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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락 승천의 부르심(3:6-5:1)
Ⅰ. 새 창조(3:6-4:6)
앞 단락에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의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라고 말했다. 주님이 그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 계신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곳이 주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곳임을 나타낸다. 비록 그녀의 붙잡음이 좋지 않은 성분을 함유하고 있지만, 그곳은 여전히 주님이 가실 수 있는 곳이다. 그 뜻은,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오고 모든 것이 은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일단 자신의 헛됨을 보았으며,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배운 공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누가 알겠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가르치시므로, 우리가 배운 공과는 무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어미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한동안 고요함 가운데 머물고 '나를 잉태한 자의 방에 이르렀을' 때에, 그녀는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며, 두 번째 단락에서 배워야 할 공과를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므로, 그녀에게 능력을 주사 주님이 여기에서 그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두 번째 단락과 같은 이러한 체험이 한 번만이 아니라 아마도 여러 차례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이러한 체험을 반복하여 계속 기록하지 않는다. 비록 반복적인 실패와 반복적인 처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패이든 처리를 받는 것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분은 항상 사랑 안에서 계획하시고 은혜 안에서 부축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유사한 체험을 볼 필요가 없으며, 그녀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쇠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적극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그녀에게 전에 없었던 진보가 있음을 즉시 보게 된다. 그녀의 생명과 생활이 첫 번째 단락에서 보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3장 6절부터 11절에서 우리는 입을 열어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자가 말하는 것도 아니며, 제삼자가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한 방관자(傍觀者)의 입을 빌어 이 여자에 대한 그분 자신의 관찰을 표현하며, 이 여자가 앞 단락의 다루심을 거친 후에 어떠한가를 나타내고, 그녀의 어미 집에서 배운 것과 여러 차례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낸다(3장 4절까지의 이 단락은 그녀의 역사를 포함한 것으로, 어미의 집에서 아주 고요한 가운데 배운 체험이다).
A. 완전한 연합(3:6-11)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6절에서 우리는 그녀가 조금씩 광야(거친 들-방랑을 뜻함)의 생활을 벗어나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광야는 방랑하는 장소이다. 그녀는 이제 광야로부터 조금씩조금씩 올라오는데, 한 발 한 발 광야의 생활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 성경에서 방랑하는 광야는 모두 애굽에 인접한 남방에 있고, 가나안은 북쪽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올라온다'는 단어를 사용했다(남방으로부터 올라와 애굽을 떠났음). 이것은 단 번에 된 일이 아니고, 한 발씩 한 발씩 진보하고 조금씩조금씩 표류하는 생활에서 벗어남으로 모든 세상의 영향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믿는 이에게 주신 기업에 이르는 것이다. 그녀는 어미의 집에서 이미 광야의 노정으로 들어갔다(그녀가 광야에서 한 체험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겪은 것임). 이제 그녀는 하늘에 속한 생활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녀는 무엇과 같은가? "연기 기둥과도 같고". '연기 기둥'은 불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욜 2:30). '연기 기둥'은 성령의 능력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사도행전 2장 3절과 4절에서 성령의 강림은 이와 같이 나타났다). 연기는 원래 흩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서 연기 기둥으로서 요동치 않는 것을 본다. 그녀는 광야로부터 올라왔는데, 마치 기둥과 같은 연기였다. 이것은 그녀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음을 말한다. 비록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여기에서는 뜻밖에도 그녀가 기둥이 되었다. '기둥'은 안전하고 확실하며 안정된 것이다(계시록 3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은 나갈 수 없음을 나타낸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말한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향기롭게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주관적인 방면에서 십자가의 체험을 가졌다. 이것은 그녀에게 빌립보서 3장 10절의 체험이 있다는 것이다.
'향기롭게 한다'는 것은 먼저 들이마시고 나중에 향기를 내뿜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먼저 안에서 체험하고 난 후에 다시 발하는 것이다.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입고, 다른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유향'은 향기를 강조한다(몰약은 죽음을 가리키고, 유향은 당연히 부활을 가리킨다). 유향은 주님의 생활을 가리키는데, 특히 주님의 기도 생활 즉 그리스도의 미덕, 하나님이 향기로 보시는 그것을 가리킨다. 매우 기묘한 것은, 주님은 먼저 사시고 나중에 죽으셨으며, 우리는 먼저 주님의 죽음을 갖고 나중에 주님이 땅에서 사신 것 같은 그런 생활을 갖는다(먼저는 몰약이고 나중이 유향이다).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의 '장사'는 여기서 단수인데, 마태복음 13장 44절과 연결하며 볼 때,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몰약과 유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 즉 그분이 그녀에게 팔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분은 상인으로서 값없이 줄 수 없으므로 그녀는 대가를 지불하여 얻어야 한다(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주님은 사시고, 여기서는 주님이 파신다). 그녀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는다. '향품'은 마치 몰약과 유향을 보충하는 것 같다.
7절과 8절에서, 7절의 '연'은 '침상'으로 번역할 수 있고, 8절의 '두려움'은 '경고'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의 대답은 아주 기이하다. 6절의 질문은 여자가 어떠한가를 묻는 것이고, 여기의 대답은 왕이 어떠하다고 답변하는 것이다.
이 '침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솔로몬의 승리를 가리킨다. 침상은 밤에, 즉 흑암이 권세를 잡았을 때에 쓰는 물건이다. 흑암이 권세 잡았을 때에는 안식할 수 없지만, 솔로몬은 여전히 그의 침상에 있을 수 있다. 밤에 결코 경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침상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승리를 말하며, 그가 흑암의 권세를 이겼음을 말한다.
