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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되지 못한 부분은 '범천권청이 이유(교설의 내용과 방법), 열반지향적특성에서 자각과 의도의 강조, 3종외도의 비판에 나타난 중도성, 방편과 진리의 차이, 절대적 객관성으로서의 지혜를 포함하여 다섯개 이상의 논의가 있지만 제출기한의 한계로 논문의 내용에서 제외하였음
* 본 논문의 좀 더 깊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주석의 내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독자의 편의상 많은 양의 주석을 모두 삭제하였으므로 혹시 주석부분까지 살펴보실 분은 댓글로 요청해주세요...() *
<목차> <목차> ----------------------------------------------------- 1 Ⅰ. 서론 ----------------------------------------------- 3 1. 연구계기 ------------------------------------------ 3
2. 연구목적 및 방법 ------------------------------------ 4 Ⅱ.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업보관 ------------------------- 5 1. 자각이 없는 범죄행위는 큰 죄가 되지 않는다. --------------- 5
2.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가지는 문제점 -------------------- 7
(1) 자타카의 진위문제 ------------------------------- 7
(2) 답변을 통한 문제제기 ----------------------------- 8
3. 본심의 의미분석 ------------------------------------- 9
(1) 행위의 선악개념에 대한 자각 ---------------------- 10
(2)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 ------------------------- 11
(3)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 -------------------------- 12 Ⅲ. 업보관의 불교적 분석 --------------------------------- 12 1. 선악과 행위에 대한 분석 ----------------------------- 13
(1) 선악의 절대성과 상대성 --------------------------- 13
(2) 불교 업설에 나타난 선악관 ------------------------- 14
가) 세속적 선악의 개념 -------------------------- 15
나) 세속적 선악윤리의 기준 ----------------------- 15
다) 탈세속적 선악관 ---------------------------- 17
2. 의도와 행위에 대한 분석 ----------------------------- 18
Ⅳ. 불교업보관의 특성 ------------------------------------ 20
1. 중도적 특성 ---------------------------------------- 20
(1) 선악구분에 대한 중도성 -------------------------- 22
(2) 의도와 행위결과에 대한 중도성 -------------------- 25
(3) 업인의 유무에 대한 중도성 ----------------------- 27
2. 열반지향적 특성 ------------------------------------ 29
Ⅴ. 결론 ---------------------------------------------- 30 <참고서적> -------------------------------------------- 32 Ⅰ. 서 론 1. 연구계기 勸善懲惡의 문제는 고래로부터 인류문학사에 있어서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테마로서 자리잡아왔다. 어쩌면 ‘善人善果 惡因惡果’라는 인과응보의 원리는 맹자의 性善說에서도 주장해온 ‘차마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서 인간의 良心이라는 측면과 결부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倫理的 當爲性을 획득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적 판단을 포함한 사상이나 종교, 관습 등에 바탕하여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구체적인 行爲를 통해 나타날 때 개인의 信念이나 價値體系에 따라 행위에 대한 선악판단을 내리게 된다. 불교의 緣起說에 근간한 인과의 법칙 또한 인간생활의 윤리적 측면과 결부되어 행위의 價値信念的 規準으로서 자리잡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라는 佛敎緣起說의 기본공식은 선한 업은 즐거운 결과를 낳고 악한 행은 괴로운 결과를 낳는다.’ 라는 倫理的 命題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된다는 來世觀과 이어질 때 業報輪廻라는 관념으로 발전된다. 이것은 업장소멸과 공덕쌓음, 또는 福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오늘날 한국불교의 재가신앙의 中樞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근본교설의 하나인 無我說과 이러한 윤회가 가지는 相互 矛盾的 문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교리적 해석이 분분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평소 이러한 업과 윤회, 무아와 윤회에 관한 모순에 대한 많은 연구 실적들에 관심을 가져오던 중 무아와 윤회와 관련된 교설을 對論的 형식으로 담고 있는 『밀린다왕문경』을 읽어보게 되었다. 『밀린다왕문경』은 현재 스리랑카불교에서는 三藏에 포함되지 않고 있지만 미얀마 불교권에서는 經藏 가운데 小部經典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청정도론』등과 함께 상좌부(分別說部)의 7가지 논서와 거의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논서이다. 특히 이 경전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무아와 윤회라는 부분에 대한 문답이다. 물론 다른 딜레마적 의문에 대한 해답들도 메난드로스와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輪廻의 主體에 대한 물음은 붓다 당시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의문으로서 이 경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가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던 부분은 無我-輪廻문제에 있어서 약간은 派生的인 성격을 지닌 부분이었다. 즉 붓다의 전생담에 나타난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생전에 결코 산목숨을 죽인 적이 없다.’라는 부분과 ‘붓다가 전생에 로마사카사파라는 선인이었을 때 찬다바티라는 왕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愛慾에 휘감긴 마음으로 수백의 살아있는 生肉들을 살해하는 의식인 消磨 大供犧祭를 올린 사실’의 딜레마적 관계를 묻는 메난드로스의 질문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가지는 적절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것은 붓다의 전생이라는 『자타카』의 진위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自覺이 없는 행위의 業因형성에 대한 물음이다. 