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란 무엇인가
1) 수필은 어디에 있는가
수필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생활 곁에 있다. 고독과 그리움 곁에, 기쁨과 슬픔과 눈물 곁에 있다. 이렇게 삶과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문학이 수필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라고 어느 학자는 말했다.
그러나 그 수필을 찾아내고자 하는 강한 의욕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소재나 주제가 있어도 파묻히기 마련이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너무 잘 쓰려고 애쓰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써야 한다. 그리움에 사무치거나 외로움이 깊어 견딜 수 없을 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보고 그것을 낙서하듯 써 보는 습관도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자기가 체험한 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고 재구성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면 훌륭한 수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수필은 끝없이 구도적(求道的)인 자세를 요구한다. 긴장을 풀고 기도하는 자세에서 자신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이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수필가 정목일은 수필을 쓰려면 몇 가지를 늘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마음속에 항상 자신의 영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 두기를 바란다. 비춰보고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하고 겸허하고 절실해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마음속에 양심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종을 매달아 두기를 바란다. 불의나 탐욕의 손길이 뻗칠 때 스스로 울리는 종을. 그리고 마음속에 맑고 깊은 옹달샘을 파 두어서 거짓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낼 줄 알아야 좋은 수필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심도 있는 주문들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속에 울림 그대로를 써보면 된다. 처음에는 낙서를 해도 좋고, 단 몇 줄의 무장을 만들어도 좋다.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수필과의 만남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삶의 기록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등식에 대입을 시켜보아야 한다.
「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 의미부여 = 감동 」
인간은 우주의 정(情)을 얻어 태어난 존재라 해도 될 것이다. 이 정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때로는 감동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형을 얻지 못한 자연을 보면 그늘이 보인다.
봄에는 새가 울부짖고, 여름에는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울부짖는다. 가을에는 풀벌레가 울부짖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이 지창의 문풍지를 울린다. 인간도 평형을 얻지 못할 때 감정이 인다. 바람이 호수를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건을 접할 때 감정이 이는 법이다.
눈 오는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무엇인가 마음에 스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면서 눈길을 무작정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어쩐 사람은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고 싶을 것이다.
괴로운 사람은 괴로운 대로 즐거운 사람은 즐거운 대로 그 밤을 자기 분위기로 만들어 취할 것이다.
여기서 어떤 분위기에 취하고, 자기를 묻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수필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무심히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순간 떨어지는 낙엽에서 세월을 보고 자연의 순리를 볼 수 있다. 그 낙엽에서 나이 든 자신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연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죽음까지를 생각하면서 심리적 갈등을 느끼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감정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글을 쓰게 되는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 수필은 모든 사람의 문학이다.
문학은 잘 알다시피 주정적(主情的) 경험의 독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해할 때 수필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는 15~16살의 소녀였고,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쓴 이윤복 어린이 역시 14~15살밖에 안 되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그들은 문학론이나 수필론을 배우거나 읽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좋은 글을 쓰는 조건은 그리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로움이나 슬픔, 기쁨, 행복, 낯섦, 낯뜨거움, 그리움, 설렘 등 이런 것들을 통하여 자기의 가장 소중한 한 페이지를 기록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체나 단어 등도 그렇게 화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어를 좀 색다르게 배치하기만 하면 된다.
한편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인간들은 이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대화 형식이나 문장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게 되는데, 때로는 비로소, 때로는 절규로, 때로는 묘사로, 때로는 이야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 이야기 중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골라서 상대방에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보자. 이럴 때, 아직 수필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수필적 문장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수필을 ‘자기현시(自己顯示)의 글’이니 ‘자조(自照)의 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수필은 단순히 의지나 설명 또는 논란이나 비판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수필은 독자를 납득시키는 일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필은 반드시 ‘감동(evoke)’을 주는 글이어야 한다. 여기에 수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수필은 단순히 묘사로서만 만족할 수 없고,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만 쓰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수필에는 작가의 깊은 사색을 읽을 수 있는 내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지성이요, 감성이다’라는 지적과 같이 본래 수필은 ‘만인의 문학’이었으면서도 자식인의 문학이었다. 시, 소설, 희곡 등이 대중을 상대로 한 원시예술에서 출발하였다면, 수필은 학문적 축적이 있은 후에 나타난 문학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은 독자에게 관능적이고 통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문학이 아니라, 정서적 공감을 주는 사고할 수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수필은 심성으로 쓰는 문학이다.
수필을 쓰려면 우선 마음에 감동을 갖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감동이 있는 사연이나 인상에 남는 추억 등을 수필로 옮기면 오래도록 기억되는 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오래도록 기억이 되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섣불리 손으로 글을 쓰지 말고 심성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릴케(R. M. Rilke)는 <부리게의 수기>에서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것 같은 사연이 있는가? 그때 붓을 들라. 그러면 한 줄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도쿄의 유명한 음악연구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스즈끼 교수법’은 이러한 방법을 잘 활용한 것이 된다. 즉 스즈끼 교수는 이 학원으로 음악 교습을 배우러 오는 학생에게 몇 달이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교습을 받으러 온 아이들에게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들과 놀게 하며 피아노 소리가 귀에 익숙하도록 매일 들려준다. 그러다가 어린아이가 피아노에 가까이 다가가 건반을 두드려 보면 그때부터 교습을 시작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글을 쓸 수 있는 감동적 계기가 생겼을 때 글을 쓰면 그만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아이들이 같은 관찰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모든 물체에 생명력이 있다고 믿는다. 나무, 돌, 집, 책상, 학교, 산, 들 등 모든 물체가 영혼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눈을 가지면 손으로 쓰는 기계적인 글에서 마음으로 쓰는 정서적인 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