침상의 주위에는 육십 인의 용사가 있는데, 각기 허리에 칼을 찼다. 칼이 그들의 허리에 있고, 그들 모두가 전쟁에 능하며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중의 용사이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솔로몬의 침상은 야간의 경고에 잘 대처하도록 예비되었음을 뜻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대처할 방법이 있고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수가 솔로몬을 요동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승리의 안식 안에서 이러한 용사는 솔로몬의 능력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솔로몬에게 모든 대적을 처리할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그에게 여전히 침상이 있는 것은 그의 승리가 충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질문은 여인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고, 답변은 솔로몬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으로 여인과 솔로몬의 연합을 나타낸다. 솔로몬의 것이 그녀의 것인데, 이것이 연합이다. 이것은 이 여인의 어떠함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함께 연합된 것으로, 우리가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어떻게 누리는지를 말해 준다. 그리고 오늘날 여전히 많은 천사가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쟁을 위해 언제든지 잘 예비되어 있다(승리는 이미 있고, 그들은 승리를 유지한다. 그분은 이미 왕이 되었으며, 이제는 그분의 승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9절과 10절은 대답의 두 번째 부분이다(7절의 '보라'(원문 참조)는 9절부터 10절까지를 포함한다). 침상은 그분이 밤에 쓰는 것이다. 연(輦 : 일인승 가마)은 그분이 낮에 쓰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그분의 안식을 말한다면, 연은 분명히 그분의 여행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그분의 안식하시는 거처를 말한다면, 연은 틀림없이 그분의 교통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침상이 원수에 대한 것이라면, 연은 틀림없이 친구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일인승 가마이지 결코 차가 아니다. 만일 차라면 바퀴의 능력을 사용하지만, 가마는 사람이 들어야 한다. 우리가 언약궤의 역사를 상기해 보면, 언약궤는 달구지를 사용해 운반할 수 없고 고핫의 자손이 메었는데(민 4:15),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서 행동하시는 것은 그분께 속한 사람을 통하여 그분이 운반되어지시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가마는 레바논 나무(당연히 백향목임)로 만들어졌다. 나무는 인성을 가리킨다. 레바논 나무는 고귀한 품격의 인성을 가리킨다.
"그 기둥은 은이요". 이것 역시 그분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방면에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분을 사람 앞에 가져올 수 있다. 주관적인 방면에서는 십자가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육체에 대한 여지가 없을 때까지 역사해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를 표현해 낼 수 있다.
"바닥은 금이요".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신성한 생명, 즉 우리가 십자가와 완전히 연합할 때 비로소 온전히 얻게 되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유일한 근거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 이외에 다른 지위가 없다.
"자리는 자색담이라". 그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권위를 얻으셔야 한다. 모든 권위는 반드시 그분의 어깨 위에 있어야 한다. 그분은 반드시 왕의 지위를 얻고 그곳에 앉아 왕이 되셔야 한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발 아래 깔린 것이 연의 바닥 위에 깔린 것이다. 그 뜻은 모든 성도들이 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방금 한 질문은 "광야(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였다. 그러나 대답은 또다시 "솔로몬의 연 …"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믿는 이와 주님과의 연합을 말한다. 앞의 대답은 솔로몬의 원수 앞에서의 문제를 말한 것이고 이제는 솔로몬의 친구 앞에서의 문제를 말한 것이다. 앞에서는 솔로몬의 능력을 말했고, 이제는 솔로몬의 영광을 말한다. 앞 단락은 솔로몬의 능력이 여자의 능력임을 보여 주고, 이 단락은 솔로몬의 영광이 여자의 영광임을 보여 준다.
연, 기둥, 연의 바닥, 자리, 사랑은 모두 솔로몬의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다 그녀의 것이다. 그럴 뿐 아니라 그 안의 솔로몬도 그녀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녀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이것은 큰 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마디 말은 우리에게 이 여인과 솔로몬이 얼마나 하나 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이렇기 때문에 물을 때에는 여자의 어떠함을 물었는데. 대답할 때에는 오히려 왕의 어떠함에 대해 대답한 것이다.
3장 11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당한 사랑의 관계가 발생한다. 시작할 때에는 친구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약혼을 했다. 3장 11절의 '혼인'은 '약혼'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시온의 여자들아'는 아마도 이기는 자를 대표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의 체험에 동정을 표할 수 있다. 여기의 '면류관'은 결코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며, 천년 왕국 안의 면류관도 아니다. 이 면류관은 결코 권위(왕 노릇)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 면류관은 솔로몬의 많은 면류관 중에 그의 어머니가 더해 준 것이다. 이 면류관은 그의 혼인을 위하여 그에게 준 것으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안에 두 종류의 면류관이 있는데, (1) 영광의 권위를 대표한다. (2) 즐거움을 대표한다(살전 2:19). 여기의 솔로몬의 면류관은 두 번째인 즐거움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면류관은 그가 장가들려고 하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왕이 이 여자를 얻는 것은 마치 면류관 하나를 더 얻는 것같이 그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다. 그 뜻은 오늘 이후로 그는 이 여자를 마치 귀한 면류관처럼 여기고, 그는 그녀로 말미암아 자랑하며, 그녀는 그에게 영광을 더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다른 해석이 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것을 얻기는 어렵다. 다 일리는 있으나 영적인 노선과 연결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견해에서 비교해 본다면, 인류를 가리켜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그분의 육신의 어머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 가운데서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여기서부터 이 여자와 왕의 혼인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혼인의 사랑과 즐거움은 완전한 연합 이후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과의 혼인의 누림은 주님과 체험적으로 연합된 후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제삼자의 말은 여기에 이르러서 그친다.
B. 새 창조의 아름다움(4:1-5)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앞서 이렇게 많은 체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왕은 이전에 말한 한 마디를 다시 한다. "보라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원문 참조). 이제 왕은 아주 안심하고 그녀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3장 6절부터 11절의 체험을 갖고 그녀와 왕의 완전한 연합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칭찬을 자기를 위해 보류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분은 이제 아주 온당하게 그녀를 칭찬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이 단락에서 칭찬하는 말은 모두 일곱 가지이다. 이러한 칭찬의 말들은 사람이 주님과 완전히 연합된 후에, 또 십자가가 무엇이며 부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후에, 그녀에게 외면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표현임을 나타낸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칭찬의 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가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준다.