本心에서 벗어난 행위는 그리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은 意業을 중시하는 초기불교의 業說과 相通하여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實際的인 입장에서 자신의 意圖와는 상관없는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면 그 행위의 責任所在는 어떻게 해야 하며 그러한 행위는 果報를 낳는 業因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절대적인 업인의 존재를 인정할 때 초기불교의 입장과는 달라지게 되거나 宿命論에 빠져버리게 되며, 업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개인이 의도하지 않고 지은 부정적 結果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게 되어 단지 피해자 개인의 과거업보라는 측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연구목적 및 방법 본 논문의 目的은 기존의 인도사상들과는 다른 불교의 業說이 지니는 특징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自覺과 行爲의 문제에 있어서 業因의 존재와 그 果報에 대한 물음을 기본 전제로 하여 먼저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論議를 그 출발점으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메난드로스왕의 딜레마적 질문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에서 本心이 가지는 의미를 善惡에 대한 自覺과 行爲 그 자체에 대한 自覺, 그리고 행위의 意志나 意圖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 선악의 개념 및 의도가 행위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아함경설에 담긴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업의 해석 문제에 있어서 아뢰아식을 업의 所藏處로 삼는 唯識사상의 논의보다는 아함경설 자체에 담긴 붓다의 의도를 해석의 기본 원리로 적용해 보고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佛敎業說의 특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비록 초기경전류에도 유식적 識의 원초적 개념을 드러내는 문구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唯識思想 성립 이전의 초기경설에 나타난 내용만을 가지고 특정한 사상이나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의 業說을 설명해 보고자 하는 필자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러한 분석은 결국 佛敎倫理學的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행위와 업인의 관계를 분석해보기 위해서는 선이나 악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분석을 통해 업과 윤회의 관념이라는 인도사상적 토양속에서 불교교설이 가지는 사상적 위치와 함께 진리에의 자각을 통한 붓다의 自內證的 안목이 불교의 업설에 녹아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意圖性만을 중시한 업 해석이나 結果的 측면만을 중시한 업 해석이 불교의 진정한 업에 대한 안목이 아님을 밝히면서 그러한 업에 대한 관점이 붓다의 깨침에 연유한 지혜의 안목에서 발현된 것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국 본 연구의 근본 취지는 善惡과 관련된 行爲와 業因에 대한 해석, 그리고 社會倫理적인 해석을 통해 불교의 業報觀이 특정한 견해나 이론에 치우친 것이 아닌 연기설에 바탕한 中道的 敎說임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하겠다. Ⅱ.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業報觀
1. 自覺이 없는 犯罪行爲는 큰 죄가 되지 않는다.
“존자 나가세나여! 또 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생에 인간이었을 때 나는 살아있는 온갖 것을 죽이거나 헤치는 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또 세존은 ‘로마사 캇사파라 이름하는 선인이었을 때 몇 백의 살아있는 생명들을 살육하고 <승리의 술>이라 이름하는 소마 대공희제를 올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난드로스 왕은 붓다의 前生談에 근거하여 그의 말이 誤謬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오류에 대한 해석을 나가세나 존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즉 殺生罪의 여부에 대한 서로 다른 발언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兩刀論法的 물음에 대하여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그것은 탐욕에 휘감겨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자기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일으킨 것입니다...(중략)...보살은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중략)... 보살은 왕녀 챤다바티를 보자마자 마음이 어지럽고 산란하고 애착으로 물들었습니다. 마음이 어지럽고 착란하고 초조한 그는 그 미혹하고 산란하며, 평소의 마음과 행동에서 벗어나고, 흔들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갖고 큰 짐승의 목을 찔러 생피를 모아 <승리의 술>이라 하는 소마 대공희제를 지낸 것입니다.” “대왕이여! 산란한 마음에 의해 저지른 악은 현재에도 큰 죄가 되지 않고 또 미래에 태어날 과보에 관해서도 그런 큰 죄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나가세나는 메난드로스 왕이 지적한 보살의 상반된 발언중에서 로마사캇사파라는 선인이었을 당시의 행위가 왕녀 찬다바티를 보고서는 愛慾에 마음이 어지러워져 ‘자기의 行爲에 대한 自覺’이 없었기 때문에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전생에 인간이었을 때, 나는 살아있는 온갖 것을 죽이거나 헤치는 자는 아니었다.’라는 발언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메난드로스는 다시금 ‘生類를 죽이는 여덟 종류의 사람들’을 나열하면서 아마 보살은 ‘本心’에서 생류를 죽이는 일을 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덟가지 종류 중 첫 번째 ‘愛着하는 자는 貪慾 때문에 생류를 죽인다.’ 라는 범주에 보살이 속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보살이 찬다바티에게 마음이 빼앗긴 것은 愛慾心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탐욕으로 생류를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가세나는 여전히 보살이 자기 행위에 대한 자각이 사라진 것은 왕녀 찬다바티를 보고서 마음이 어지럽고 산란하여 애착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죄에 대해서는 그리 큰 허물이 없으며 용서되어야할 문제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마지막 대목에서는 보살이 본심을 회복하고 다시 출가하여 다섯가지 神通力을 나타내고 梵天界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2.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가지는 문제점
