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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8
창세기 3:8-12
하나님의 영의 날
창세기 1:1-2:3에서의 주어는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리고 2:4 이하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어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로 일하심을 나타내는 것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을 이루어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시고자 하신 언약이 담긴 표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늘과 땅의 내력”(2:4), 즉 창조의 ‘톨레도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속을 언약으로 나타내신 표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래서 2:4 이하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주어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뱀은 ‘엘로힘 하나님’으로 표현하여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함으로 그 나무와 하나 되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한 상태는 이제 모든 것을 선악 체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 상태에서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증거가 무과화나무 잎으로 허리띠 만들어 가리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어지는 모든 후손은 이제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3:1에서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뱀이 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동원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만 않았어도 영생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우리가 죄 가운데 고생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린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금 성경을 보는 나 자신이 바로 아담과 하와라는 사실을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여 내가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이 늘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는 존재라는 우리의 실체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2:4의 ‘톨레도트’에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여 말씀하나 뱀이 잠시 엘로힘 하나님을 주어로 나타내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와 하나님으로 사람을 찾아오셨다. 그래서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절)라고 말씀한다. 직역하면 ‘그들이 동산에서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의 그 날의 음성을 들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피하여) 정원의 나무 중앙에 아담과 여자가 숨었다’라는 말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동산을 산책하신다는 느낌으로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그 날 바람이 불 때”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레루아흐 하욤’으로 ‘그 영의 그 날’이라는 말이다. 1:2에서 이미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을 표현한 것이지 단순히 바람이 불 때나 어떤 번역에서처럼 시원할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하나님의 영의 날’, 곧 ‘성령의 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니시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할라크’인데 ‘걷다, 행하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동산을 산책하신다는 느낌의 표현이 아니라 아담, 여자와 함께 동행하고 교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표현한 말이다. 즉 뱀이 엘로힘 하나님으로만 알렸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여자와 교제하고 동행하시기 위해 임하셨다는 뜻이다. 그것을 성령의 날로 표현한 것이다.
아담과 여자가 숨은 곳을 우리 성경에는 마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숨은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여기서도 나무는 단수(히, 에츠)로 되어 있다. “사이에”(히, 타웨크)라는 말은 ‘중앙, 한 가운데’라는 뜻이다. 즉 나무 중앙에 숨었다는 것으로 아담과 여자는 ‘선악의 지식 나무 한 가운데에 숨었다’는 의미이다.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그 나무와 하나 된 인간은 ‘하지 말라’라는 율법 한 가운데 숨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9절)라고 물으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셔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 아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은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여 하나 된 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나무를 율법으로 취하여 율법과 하나 된 인간은 끝없이 핑계를 전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로 돌린다. 핑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는 것은 아담이 여자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라고 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다. 둘이 한 몸이 아닌 둘이 되었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결과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한 몸이 아니라 서로 타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서로가 남이 되고 타인이 되어 죄의 책임을 전가한다. 아담이 자기 자신의 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닌 여자를 철저히 다른 사람으로 보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죄인의 특징이 하나님을 타인으로 놓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을 제삼자로 놓고 그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섬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의 것을 결코 받지 않으신다. 구약의 제사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 알고 있으나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시는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언약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다. 그것을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들의 교회 생활이고 종교 생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7-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라고 한 것과 같이 아담은 하나님도 타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하였다. 이제 인간에게 하나님과 여자는 서로 타인이 되었다.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고 그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게 한 여자가 주었기 때문에 아담은 “열매”로 먹었다고 나타내고 있다. 선악의 나무를 열매로 먹는 이 상태가 바로 율법이라는 자기 행위로 먹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여자가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선악의 지식 나무를 정원 중앙에 두심으로 그것을 통해 어떻게 일하실 것인가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바람”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우리의 죄악이 성령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악 된 가운데 내버려 두심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성령께로 몰아가서 진리로 생명 가운데 두시는 하나님의 구속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를 선악의 지식 나무로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은 선악의 지식 나무를 통해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죄악 가운데서 자신의 의가 더러운 것이고 그 더러운 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와는 관계없는 의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오직 그 죄악을 통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의로 몰아가시는 심판과 은혜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성령의 날을 구약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의 날을 심판과 구원의 날로 이렇게 말씀한다.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욜 2:1-3)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버리심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대속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의 나무 열매를 받아먹어야 했던 아담의 모형으로 심판 가운데 있는 죄인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신 차원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부활로 하늘의 생명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언약에 의해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을 보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십자가를 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선악의 지식 나무를 취하듯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 16:7-11)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죄인들이 아는 죄, 의, 심판은 한낱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라는 말은 우리를 무조건 꾸짖고 야단을 치는 성령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 ‘엘렝코’라는 말로 ‘깨닫게 하신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오셔서 알게 해 주셔야만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에 대하여 제대로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19-22)
(202210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
복음을 나눌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