(1) 비둘기의 눈 - 영적인 안목을 나타냄
사람이 영적인 진보를 위해 필요로 하는 첫 번째 것은 영에 속한 안목, 즉 영적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다. 비둘기는 전일하며 동시에 영에 속한 견해를 갖고 있는데, 이는 성령이 비둘기 같기 때문이다. 눈이 매우 단일하며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매우 큰 한 가지 위험은 우리의 영적인 안목에 수건이 없다는 것이다. 수건은 가리는 것이다. '너울(수건) 속에 있는'이 뜻하는 것은 당신이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고 영적인 일을 볼 수는 있으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모든 것을 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비둘기의 눈을 가졌을지 모르나 수건은 부족할 수도 있다(모든 본 것들을 가볍게 말해 내기가 매우 쉽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너울 속의 눈은 보통 사람이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뜻은, 당신의 눈이 세상을 향해 가려져 있으므로 그들은 당신에게 영적인 안목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과 같게 여긴다는 것이다. 믿는 이의 어리석음과 실수는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본 것을 마구 세상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만일 영적인 안목이 없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성령의 능력과 역사도 반드시 매우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얻은 성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얻는 비둘기의 눈도 반드시 많게 된다. 결단코 비둘기 그 자체와 당신이 무관할 수 없으며 당신은 비둘기의 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실된 빛 비춤은 모두 성령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많은 때에 이 빛 비춤은 세상 사람 앞에서는 가려져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이 여자의 첫 번째 아름다움이다. 나는 우리가 영적인 안목은 모두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주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적인 안목조차도 그분이 칭찬하시는 것이다.
(2) 머리카락 - 헌신과 순복을 나타냄
성경에서 머리카락은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삼손의 몸에 있는 머리카락은 그의 헌신을 가리키며,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남겨 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능력이 있었다(삿 16:17).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헌신이 사람 가운데서의 우리의 능력이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이 얼마나 많고 완전하며 깨끗한가가 바로 사람 가운데서 나타나는 우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 준다. 거룩하게 분별하여 헌신하는 것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다. 성경에서 머리카락이 갖고 있는 또 한 가지 의미는 자신을 가리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과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모두 이러한 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순종의 위치에 서서 어떻게 인간적이고 천연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감추고 하나님으로 표현되시게 하는가를 배운다는 뜻이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염소는 대부분 흰색이다. 길르앗산 기슭은 염소가 많은 곳으로 풀이 매우 풍성한 곳이다(렘 50:19, 미 7:14). 염소는 성경에서 특별히 속죄제로 사용됐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르앗산 기슭에 있는 한 무리의 염소처럼 그렇게 많았다. 이것은 상징이다. 그 뜻은, 그녀가 배불리 먹은 것은 제물이 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당신의 헌신과 순복은 어느 곳에서 나타나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먹이심을 받고 하나님의 양식을 얻는 것은 모두 헌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순복이다.
(3) 이(치아) - 받아들이는 능력을 나타냄
이는 음식을 씹는 도구이다. 여기에서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을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그분은 일찍이 우리를 위해 다양한 양식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양식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받아들이는 능력은 결코 어린아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이는 이것이 우의(寓意)적인 것으로 성장한 자만이 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왜 양 무리를 말하는가? 양 무리는 반드시 풀을 먹는다. 당신 안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어떤 것이 있어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양털'은 성경에서 육체에 속한 생명 혹은 육체에 속한 열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양털 옷은 입을 수 없다(겔 44:17). 성경에서 흰 세마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이미 그의 천연적인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그녀의 이가 털 깎인 한 무리의 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뜻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이 천연적인 능력의 자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님 앞에서의 추구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모든 것에서 혈기의 열심을 의지할 수 없다. 자기의 노력을 사용하고 자기를 따를 때, 이것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이(齒)가 아니다. 방금 털을 깎고 목욕을 한 양은 아주 깨끗하고 단정하다. 여기의 목욕은 그녀의 추구하는 목적이 깨끗게 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그 뜻은 단정하다는 것이다. 즉 받아들이는 능력이 일률적이며,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영적인 일에는 믿음이 있고 물질적인 일에는 믿음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일은 받아들일 수 없고 물질적인 일에서는 믿음이 없다면, 쌍태를 낳은 것이 아니라 새끼를 잃은 것이다. 쌍태를 낳고 새끼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완전한 받아들임이다. 천연적인 이는 모두 한 쌍이다. 그녀의 이가 모두 각각 쌍태인 것은 그녀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조금도 가지런하지 못함이 없다는 것이다.
(4) 입술 - 표현을 의미함
만일 이가 받아들임을 위한 것이라면, 입술은 반드시 표현을 위한 것이다. 만일 이가 양식을 위한 것이라면, 입술은 틀림없이 이미 소화한 것을 표현해 내기 위한 것이다. 새 창조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안목과 헌신과 받아들임을 주의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말함도 주의하신다.
'홍색실'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구속을 가리킨다는 것이며(수 2:21), 또 하나는 권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마 27:28-29). 한 면으로는 입술이 정결케 함을 받았다는 표시이고(사 6:6-7), 또 한 면으로는 모든 표현이 다 왕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으로, 입술이 왕의 권위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시편 12편 4절의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와 같지 않다. 반드시 구속을 통과한 입술이어야 하고, 자신을 주님의 권위 아래 복종시키고 자기의 뜻대로 말하지 않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말이 있을 수 있다(4장 3절의 두 번째 구의 '입'은 원문에서 '말'로 되어 있고, 이가 입술 앞에 서술된 것은, 만일 먹는 것이 틀리면 말해 내는 것도 반드시 틀리다는 것을 가리킨다).
(5) 두 태양 - 외면적인 아름다움
'두 태양'은 '두 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뺨은 사람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곳이다. 우리의 모든 외면적인 표현은(즉 희로애락 등)다 뺨에서 나타난다.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이 석류는 하나 전체가 아니고 이미 쪼개진 것이다. 성경에서 석류는 생명의 충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것의 알맹이는 너무 많고 모든 알맹이가 달콤한 즙과 붉은색으로 충만하며 또 달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의 이러한 외면적인 아름다움이 그가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된 데에서 옴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세상의 눈에는 가려져야 하는데, 이것이 너울 속이 의미하는 바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도 좋은 명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은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이지 나타남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타나야 하는 곳은 오직 주님 앞이다. 휘장 안에서 문을 닫는 이것은 믿는 이의 생활의 영원한 원칙이다.