(1) 자타카의 진위문제 참고적으로 나가세나의 답변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은 자타카의 眞僞문제이다.『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은 메난드로스가 제시한 붓다의 두 언설이 사실이라는 大前提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세나는 양도논법으로 제시된 두 발언의 사실성을 인정하면서 하나의 발언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을 제시함으로서 어느 한쪽의 事實性도 훼손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자타카는 붓다가 宿命通으로 자신의 전생을 내다보고 설한 전생담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학자들은 그것이 佛塔崇拜思想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題材를 재래의 인도우화 등에서 받아들여 붓다의 모습을 假託시킨 측면이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대승불교의 흥기에 얼마간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 내용의 사실적 信憑性에 있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타카의 내용을 부정하게 되면 붓다가 주장한 숙명통과 같은 신통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자타카의 내용을 인정하기에는 학문적이고 실증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經典成立史的 연구는 다른 학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밀린다왕문경』의 대론이 펼쳐진 시기를 그리스의 메난드로스 왕이 서북인도를 통치하였던 BCE. 2세기 후반으로 잡는다면 나가세나는 당시 자타카나 아바다나 문헌의 사실성에 대한 신앙적 믿음을 가지고 답변을 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밀린다왕문경』에 있어서도 대론의 사실성 여부에 대한 회의적 입장이 존재한다. 다만 『밀린다왕문경』이 불교 경전상에서 가지는 지위와 영향력을 인정한다면, 비록 그 안에 담겨진 說話的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나가세나의 해석에는 佛敎的 思想이 베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타카적 설화나 『밀린다왕문경』의 대론에 대한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그 안에 담겨진 불교의 業에 대한 사상과 입장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며 결국 본고에서 이 경의 내용을 논의의 첫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妥當性이기도 하다. (2) 답변을 통한 문제제기 앞에서 살펴본 문답의 내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의 범죄는 그리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답변은 ‘故意的이 아니고 계획되지 않은 행위, 또는 無意識的인 행위 역시 행위이긴 하지만 진정한 業을 이루지는 않는다. 진정한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意圖(ceranᾱ)가 수반되어야 한다.’ 라는 초기불교 업설의 입장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로마사캇사파의 행위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에서 ‘本心에서 벗어난 상태’를 ‘무엇인가에 染着되어 마음이 뒤바뀌고 혼란한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로마사캇사파가 찬다바티라는 왕녀를 보고 마음이 애욕으로 물들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어진 상태를 ‘본심에서 벗어난 상태’로 규정하고 그러한 상황에서의 살생 죄업에 관해서는 그리 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만약 로마사캇사파가 애욕심에 물든 마음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이 평소의 마음에서 벗어난 상태로 殺戮祭儀에 참석한 것이라면 그것이 중생이 根本無明에서 발생한 탐진치의 三毒心으로 악행을 짓게 되는 원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업을 짓고 과보를 받으면서 六道輪廻하는 근본 원인을 12연기설에 근거하여 무명에 두고 있다. 無明은 범어로 'avidyᾱ'이며, 그 뜻은 밝음이 없는 상태, 즉 무지한 상태를 말한다.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분별하고 집착하는 중생들의 근본 어리석음으로서 결국 고통속에서 악도윤회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근본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나가세나의 답변에서 ‘본심에서 벗어난 마음상태’ 라는 것이 ‘어지럽고 산란하고 애착으로 물든 마음’ 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면 이것이 앞에서 설명한 악도윤회의 근본이 되는 무명과 삼독에 바탕하여 染汚된 마음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나가세나 존자의 결론인 ‘산란한 마음에 의해 저지른 악은 현재에도 큰 죄가 되지 않고 또 미래에 태어날 과보에 관해서도 그런 큰 죄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라는 답변을 참으로 본다면 染汚되고 顚倒된 마음으로 악업을 짓고 살아가는 중생들의 행위에 대해서도 ‘현재에도 큰 죄가 되지 않고, 또 미래에 태어날 과보에 관해서도 그런 큰 죄가 되는 일’ 이 없어야 한다. 결국 나가세나의 이러한 결론적 답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에서 설명한 ‘본심에서 벗어난 마음’ 에 대한 槪念的 정의가 확실하게 이루어져야만 하고 보살의 ‘물들고 평소의 마음에서 벗어난 마음’과 중생들의 ‘물들고 평소의 마음에서 벗어난 마음’ 이 과연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 나가세나 존자는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3. 본심의 의미분석
상담심리학에서는 심리적 문제의 유형을 분류할 때 그 심각성 정도에 따른 분류에 있어서 신경증적 문제와 정신증적 문제로 구분한다. 神經症적 증상이란 정서적 행동적 측면에서 현실인식과 생활적응에 극심한 결함은 갖지 않지만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벗어나 부적절한 행동이나 心理狀態를 가지는 것을 말하며, 情神症적 증상이란 현실의 인식과 기본적인 생활 적응능력 자체가 심각하게 손상된 경우를 말한다. 이에 따라 로마사캇사파의 ‘본심에서 벗어난 행위’에 대해 분석을 해본다면 정신증적 문제에 따른 행위였다고 판단될 소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신증적 문제의 경우는 法律的 용어로 거의 禁治産者에 가까운 자로 정신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가세나 존자의 마지막 답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본심으로 되돌아와 바른 생각을 회복했을 때 그는 다시 출가하여 다섯가지 신통력을 나타내고 범천계에 태어났습니다.”
