디선가 중생론 토론을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토론을 하다가 중지해 버린 것 같아서
이곳에서 좀 더 의미있는 토론을 진행해 보았으면 합니다.
겨울 등산....참 좋습니다.
사진도 담아오겠습니다..
회원님들 모두....행복하세요^^
댓글 64
바보새 11.12.12. 11:30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
┗ holyjoy 11.12.12. 16:38
함께 논의에 참여해 주시면 저도 숨을 골라가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바보새 11.12.12. 17:58 네^
lamad 11.12.12. 11:57
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에 나온 내용입니다.
...(lamad 님 댓글 중간 생략)...
벌콥이 중생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있는가 우선 제가 필요한 부분만 가져 왔습니다. 그러기에 일방적일 수도 있다는 것 말씀드립니다. 다 읽어 보지 못해서 죄송하고 틈틈히 읽으면 토론에 참여하겠습니다. 후크마의 책은 중생 이부분에 관한 부분은 예전에 보았는데 잘 기억이 안나는 군요.^^
이 참에 제가 가지고 있는 벌콥과 후크마와 마틴 로이드 존스 책을 뒤져보겠습니다.
┗ lamad 11.12.12. 12:13
겨울 등산 잘 다녀오세요.
┗ holyjoy 11.12.12. 16:03
잘 다녀왔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벌콥의 중생에 대한 언급을 정리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런 벌콥의 중생론에서의 ‘중생’은, 1)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고 하고, 또한 2) ‘재발생’과 ‘새출생’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벌콥의 중생론은, ‘순간적 중생론’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연속적 중생론’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하기 때문에 질문을 통해서 논점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시는대로 답변해 주십시오^^
grace 11.12.12. 12:13
유익한 토론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예담 11.12.12. 12:34
.... 은혜은약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에의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는데, 죄인들이 구원 받기위해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며,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자들이 자발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웨민 7장) : 구원을 얻은 자들의 애씀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고, 당연한 결과로서 전도와 봉사와 기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한 고로 .... 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기도하겠지요^^
┗ holyjoy 11.12.12. 16:06
예담 님, 정말 감사합니다. '자발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웨민7장을 언급해 주시고, 또한 "당연한 결과"로서 "애씀"의 현상으로 "전도와 봉사와 기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개혁주의신조, 웨신의 고백을 소위 개혁주의를 그렇게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발언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현상이어서 이 문제를 본 카페에서 좀 더 심도있게 논의하면서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를 "애쓰게" 하셨고, 지금도 "애쓰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
정야베스 11.12.12. 12:53
어쩌면,.<중생>과 <성화>는 같은 의미로 이해할수도 있겠지만,.<연속적 중생관>이라는 의미도 이해 할만 합니다...어쩌면 우리는 죽을때까지 거듭나는 과정에 있지 아니한가?.이런 생각도 해봅니다..분명히 예수가 믿어지고,.구원에 대한 확신도 들지만,.여전히 개차반 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여전히 거듭나야 하는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이번 기회에 <중생>에 대한 의미를 배워 두고자 합니다...
┗ holyjoy 11.12.12. 16:09
연속적 중생론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논의의 촛점을 헷갈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용어가 더욱 분명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우리는 죽을때까지 거듭나는 과정에 있지 아니한가?'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을때까지 성화의 과정이 계속되고 또한 반복되는 회개의 과정은 있어도, "죽을 때까지 거듭나는 과정에 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성화와 중생(거듭남)을 혼동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생"의 의미를 정야베스님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논의의 분명함과 생산성있는 결과를 위해서 용어가 서로 공통된 개념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 신고
┗ 정야베스 11.12.12. 16:19
그렇군요!!중생은 우리의 생이 마감되는 어느 싯점까지는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아야 하겠군요!!~홀리조이님의 견해에 대하여,.공감 합니다.. 신고
...(댓글 중간 생략)...
┗ holyjoy 11.12.13. 07:35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SDG에서 토론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살펴보았더니, 토론글들 모두가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데, 어떻게 된지 아시는 분들 계십니까? 참 싱겁기가 짝이 없군요. "연속적 중생론"에 대해서 시비를 붙여서 비평하고 판단하려면, "연속적 중생론"의 원조에 해당되는 이 양무리마을 카페에 최소한 자문이라도 해 보시지...
강요된 은총 11.12.13. 07:25
토론방으로 옴겨졌습니다,,,,
┗ holyjoy 11.12.13. 07:36
ㅎㅎ 그렇군요. 아직 그 카페에 제가 익숙하지 못해서리...^^
┗ holyjoy 11.12.13. 12:45
이제는 이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토론은 잠정적으로 중지하기로 주인장이 선언하셨군요. 양무리마을에서는 "토론"이 오히려 강조되는 특징이니, 이곳에서의 토론이 활성화되기를 바래 봅니다. 아무래도 원조에서의 토론이 더욱 분명한 토론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