(6) 목 - 의지의 굴복을 나타냄
목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낸다. 사람이 지나치게 자기의 뜻대로 행하고 너무 강퍅하고 교만할 때 성경은 '목이 곧다'라고 말한다(사 3:16, 원문 참조). 그러므로 여기의 목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지가 굴복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가 굴복되는 것을 그 사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여기서 두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의 굴복된 의지가 어떠한가를 나타낸다. 첫 번째는 "네 목은 … 망대 같고"이다. 망대의 첫 번째 뜻은 곱사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이 곧지 않은 사람은 곱사등이이다. 성경에서 곱사등이는 사탄의 압제를 받아 눈이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눅 13:11, 16). 목이 망대 같다는 것은 그녀가 이미 해방받았고, 사탄의 묶임이 없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망대의 두 번째 뜻은 견고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의지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견고한 단계에 이르렀고, 세상도 사랑하지 않으며, 사탄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다윗의 망대 같고"이다. 이 망대는 보통 망대가 아닌 다윗의 망대 같다. 이 망대가 다윗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 여자의 의지는 견고하고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의지가 완전히 다윗에게 순종하는 경지까지 인도된 것이다. 그녀의 견고함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 있고, 그녀의 해방도 그녀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두 의지가 그리스도에 의해 빼앗긴 바 되는 것의 중요함을 안다.
이 망대의 용도는 무엇인가? 군기(軍器)를 모아 두기 위한 것이다. 모든 영적 전쟁은 의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안에 모아 둔 군기(軍器)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방면으로 믿는 이의 의지를 보호하여 대적에 의해 탈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주로 군기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기서 언급한 것이 방패와 등패(藤牌)임을 본다. 우리는 방패와 등패가 모두 방어를 위한 것임을 알 것이다. '일천'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음을 말해 주며 '용사'는 충분히 강함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뜻은 그녀가 다윗의 뜻에 기꺼이 완전하게 굴복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윗의 뜻을 준행하는 데 있어서 견고하기가 망대와 같다. 그녀는 엄밀하게 방어벽을 쳐서 대적으로 그녀의 이러한 굴복하는 의지를 탈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7) 두 유방 - 우리의 감정의 장소를 나타냄
'두 유방'은 '양 가슴'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의 거룩한 감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님을 두 팔로 껴안는다. 우리도 여기에서 주님의 친근하심을 느낀다. 우리도 여기서 그분으로 우리를 친근케 한다. 믿음과 사랑은 우리와 주님이 연합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사랑과 믿음이 합해지는 것으로 한 사람의 몸에는 양 가슴이 있다).
'노루'는 두려움과 겁이 많고, 부끄러워하며 쉽게 놀라며, 감각이 예민하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지키는 거룩한 정감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며, 느낌이 충만한 것으로 우리가 조심하여 지켜야하며, 마구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소홀히 하면 아주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어떠한 모양의 노루인가?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이 한 쌍의 노루는 한 어미가 낳은 것으로 크기가 같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 같이 자라야 함을 의미한다. 믿음이 크고 사랑이 작거나 사랑이 크고 믿음이 작으면 주님으로부터 아름답다는 칭찬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자를 주님은 아름답다고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에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중요함을 본다(갈 5:6, 딤전 1:5, 14, 몬 5). 영적인 실제의 방면에서는 사랑이 크고 믿음이 작거나 혹은 믿음이 크고 사랑이 작을 가능성이 없다. 크면 크고 작으면 작고,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데 이는 양 가슴이 한 쌍의 노루요 한 어미의 쌍태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노루는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다"(원문에는 '먹는다'는 단어만 있지 '꼴'이라는 단어는 없다). 믿음과 사랑은 그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생명의 성질(性質)이 서로 조화되는 환경 안에서 양육을 얻고 자랄 수 있다는 뜻이다. '백합화'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돌봄과 약속과 청결함을 뜻하며, 믿음과 사랑이 이러한 환경 안에서야 비로소 양육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백합화는 가시 가운데에도 있을 수 있으나 믿음과 사랑은 세상(가시) 가운데서 발아(發芽)할 수 없다. '백합화'는 하늘에 속한 경계를 뜻한다.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속한 경계 안에 산다. '백합화'는 하나님이 주신 청결함인데, 이것은 부끄러움 없는 양심을 뜻한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믿음과 사랑이 새어나가 버린다. 믿음과 사랑은 오직 깨끗한 양심 안에서만 자랄 수 있다.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 …"은 주님이 양육하시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아 2:16). 믿음과 사랑이 자라려면 주님이 양육하시는 곳에 있어야 한다.
C. 여인의 더 깊은 추구(4: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3장 6절부터 11절은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을 보여 준다. 4장 1절부터 5절은 우리에게 연합이 산출한 것, 즉 주님으로 만족을 얻으시게 하고, 주님으로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실 수 있게 하는 것을 알려 준다. 첫 번째 큰 단락에서는(1:2-2:7) 대부분의 여자가 왕을 찬미하는 것이고, 왕이 여자를 칭찬하는 말은 아주 간단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여인은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아직 깊은 체험을 하기 전에, 또 주님의 깊은 처리를 받기 전에는 항상 자기의 영적 상태나 자기의 진보나 자기가 얻은 것과 같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동시에 그녀는 주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허락하심이나 주님이 어떻게 그녀의 기도를 들어 주셨는가와 같은 그녀와 주님과의 교통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자신과 주님 사이의 일을 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결코 삼층천의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매번 십사 년이 지난 후에 말할 수가 없다. 그녀가 주님의 처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언어는 그녀 자신의 천박함을 드러낸다. 그녀가 광야를 거쳐 나온 후에야 우리는 그녀의 말이 많이 없어진 것을 본다. 그러므로 3장 6절부터 11절은 제삼자가 말하는 것이고, 4장 1절부터 5절은 왕이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체험과 그녀와 왕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그녀는 이제 이미 충분한 분량에 이르렀으므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녀는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들을 수도 있다. 사실상 오직 말하지 않는 사람만 들을 수 있다. 그녀는 십자가를 거쳤으므로,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느낌을 통제하는가를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와 성령 안의 제약은 주님의 칭찬을 들으나 격동되지 않을 수 있고, 주님의 칭찬을 들으나 교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자신이 약하다는 느낌이 그녀 안에서 일어나고, 그녀로 하여금 십자가의 더 깊은 역사가 더욱 필요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이전과 얼마나 다른지! 그러므로 우리는 제삼자가 그녀의 체험을 말한 후에 그녀가 결코 그들이 제기하지 않은 체험을 보충하여 말하지 않은 것을 본다. 왕의 칭찬 이후에도 그녀에게는 일부러 겸손한 것도, 그녀의 선함을 드러내려는 말도 없다. 그녀는 아주 안정되어 매우 간단한 한 마디 말을 할 뿐이다.