정신증적 증상이 정신병적 현상으로서 정상회복의 가능성이 크지 않음을 염두해 둘 때 로마사캇사파의 행위는 정신증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愛慾心이라는 욕망과 칩착에 기인한 중생들의 행위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나가세나 존자가 말한 ‘본심에서 벗어난 행위’ 에서 본심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한 당시 상좌부 계통의 최고학승으로서 표현된 인물이 그러한 답변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본심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있는 상태” 라고 정의한다면 과연 자각과 행위가 가지는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논의되어야 한다. 本心의 기준은 곧 自覺의 유무이며 자각은 크게 認知와 意圖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본심에 대한 정의를 ‘자각이 있는 행위’로 규정하고, 자각의 의미를 ‘善惡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으로 분류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행위의 선악개념에 대한 자각 본심을 벗어난 행위의 果報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밀린다왕문경』<對論>편에는 앞에서 논한 모르고 짓는 죄와 관련된 과보문제에 있어서 약간은 의아한 답변이 발견된다. 대론 중 메난드로스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행위의 선악개념에 대한 자각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중 악한 행위를 하였을 때 더 큰 화를 입는 자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제시한다. 이에 나가세나 존자는 행위에 대한 선악개념이 없는 어리석은 자가 지은 죄의 재앙이 더욱 크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답변을 이해하지 못한 왕이 다시금 그 이유를 묻자 뜨거운 철판의 譬喩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마치 활활타는 철판이 있는데 한사람은 그것이 뜨거운 철판인줄 알고 다른 한사람은 그것이 뜨거운 철판임을 모르고 잡았다면 누구의 손을 더 많이 데이겠습니까?” 이 답변에서 나가세나는 선악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손을 더 많이 데이듯이 모르고 짓는 죄업은 그 행위의 부정적 결과를 알지 못하기에 더 큰 災殃을 입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선악에 대한 자각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는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이나 지혜가 없기에 마치 모르고 잡은 철판에 손을 더욱 많이 데이듯이 그 과보가 크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답변은 선악의 개념에 무지한 자는 계속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과보의 量的축적을 경계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모르고 짓는 죄’ 의 목적어는 ‘그 행위가 선이냐 악이냐’ 에 대한 내용이지 행위 자체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와 로마사캇사파의 행위와 비교해 보면 그가 애욕심에 물들어 살아있는 생육을 죽이는 희생제의를 치렀을 때 우치한 자와 같이 선악개념에 대해 무지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는 수행의 과정에 있는 선인이었으며 붓다의 前生身으로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혜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 이 부분은 어쩌면 가장 논쟁의 소지가 있을만한 부분이라 판단된다. 본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 의 의미를 분류해 볼 때 , ‘행위의 主體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제3자가 개개인의 정신적 상태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難點을 가진 의문이다. 행위자와 주체자의 문제는 결국 행위를 하고 있는 육신과 그 행위를 주도하는 근본주체 혹은 의식의 개념이 同質的인가 異質的인가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만약 주재자와 행위자가 이질적인 경우를 추측해 본다면 귀신이 씌였다던지 혼이 나간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일단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행위자의 육신 그 자체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의 문제이기에 결국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자가 누구냐’ 라는 윤리적 책임소재를 묻는 문제가 된다. 사회법률적으로는 ‘構成要件’ 과 ‘違法性’, ‘責任性’의 세 가지 기준으로서 범죄행위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책임성에 있어서는 의사능력이나 연령에 따라 그것이 경감되거나 부정되기도 하는데 특히 의사능력이 없는 心神喪失者의 경우 범죄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물을 수 없다. 여기서 책임성이란 ‘非難可能性’ 또는 刑罰適應能力을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자와 그 행위의 주재자가 異質的 존재라는 것을 판단할 만한 기준이나 근거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행위자와 그 행위의 주체자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를 상정해 본다면, 선악적 의도가 담기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존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발로 작은 생명체를 밟고 지나갔고 나는 그것을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고, 결과적으로 생명체의 살생이라는 부정적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그 사람에게 업인의 존재와 과보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로마사캇사파의 행위에 있어서 이러한 責任所在를 면하기 위해서는 살생행위를 할 당시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문만으로는 그것을 판단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3)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 행위에 대한 의지나 의도의 분석에 있어서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선악적 개념이 포함된 행위이며, 두 번째는 선악적 개념이 배제된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의지나 의도가 담긴 행위이다. 