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8시 30분 종로 삼정목(三丁目)에 있는 단성사 앞으로 대여(大輿, 왕실의 초상을 치를 때 쓰던 큰 상여)가 지나갈 때 이선호의 선창과 중앙고보생 30~40명의 호응으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격문 1,000여 매를 뿌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니 근처에 도열한 민중일부가 이에 동조하였다. 현장에서 학생 30~40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오전 8시 25분 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 학생 50여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보성전문과 민중의 동조를 얻고 기세를 올렸다. 주동학생 이병립·이천진·박하균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는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였던 순종의 인산(因山, 왕과 왕비 등의 장례) 일을 기해 일어난 학생들의 만세운동으로 《한민족독립운동사》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이날 순종 황제의 인산을 애도하는 군중이 장안을 가득 메웠는데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봉도(奉悼, 임금이 탄 거가(車駕)를 편히 모시라고 별감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하던 일)를 위해 참여한 학생만도 약 2만 4천여 명에 이르며 시민까지 합치면 무려 30만 명에 이를 만큼 마지막 황제를 보내는 슬픔은 비통했습니다. 한편 이날 조선인의 동요에 대비하여 5천명의 일본군대와 2만여 명의 정사복 경찰을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국주의의 만행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은 학생을 주축으로 똘똘 뭉쳐 그들의 총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날 만세저항운동으로 일경에 검거된 학생 수는 서울에서만도 210명, 각 지방에까지 1,0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체포된 학생 가운데서 취조 받은 학생은 106명, 수감자는 47명에 이릅니다.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일부 학생을 방면하고 6·10학생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주동학생 이선호(李先鎬)·유면희(柳冕熙)·박두종(朴斗鍾)외 11명을 출판법위반의 혐의로 기소하여 공판에 회부합니다. 그러나 이들 6·10만세운동의 주동학생들은 공판정에서도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구호를 외치며 확고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지요. 오늘은 89년 전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장례를 계기로 국권상실과 일제에 대한 항거를 온몸으로 보여준 학생들과 민중들의 독립의지를 다시 한 번 만천하에 보여준 6ㆍ10만세운동의 날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