"내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으로 가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리라"(원문 참조). 그녀의 간단한 말로부터 우리는 그녀가 현재의 상황과 장래의 필요를 느꼈음을 본다. 그녀는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리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의 날이 아직도 밝지 않았고 아직도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녀는 왕의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상태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녀와 주님과의 하나가 사실이 아닌가? 그녀의 생활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인가? 성령의 관점과 그리스도의 칭찬은 우리에게, 그녀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아주 깊고 높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 준다. 그녀와 주님 사이에는 전혀 간격이 없고, 주님도 그녀의 불완전함을 찾지 못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 편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장하고 완전한 믿는 이는 주님 앞에서 조금의 그림자도 없고, 주님의 아침 빛 가운데서 전신을 목욕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은 여전히 안에 그림자가 있고 아침이 이르지 못했음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본다. 완전한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정결케 될 필요를 느낀다. 비록 그녀가 주님의 칭찬을 들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영적인 생활의 날이 아직 밝지 않았고 그림자가 아직도 지나가지 않은 것이 마치 그녀의 오늘날과 이전에 그녀가 광야에서 표류하던 때가 구분이 없는 것같이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날이 아직 밝지 않고 그림자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을 때에 나는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에 가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갈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날이 밝고 그림자가 지나가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겠다.
믿는 이에게 있어서 체험적으로 날이 밝고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야 비로소 있게 된다. 현재 그녀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에 머무는 것이다. 그녀의 말의 뜻은, 주님이 비록 나를 칭찬하시고, 성령이 비록 나와 주님이 완전히 하나라고 인정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의 약함과 패괴함과 간교함과 쓸모 없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완전함에 이르기 전에는 나는 종전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며, 주님의 영에 속한 생명을 취해야 한다. 내가 광야를 떠날 때에는 몰약으로 내 자신을 향기롭게 했지만, 이제 나는 몰약의 산으로 가야겠다. 이전에는 유향으로 내 자신을 향기롭게 했지만, 이제 나는 유향의 언덕으로 가고 싶다. 만일 몰약과 유향이 나를 향기롭게 한다면 나와 주님이 더 완전한 연합을 가질 수 있고 주님이 나를 아름답게 보실 수 있으므로, 이제 후로 나는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으로 가서 머물려고 한다. 만일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 받으심이 나로 광야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오늘 이후로 나는 십자가와 더 깊은 연합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나의 아침 빛이 나타날 때까지 기꺼이 더 큰 고난을 받고 더 깊은 죽음을 체험하기 원한다. 만일 내가 주님의 생명을 의지하여 삶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다면, 오늘 이후로 주님이 내게서 옛 창조로부터 나온 것을 하나라도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네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거절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의지하기 원한다.
내가 이전의 체험과 오늘 이후로 있을 체험을 비교한다면, 이전에 소유한 몰약과 유향은 향기 방울로 사람을 적시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 이후로 몰약과 유향은 산과 언덕과 같다. 오늘 이후로 나의 뛰어남, 나의 능력과 원대한 안목,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함, 세상에서 더욱 멀리 떠남(산과 언덕은 높음과 초월을 뜻함)은 모두 주님의 죽음과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야 한다.
Ⅱ. 승천의 부르심(4:7-15)
4장 1절에서 5절은 여자의 외면적인 표현을 말하며, 7절에서 15절은 여자와 왕의 내면적인 관계를 말한다.
A. 부르심(4:7-8)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이것은 왕이 한 말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인식은 이것이 승천을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여자가 이미 더 깊고 더 완전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본 후에, 왕은 그녀에게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전에 왕은 다만 그녀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녀가 온전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녀의 모든 흠이 다 십자가로 제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리를 받을 때 하나하나 없어진 것이다. 오늘날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하늘에 속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이요, 완전히 부활의 새로운 경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온전히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8절은 마땅히,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으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부터 사자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자꾸나"로 번역해야 한다. 두 번째 큰 단락에서 왕이 그녀에게 요구한 두 가지는, 첫째로 일어나라는 것이고, 둘째는 와서 그분과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처리를 받았을 때 그녀는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의 행동과 역사에 있어서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주님이 이미 요구하신 이상 그분은 결코 수준을 낮추려 하지 않으신다. 때로 우리가 그분의 때를 지연시킬 수 있고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그분은 결코 그분 자신의 부르심을 바꾸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처리를 거친 후 그분의 시기가 성숙될 때, 그분은 다시 "오라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주님은 그녀를 승천하라고 부르신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레바논을 떠나라는 말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레바논으로부터'라고 믿는다. '-로부터'라는 단어는 비록 '떠나다'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분명히 시(詩)적인 용법이며, 또한 의미상으로 우리는 레바논을 떠나야 한다는 어떤 이유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뒤의 문장에서 우리는 여자의 새로운 체험의 일부분인 레바논의 향기와 레바논의 흐르는 시내를 본다. 여기의 레바논은 백향목을 산출해 내는 높은 산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그것은 백향목의 고귀함을 뜻한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높은 산은 땅을 초월한 하늘에 속한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의 부르심은 승천의 부르심이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는 이에게 승천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승천의 이상이다.
믿는 이의 위치는 반드시 산꼭대기여야 한다. 비록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정하신 위치는 여전히 하늘에 속한 산꼭대기이다. 그곳에서 하늘은 매우 가까우며 또한 하늘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곳에서 땅은 매우 멀고, 땅을 떠나 있다. 여기의 세 개의 산꼭대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늘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체험도 다른 고봉(高峰)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높은 곳이 다만 한 곳이 아니며, 많은 곳에서 묶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아마나'는 진리라는 뜻이다. 많은 때 우리는 여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고,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가 실제 되시는 고봉에 거할 수 있다.
'스닐'은 부드러운 갑옷이다. 이것은 당연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군복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의 의미는 전적으로 전쟁을 위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 속한 전쟁의 안목으로 충만하여 아래의 일을 보아야 한다.