본심의 의미를 의지나 의도로서 해석해 본다면 로마사캇사파의 행위는 의지나 의도가 결여된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자각의 두 번째 분류와도 공통된 면을 가지는 정의라 할 수 있다. 결국 그의 행위가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이 없는 행위이고, 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윤리적 책임이나 죄의 과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불교의 업설에서도 意圖性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는 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타당함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아함의 업설에서 의도성이 있는 행위만을 업으로 인정한다는 측면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업보관이 ‘본심에서 벗어난 행위’는 그리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은 上座部 계통의 논사로서 아함의 교설에 정통한 그가 다분히 불교적 업설의 입장에서 그러한 답변을 한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붓다의 전생담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제기된 두 가지 발언의 事實性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초기불교의 업에 대한 근본입장을 메난드로스왕에게 설명하기 위한 나가세나 존자의 의도가 반영된 답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업보관의 불교적 분석
본 장에서는 Ⅱ장에서『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나게세나 존자의 답변이 자타카 문헌의 신앙적 사실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행위에 있어서 그 의도를 중시하는 불교업설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을 재고해보면서 선과 악 및 그와 관련된 행위에 대한 불교적 해석과 함께 의도와 행위의 관계성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Ⅳ장에서 전개될 불교업보관의 특징에 대한 해석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1. 선악과 행위에 대한 분석
(1) 선악의 절대성과 상대성
善과 惡은 윤리와 도덕의 근간을 이루는 두 가지 축이다. 선악의 관념에 따라 인간이 규정한 윤리와 도덕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이기에 선악의 정의는 참으로 예민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어떤 것은 잘못된 행위이고 어떤 것은 바른 행위라는 선악의 관념을 학습해 왔으며 그것이 현재 삶의 가치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구의 윤리학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인간 이전의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해 창조된 절대적인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도 말한다. 또 어떤 상황이나 사실의 선악을 논할 때 동기를 중시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결과를 중시하는 입장도 있다. 서구의 윤리학에서는 흔히 칸트윤리의 동기론적 속성과 함께,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경제논리를 내세우며 행위의 동기보다는 결과를 중시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결과론적 윤리설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선악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빠져서는 안될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제외한 선악에 대한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선과 악이라는 개념 또한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결국 선악의 개념은 인간과 연기적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행위의 선악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선악을 정의하는 자가 주체나 객체 중 어느 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선이나 악을 판단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며 그 인간이라는 존재는 행위의 주체집단과 객체집단 중 그 어느 하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행위는 당시 조선민중들에게는 조선을 침략하여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침략자로 묘사되지만 일본에서는 일본의 봉건막부를 통일하여 하나의 전제국가를 이룬 뒤 조선을 정복하려 했던 뛰어난 영웅의 행위로 묘사된다. 여기서 그 전쟁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선이라고 규정할 수 없겠지만 국익이라는 측면에서는 선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한 바에 따르면 선과 악의 개념은 측은지심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이나 이성에 근거한 절대론적 범주를 따르는 선악이 있는가 하면, 시대나 장소또는 한 공동체의 규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론적 선악의 개념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선악의 규정은 단지 이익이라는 특정 공동체의 좋은 결과(이익)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의 개념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그 규정하는 바가 달라지겠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정서에 바탕을 둔 시대와 장소를 떠나 존재하는 절대적인 부분이 그 핵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불교 업설에 나타난 선악관 불교의 선악관은 그러면 앞에서 논의한 절대적 선악론인가 아니면 상대적 선악론인가. 먼저 불교의 선악관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선행단계가 요구된다. 선행단계라고 하는 것은 불교가 지닌 이제적 특성에 따른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즉 불교의 윤리적 교설은 재가자를 위한 교설과 출가자들을 위한 교설로 나뉘는 것이다.