'헤르몬'은 '소멸시키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마귀의 일을 모두 멸하셨다(요일 3:8下). 우리는 많은 때에 전쟁을 주의하지 않은 채 이 승리자의 고봉으로부터 모든 세상에 속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승천의 고봉은 많고 승천의 위치도 매우 광활하여 그 안에서 우리는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장소가(1-2장) 곧 원수가 있는 곳임을 보여 준다(6장). 산꼭대기에서 걷고 산꼭대기에서 볼 때 사자 굴과 표범의 산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땅은 사자가 두루 다니는 곳이고 세상은 표범이 삼키는 곳이다. 그러나 사자의 굴은 하늘에 있고 표범의 산도 하늘에 있다. 우리가 무엇이 승천인지를 아직 체험적으로 알지 못할 때, 우리가 만난 것은 이 땅에서의 원수의 역사일 뿐이다. 우리가 승천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 우리는 원수가 계속 머무르고 있는 곳에 머무르려고 한다. 우리는 원수의 공작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원수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사자에 대하여 성경에서 주의하는 바는 포효(咆哮)이므로, 그것의 일은 위협하는 것이다. 표범에 대하여 성경이 중시하는 바는 교활하고 매서운 것이므로 그것의 일은 삼키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를 승천의 위치로 부르고 나서 결코 오늘 이후로는 무엇이든지 다 좋은 시절이고 아름다운 경치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비록 이것이 고봉(高峰)의 생활일지라도, 여기서는 사자와 표범이 이전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을 모르는 사람은 6장의 영적인 전쟁을 알지 못한다. 승천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원수의 실재와 원수의 접근을 보게 된다. 비록 이러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여기서부터 내려다보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산꼭대기는 진리요, 우리의 산꼭대기는 군복이요, 우리의 산꼭대기는 여전히 파멸을 이기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일은 오직 하늘에 속한 경계 안에서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땅에 속한 일도 하늘에 속한 안목으로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늘이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하늘로부터의 내려다봄이 없으므로 우리가 땅의 안목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다름 아닌 혼란임을 어찌 알겠는가? 땅의 가장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하늘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히 작은 일일지라도 분명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내려다봄도 사자의 굴과 표범의 산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대한 관찰에서 원수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일이 사자 표범과 어떤 관계에서 발생한 것인지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산꼭대기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원수가 이 일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땅'의 고봉으로부터 내려다보는 사람은 동시에 원수의 득실을 고려하는 관점을 반드시 겸하여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전쟁에서 첫째는 위치요, 둘째는 안목이다. 그 위치가 없으면 원수의 정체를 보지 못하고, 하늘에 속한 안목이 없으면 대적의 궤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고 전쟁을 할 줄도 모른다.
이것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부르심이다! 참으로 크고 감탄할 만한 부르심이다! 천연적으로 말한다면, 한 연약한 여자가 산에 올라가고 최고봉에 이르는 것만도 어려운 일인데, 왜 또 사자의 굴과 표범의 산에 가야만 하는가?
여자가 이 부르심을 들은 후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B. 소리 없는 대답(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나를 격려하는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나를 격려하는구나"(9절, 원문 참조). 여기서 왕은 처음으로 그녀를 신부라고 부른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마음이 왕과 완전히 일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야 비로소 왕은 그녀가 자신(왕)을 위탁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본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와 왕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서로 몫을 나누어 책임질 수 있는데, 이는 그녀의 사랑이 보통 사람 이상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또한 순결함이 혼인 관계를 갖기에 충분한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숱한 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몸에서 표현되는 것은 모두 새 창조로서 왕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부의 가장 주요한 조건은 왕이 마음껏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왕은 그녀를 아무것도 보류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데, 이는 그녀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완전히 사랑스런 상태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왕은 또한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녀와 그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게 하는 자와 거룩케 함을 받은 자가 다 하나에서 났기 때문이다(히 2:11). 아브라함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이고, 이삭의 아내도 그의 본가의 자매였으며, 후에 야곱과 에서는 각각 다른데, 한 사람은 이방 여자를, 한 사람은 어머니 집의 자매를 아내로 취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그분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한 분 아버지로부터 나온 사람이다.
"네가 나를 격려하는구나". 네가 나를 격려해 너를 사랑게 하고 친근케 하며, 또 나를 격려해 너에 대해 만족케 하며 너를 이끌고 전진케 하는구나. 너는 나의 요구에 응답함으로 또한 나를 격려했다. 네가 나를 격려했는데, 이는 너의 눈이 나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네 눈으로 나를 한 번 봄으로써 너는 이미 기꺼이 나를 따라 함께 가겠다는 표시를 했다.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는 항상 눈으로 말하는 것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다. 일찍이 주님 자신도 한 번은 베드로에게 눈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눅 22:61) 외인들은 눈으로 하는 말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사랑은 눈의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다. 네 눈으로 나에게 너의 뜻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또한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도 나에게 너의 응답을 보여 준다. 목의 구슬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을 나타낸다(잠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하나님께 대한 성령의 가르침에 순복하는 것과 성령이 네 몸에서 네게 이룬 도덕적 성취로 말미암아 나를 격려하였으며 나로 너를 사랑하게 했고, 내가 너를 이끌어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C. 내적인 관계(4:10-15)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10절). 마치 이전에는 그분이 그녀의 사랑을 칭찬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사랑은 생겨 나오는 것으로 양 가슴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매혹시키시는 것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땅에 두시고 사람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도록 요청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신다. 이제 사람이 그리스도께 매혹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그 요청에 응답한 것과 같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해 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의 사랑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낸 사랑에 대한 사람의 응답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답례와 같다.
이 사랑은 믿는 이가 계속적인 헌신을 하고 계속적인 처리를 받은 후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완전하게 나타난다. 어느 날 주님이 참으로 그분의 믿는 이가 체험상으로 땅의 일을 생각지 않고 완전히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야, 그분은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1장 2절에서 여자가 왕의 사랑을 찬미할 때에는 단지 그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왕이 여자를 칭찬할 때, 그분은 그녀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이가 주님의 사랑을 감상하는 것은 주님이 믿는 이들의 사랑을 감상하는 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주님의 사랑이 귀하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키는지를 느끼실 수 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안다.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삼상 20:41下). 다윗으로 상징되는 우리 주님의 사랑은 이같이 뛰어난 것이며, 우리의 주님은 모든 일에서 으뜸의 위치에 거하신다.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서조차도 항상 으뜸의 위치에 거하신다.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이제 이 여자도 왕의 기름을 갖고 있다. 왕은 성령의 기름 바름을 얻었고 이 여자도 성령의 기름바름을 얻었다.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은 옷깃에까지 흘러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는 것은 기름이 아니고 기름의 향기이다. 그 뜻은 성령의 기름 바름의 효능을 얻었다는 것이다. 향기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코로 냄새 맡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향기이다. 우리는 도대체 향기가 무엇인지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좋은 믿는 이에게서 당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러나 결코 그에게서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곧 그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당신에게 주는 일종의 특별한 영적 느낌을 발견한다. 당신은 이 느낌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말하기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향기이다. 이것은 성령께 순복하는 생명이 내는 결과로서 이 향기는 세상 사람이 소유한 어떤 미덕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많은 때에 우리는 믿지 않는 이가 어떤 점에 있어서 믿는 이보다 더 낫다거나 혹은 한 믿는 이가 천연적으로 어떤 장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성령을 따르는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과는 영원히 비교할 수 없다.
11절의 '향기(香氣)'는 마땅히 '향미(香味)'로 번역해야 하며, 위의 향기와는 다르다. 이 세상의 모든 향품과 천연적인 향품 가운데에는 여자에게 있는 기름의 향기와 견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그녀의 입술로 꿀 방울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다. 꿀은 달콤한 것으로 쇠약한 사람을 충분히 소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달콤함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의 채집과 내적인 노동과 신중한 보관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결코 한담이나 웃기는 말이나 경솔한 말이 아니라 달콤하며 사람을 소생시키는 말이다. 그녀의 말은 결코 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같지 않고 벌집에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꿀과 같았다. 이것은 일종의 가장 느리게 떨어지는 방울이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해야 할 말을 계곡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영적인 일에 관계된 것이나, 그들의 이같이 말하는 방식은 그들이 더 깊은 은혜의 역사를 통과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그녀의 입술에서 얼마나 천천히 달콤한 꿀이 떨어지는가를 주의할 뿐 아니라 그녀 안에 보관된 것이 무엇인지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라고 말한다. 혀 위는 사람이 음식을 삼키는 곳이고 혀 아래는 사람이 음식을 저장하는 곳이다. 이 뜻은 그녀 안에 이러한 것들이 저장되어 있고 이러한 것들이 매우 풍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식량이 유여함을 보여 준다. 꿀은 연약한 사람의 소생을 위한 것이고, 젖은 어린아이를 먹이기 위한 것이다. 그녀 안에는 이러한 풍성이 저장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혀 아래의 음식을 언제든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토로(吐露)하지는 않는데, 그녀는 안에 얼마만큼 있으면 밖으로 얼마만큼을 내놓는 그런 사람과 같지 않다. 꿀과 젖이 여전히 혀 밑에 있으며, 전부가 그녀의 입술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복'은 모든 외면적인 태도, 행위, 동작, 교제, 오락, 예의와 기타 바깥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왜냐하면 의복은 사람의 몸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하는 곳이 레바논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록 세상에서 행하지만 그녀의 의복에 레바논 향기가 배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그녀의 외면에서 무의식중에 세상보다 높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2절에서 '동산'은 마땅히 '화원(花園)'으로 번역해야 한다(4장 12절의 '화원', 13절의 '과수원', 16절의 두 개의 '동산', 5장 1절의 '동산'은 모두 복수이다. 4장 15절의 '동산'과 '물'은 모두 복수이다). 성경에서 화원에 대한 사상은 하나님의 최초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즉시로 화원을 세우신 것을 본다. 화원은 일반적인 재배를 위한 땅과 같지 않으며, 밭같이 특별한 경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전일(專一)하게 아름다움을 위한 곳이요 누림을 위한 것이다. 그 안에 나무가 있지만 결코 목재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과일나무가 있지만, 그 목적은 여전히 실과를 얻는 데 있지 않다. 그곳의 중점은 화초에 있다. 화초에서 얻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화초를 심는 것은 기쁨을 인해서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 여자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를 만족시키는 위치에 도달했는가를 본다. 이제 그녀는 그녀의 존재가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일반적인 화원이 아니라 잠긴 화원으로서 그곳의 우물과 샘조차도 잠겨져 있고 봉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녀가 전일하게 그녀의 사랑하는 자의 기쁨만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화원이지만 결코 공원은 아니다. 그녀는 잠긴 화원이므로 그 안의 모든 아름다움은 뭇 사람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소유한 모든 것은 사랑하는 자의 기쁨을 위한 것일 뿐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 민수기 19장 15절에서는 장막 안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무릇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니라"고 말한다. 뚜껑이 열려 있는 그릇이 의미하는 바는 공개적이고, 어떤 영향도 다 받으며, 전일하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 없고, 무엇이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의 믿는 이가 조금 더 닫고 조금 더 덮는다면, 우리의 사역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잠겼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전일하다는 것이다. 우물이든 샘이든 다 여러 외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3절과 14절은 마땅히 "네 싹은(복수) 석류의 과수원 같아 귀한 각종 실과와 봉선화와 나도나무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桂樹)가 있으며 또한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 있더라"로 번역해야 한다. 이 동산은 비록 화원이지만 결코 실과가 부족하지 않다.
'네 싹'. 주님은 성경에서 몇 차례 그녀를 싹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고 사망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이다(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과 같다). 그녀의 이러한 생명의 능력은 석류 과수원과 같다. 석류는 실과가 매우 많음을 뜻한다. 이것은 이 여자가 부활 능력으로 충만하고 부활의 실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또한 앞 문장에서 우리는 그녀의 두 뺨을 석류에 비유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석류의 용도가 실과로서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한 것임도 안다. 이곳은 석류 과수원인데, 이 화원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열매 맺음도 있다는 말이다. 이 화원에는 한 가지 실과만이 아니라 각양 각색의 귀한 실과가 있다.
그 다음의 화초는 중점이 색깔에 있지 않으면 향기에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모든 유향목과 향품을 말했는데 이것들은 한 믿는 이가 그리스도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후 9:8, 골 1:9-11). (전반부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를 가리키고 후반부의 향기와 화초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킨다).
"너는 레바논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라"(15절, 다른 번역).