비록 불교적 교리가 만인에게 평등한 진리로서 보편타당한 교설이라고 정의하지만, 그 윤리적 실천에 있어서는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회속에서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며 처자식을 부양해야할 재가자들에게 삼의일발의 무소유적 삶과 수행을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출가자의 삶의 방식을 요청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통적인 윤리교설에서 파생된 이러한 차이는 율장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출가자에게는 교단축출죄로 인정되는 4바라이죄 중 불음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출가자는 집착과 욕망을 떠나 궁극적은 경지인 해탈에 이르기 위한 실천행이자 교단의 규범으로 어떠한 음행도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재가자의 경우,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 자녀를 낳고 길러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에서 최소한의 도덕규칙으로서 불사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영역의 가르침도 있다. 진리라는 공통적인 요소에서 붓다는 각각의 상황에 적절한 윤리적 가르침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방편적교설이라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붓다는 출가자들의 해탈을 위한 가르침을 폄과 동시에 당시 재가 민중들이 지닌 현세구복적 염원과 사회윤리의 정립을 위한 가르침도 설해야만 했다. 가) 세속적 선악의 개념 원시불교에 있어서는 선악에 대하여 많은 교설을 말하고 있지만, 선악의 개념을 명료하게 규정한 바는 없다. 불교 경전상에 나타난 선악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살펴보면 불교적 선악관의 특징을 알 수 있다. 흔히 불교에서 선악을 규정하는 단어로는 쿠살라(kusala)와 아쿠살라(akusala, 혹은 pᾱpa)를 사용하고 있는데, 쿠살라는 ‘바람직한 과보가 있는 것’ 이란 뜻이며, 아쿠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과보가 있는 것’ 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밖에도 팔리어로 된 원시경전들을 살펴보면 선과 악에 대한 풍부한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교리가 지닌 사회적 윤리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악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 인간의 행위가 지니는 연기적 특성으로서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를 떠나서는 어떠한 선악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세속적 선악은 단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그리고 주체와 객체라는 연기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윤리적 개념인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선과 악의 의미를 분석함에 있어서 그 과보까지를 행위의 범주로 포함시키고 있는 불교적 선악개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칸트는 자신의 철학 사상에서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을 판단할 때 유일하게 선한 것은 ‘선의지’ 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불교의 선악 판단에 있어서 그 결과가 가지는 중요성은 의도적 선악과 마찬가지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상의 본질로서 그 의도가 가지는 선악의 중요성뿐만이 아니라 행위의 산물인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의 성격도 선악을 판단하는 큰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 세속적 선악윤리의 기준 앞에서 불교에서의 선악관은 그 동기적인 선악을 비롯하여 과보로서 그 결과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하는 연기적 선악관이라 설명하였다. 이러한 선악에 대하여 세간적 입장에서 그 기준을 명백히 하고 있는 대표적 교설은 十善과 十不善이다.
십선이란 자세하게는 ‘열 가지 선인 행위의 길(十善業道)’ 이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십불선은 ‘열 가지 불선인 행위의 길(十不善業道) 이라 표현된다.’ 이것은 원시불교에서는 십선과 십불선이 행위의 입장에서 다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십선은 행위상으로 신체에 의한 행위(身業)와 언어에 의한 행위(語業), 그리고 마음에 의한 행위(意業)의 세 가지로 분류되어 설해지고 있는데, 초기 아함경설의 많은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身業>
(1) 생물을 죽이는 짓에서 떠나는 일 (不殺生) (2) 주어지지 아니한 것을 취하는 짓에서 떠나는 일 (不偸盜) (3) 갖가지 애욕의 사행에서 떠나는 일 (不邪淫) <語業>
(4) 虛言에서 떠나는 일 (不妄語) (5) 中傷하는 語言에서 떠나는 일 (不兩舌) (6) 험한 語言에서 떠나는 일 (不惡口) (7) 아첨하는 수다부림에서 떠나는 일 (不奇語)
<意業>
(8) 탐함을 구하지 말 것 (不貪慾) (9) 미워하지 말 것 (不瞋恚) (10) 바른 見解 (正見)
이 十善의 반대 조항이 十不善인데, 원시경전에 있어서는 이를 가지고 선악의 규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의『출가경』에서 붓다는 ‘무엇이 선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십불선의 각 항목을 들어가며 이것이 불선이고 이들 하나하나를 항복받으면 그것이 곧 선이라고 설하고 있다. 결국 재가자로서 해야될 일과 범하지 말아야 할 기준으로서 십선이 권장되고 있으며, 십선을 행하면 좋은 곳에 나며 십불선을 행하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교설은 아함경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고의 대부분이 不善의 결과이므로 현실세계에서 고통을 발생시키게 되는 악업의 방지가 업설 실천에 우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십선과 십악행의 업 윤리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의 원리이다. 『중아함』경에는 이러한 자업자득의 원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경설이 보인다. ‘사람들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십악업을 행하면 나중에 목숨이 다할 때 그를 위해 여러 사람이 와서 합장하고 그를 향해 칭찬과 축원을 올린다 해도 천상에 날 수가 없다. 이는 깊은 못에 큰 무거운 돌을 던져 넣고는 여러 사람이 와서 그것을 향해 합장하고 칭찬하고 축원을 하면서 “떠오르라” 고 염원한다고 해서 그 인연으로 떠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어떤 행위에 있어서 과보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행위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행위주체와 객체라는 연기적 관계로서 맺어져 있는 것이다. 인과율을 완전히 벗어난 열반을 얻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천신에서부터 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 이런 관계성과 인과성을 벗어난 존재는 없다. 따라서 사회라는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나의 행동이 미치는 결과는 타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받는다는 자업자득 또는 자작자수의 원리는 자연히 불교연기설에 바탕을 둔 사회윤리적인 도덕준칙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탈세속적 선악관 이러한 분별적 개념의 선악관은 물론 그 윤리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여겨지지만, 불교의 궁극적 선악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불교가 비록 중생들의 현실적 고통의 해결을 주장하며 인간생활의 상호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연기성에 대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펴고 있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바로 깨달음을 통한 열반의 증득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붓다는 현실의 상황과 한계점을 인지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세속적 선악관에 입각한 십선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의 궁극적 지향점은 바로 출가자나 재가자를 막론하고 윤회를 벗어난 해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업설의 궁극적 지향점은『법구경』에도 ‘7불통계게’ 라는 명칭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일체의 악을 아니하며, 선을 받들어 행하며,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제1구는 일체의 악을 짓지 않는다는 덕목이며 제2구는 선을 구비한다는 덕목을 설하고 있다. 결국 선악을 잘 분별하여 선을 행하되 악은 멀리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선악의 대립이라는 분별적 상호관계에서 도덕심이나 윤리적인 생활의 향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제3구의 ‘自淨其意’에서 나타나듯이 번뇌와 집착과 같은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가 불교가 진정으로 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업설은 결국 그 목적이 현실적 이익을 포함해서 生天에 있다. 업설의 한계는 생사의 고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이 있으므로 반드시 생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업설의 한계를 규정하는 이론적 설명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십악의 근본인 탐진치를 멸할 때 생사의 고가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세간적 선악의 구분에 따른 십선행의 실천을 통한 악행의 방지는 그것을 통해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2. 의도와 행위에 대한 분석
意圖는 사전적으로 ‘행위의 종극이자 목적’의 관념으로 마음속으로 장차 하려고 하는 계획이라 정의되고 있다. 또한 行爲란 ‘일반적인 행하는 짓’ 이라는 의미와 법적으로 ‘사람의 의사작용에 따른 적극적인 동작’ 또는 윤리적 개념으로 ‘도의를 판단할 수 있는 의식적인 동작’ 이라 설명되고 있다. 위의 개념적 정의에 따르면 의도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외부적 행위에 대하여 의지나 목적, 계획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행위는 일반적인 동작을 포함하여 인간의지의 반영으로서 나타난 외부적 양태로 그 선악적 의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와 행위간의 관계에 있어서 필연적 인과관계가 성립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발생한다. 마음속으로 어떤 행위를 하고자 의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느냐 아니면 그저 마음속의 생각으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결정에 달린 것으로 필연적 관계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교학에서는 인간행위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加行(행위의 예비단계)-根本業道(본격적인 행위)-後起(부수적 행위)로 나누고 있다. 예를 들어 소를 도살하는 행위를 보면, 최초의 살의를 일으켜 소를 끌고와 몽둥이나 칼로 치고 베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업은 加行이라 하여 살생행위의 예비적 단계로 보며, 소의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의 업은 根本業道라고 하여 본격적인 살생업의 형성단계로 보며, 소의 목숨이 끊어진 후 가죽을 벗기거나 살을 자르는 등의 업은 後起로서 살생의 부수적 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살생행위가 이루어지는 일련의 단계에서 가행의 초기의도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은 행위주체의 주관적 판단을 무시한 기계론적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어떤 행위의 선악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제3자적 판단이다. 자신의 행위가 선악에 근거한 의도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것은 오직 행위주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의도와 행위가 가지는 관계를 의도도 없고 행위도 일어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세 가지라 함은 첫째, 선악적 의도에 근거하여 행위가 발생한 경우, 둘째, 선악적 의도만 있었을 뿐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경우, 셋째, 선악의 의도성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행위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 중에서『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나가세나 존자의 ‘본심에서 벗어난 행위’ 또는 ‘자기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의 행위’ 와 유사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선악의 의도성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행위로 나타난 경우이다.