우물과 샘은 모두 화원의 관개(灌漑)를 위한 것으로, 화초와 수목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물은 생수의 저장을 나타내며, 샘은 생수의 흐름을 나타낸다. "우물이 깊다"(요 4:11)는 것은 그 저장의 역량을 나타내며, 샘은 생동적으로 계속 흐르는 것이다. 우물과 샘은 모두 화원 안에 있다. 에덴 동산에는 네 줄기의 강이 있었는데, 모두 동산을 적시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한 줄기의 강이 있으며, 새 예루살렘은 한 동산으로 된 성으로서 물은 모두 화원의 관개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은 화원을 더 좋고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결코 화원 고유의 것이 아니라 레바논 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이 없으면 성령의 강림도 없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 16:7). 오늘날 모든 영적인 관개(灌漑)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는 데에서 비롯된다.
Ⅲ. 사랑의 생활(4:16-5:1)
A. 신부의 반응(4: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앞 단락은 새 창조의 아름다움(1-5절)과 여자의 더 깊은 결심(6절)과 승천의 위치에 있는 여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며, 왕이 그녀에 대하여 어떻게 만족하고, 그녀와 왕 자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만족스러운 지를 말한다.
16절에서 그녀의 반응에는 두 방면이 있다. '북풍'은 차갑고, 매섭고, 살을 에는 듯하며, 뼛속 깊이 들어온다. '남풍'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사람을 상쾌하게 한다. 여자는 왕이 그녀를 하나의 화원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며, 또한 성령이 그녀 안에 많은 열매와 많은 은혜를 주었다는 것도 안다. 이제 그녀는 결코 환경이 순조롭기만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능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수 있도록 잘 준비되었다. 그녀는, 모든 문제가 내적인 것이지 결코 밖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일 안에 있는 것이 향기라면 바깥 환경이 남풍이든 북풍이든 다 그 향기를 날리게 할 뿐임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이러한 수준에 달했다. 그녀는 이미 환경 안에서 살지 않고 오히려 어떤 환경에서든지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녀는 만일 안에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다면, 밖의 것은 그녀의 뜻에 따라 환경이 안배될 수 있음을 안다. 그녀는 이미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여기 이 부르짖음은 그녀의 순복의 표시이며 또한 믿음의 표시이다. 남풍과 북풍은 성령이 믿는 이를 훈련하기 위해 안배하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환경이다. 그녀는 자신을 성령의 훈련에 맡겼다. 비록 남풍은 사랑스럽고 북풍은 무섭지만 하늘에 사는 사람에게 이것들은 결코 두 가지의 다른 모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어떠한 환경이든지(환경은 성령의 지배를 받음) 그녀로 하여금 성령의 은혜를 나타내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깊은 곳에서 안다. 그녀는 여기서 특별히 환경 가운데 온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앙망한다.
그녀는 성령에게 표시할 뿐만 아니라 종전과 같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미 그녀 안에 많은 향기로운 꽃이 심겨진 이상 성령이 바람을 불게 하여 이러한 꽃들의 향기를 날려야 한다는 태도이다. 나의 주님이 이왕 나를 그분의 화원으로 삼아 은혜를 주셨으니 나로 하여금 성장하게 하여 과실을 맺어 그분으로 이 화원에 와서 여기서 산출된 과실을 누리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녀의 첫마디는 '나의 동산'이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다음 구절에서 '그의 동산'이라고 말한다. 나의 동산이 곧 그의 동산이다. 모든 것은 다 그분을 위한 것이므로 실과도 그분을 위한 것이다. 원래 성령의 열매는 결코 성도의 장식품이 아니며, 믿는 이의 자랑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비록 믿는 이의 몸에서 열린 것이지만, 오히려 주님의 누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이렇게 조건 없이 주님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다시 주님께 드린다.
B. 주님의 대답(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5:1). 이 동산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이 구절의 말로 볼 때 주님은 항상 그분의 동산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요청을 해야만 비로소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번의 헌신이 비록 우리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지만, 계속적인 헌신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주님으로 그분의 동산에 들어가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만족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이 사실을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해야 하며, 반복해서 주님께 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주님이 그분의 동산에 들어와 계시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매번의 헌신을 다 받아들이신다. 여자가 한 번 요청하면 주님은 곧 대답하신다. 내 말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응답받기 쉬운 기도일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이 다 그분께 속했다고 여기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적어도 여덟 번이나 '나의'- 나의 몰약과 향료 … 나의 꿀송이와 꿀 … 나의 포도주와 젖 …'-라는 말을 하신다. 그분은 악한 사람의 금전과 창기가 번 돈 외에는 모두 받으신다(신 23:18). 여기의 뜻은 다름아닌 누림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주님은 참으로 그분의 지위를 얻으셨는데, 이것은 첫 번째 단락에서는 얻으실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분은 비로소 얻으셨으며, 자신의 수고의 결과를 얻고 보신다.
우리는 여기의 헌신, 여기의 받아들임이 일반적인 헌신, 일반적인 받아들임과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전의 헌신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넘기고 완전히 그분께 드려 그분으로 우리 몸에서 어떤 것을 행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의 헌신은 주님이 어떤 것을 행하신 후이며, 결코 주님의 손에서 어떤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역사로 가득하며, 따라서 이 기쁨과 결과와 영광은 마땅히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열매와 향기의 헌신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의 받아들임도 이와 같다. 이전의 받아들임은 주님이 기회를 잡아 시간을 들여 씨를 뿌리기 위함이었으나, 현재의 받아들임은 씨를 뿌리기 위함이 결코 아닌데, 이는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완전히 누림을 위한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마치 황무지 같이 개간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것을 주님의 손에 드려 주님으로 역사하시게 하여 아름다운 화원으로 개간케 했다. 현재의 문제는 이 화원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있다. 체험이 있는 믿는 이는 나중의 헌신이 처음보다 더 어렵지만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헌신만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수고의 결실을 얻게 한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먹으라 마시고 많이 마시라". 여기의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님은 지금 구주와 주의 자격으로 여기서 화원의 모든 것을 누리고 계시므로, 친구와 사랑하는 자는 틀림없이 여기서 함께 누리고 계시는 삼일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만일 죄인을 가리킨다면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일 믿는 이라면 헌신한 자신은 아닐 것이고, 헌신한 사람의 친구들일 것인데, 여기서는 주님의 완전한 누림을 말하므로 믿는 이는 그 안에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