자각과 관련해서는 제Ⅱ장에서는 선악에 대한 자각(지식)과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인지),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의 세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해 보았다. 여기서 ‘의도 없이 행위만이 나타난 경우’란 선이나 악에 대한 어떤 의지적 결심이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행위를 말한다. 물론 의지적 결심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 행위를 할 당시 행위에 대한 자각이 있는가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가의 문제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다만 행위의 결과라는 외재적 측면만을 생각해 보는 결과론적 입장에서는 결과적 행위의 효과는 선악적 의도의 유무나 행위 자체에 대한 인지와는 상관없이 동일하다. 송선영은『종교적 삶에서 비의도적 죄지음의 문제』라는 그의 논문에서 Meiland의 글을 인용해 의도적 행동은 행위자의 의도에 따라 내재적 결과를 낳고 비의도적 행동은 타인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외재적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비의도적 행위라도 그러한 행위가 외부에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영향력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이나 악에 대한 아무런 의도 없이, 또는 행위 자체에 대한 별다른 인지없이 어떤 행위를 하였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결과를 발생시켰다면 그 원인행위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의도적, 비인지적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부정적 결과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면 동기가 아닌 결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러하다면 로마사캇사파의 살생행위가 본심에서 벗어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살생행위가 낳은 부정적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 단지 본심에서 벗어난 상태로 행한 것이기에 큰 죄가 되지 않으며 다시 출가하여 범천계에 태어났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도적 행위의 내재적 결과와 비의도적 행위의 외재적 결과라는 것인데, 비의도적 행위라고 하더라도 외부적인 효력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Ⅱ장『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業報觀’에서 살펴본 붓다의 전생신인 로마사캇사파의 행위에 있어서도 찬다바티를 보고 일으킨 그의 애욕심이 살생의도와 결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재적으로 살생행위라는 구체적 형태로 표현되지 않았다면 메난드로스의 질문도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의도가 있든 없든 살생행위라는 결과로 나타났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Ⅳ. 불교업보관의 특성
1. 중도적 특성
불교업보관에 있어서 중도적 특성이라는 것은 붓다가 설한 근본교설이 연기설이라는 점에 있다. 『잡아함』의 <십이인연경>에서 붓다는 고행주의를 버린 후, 보리수 나무밑에 7일간 앉아 12인연의 역관과 순관을 통해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12연기에 대하여 역(逆)으로 순(順)으로 관찰하시었다.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즉 '무명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고···내지, 남을 인연하여 늘음과 죽음이 있으며, 또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고 수순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한다' 고. 그 비바시부처님께서는 이래 동안 바르게 앉으신 뒤에 삼매에서 깨어나 이 게송을 말씀하셨느니라." 이렇게 하여 모든 법은 생기나니 범지는 부지런히 고요히 생각하면 모든 의심과 미혹 영원히 떠나 인과 연으로 생기는 법을 아네.” 연기라는 것은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 라는 상의상존적 법칙을 말한다. 십이지연기설 상에서도 각각의 지분들은 특정한 대상이나 실체가 아니라 연기적 조건들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과 연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독존하는 실체적 대상을 설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연기법의 상의상관성에 의해서 중도적 조망이 가능해진다.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똑 같이 모두 결정적으로 말한다.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은 유한의 색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한의 색을 나라고 한다. 혹은 유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한의 무색을 나라 한다. 아난아, 저 유한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는 '유한의 색은 나다.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다른 이가 보는 것은 그르다'고 결정한다. 무한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한의 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유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유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며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무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한의 무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의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결국 연기의 입장에서는 ‘나’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모르고 ‘나’라는 생각에 얽매일 때 분별심에 근거한 시비가 발생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에 근간할 때 그 어떠한 실체도 고정불변하게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즉 중도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유나 무, 상견과 단견 등 그 어떠한 치우친 견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연기적 이치로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중도의 입장에서는 특정한 입장에 치우친 견해는 비판된다. 다만 연기적 입장에서만 모든 것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연기설이라고 하여 앞에서 제시한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 라는 연기명제를 기계론적이고 단편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저것’의 조건이자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저것’이 ‘이것’ 하나의 독점적인 원인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것’은 이것을 제외한 다른 무수한 연기관계의 영향속에도 놓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연기와 중도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상의상관성의 입장에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연기법칙의 이러한 측면에 근거한다면 중도의 교설은 양극단의 초월이라는 양변부정의 닫힌 중도와 양변긍정이라는 열린 중도라는 모습을 띠게 된다. ‘닫힌중도’의 입장은 붓다가 설한 3종외도설의 비판으로 나타나고, ‘열린 중도’의 입장은 평등성에 바탕을 두고 선행과 악행의 구분에 있어서는 주객 양변의 가치존중과 의도와 그 행위결과에 있어서 양변이 가지는 영향력의 동시존중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1) 선악구분에 대한 중도성 제3장 업보관의 불교적 분석에서 불교의 선악관은 세속적 윤리규범으로서의 선악관과 그 실천행인 십선행과 함께 탈세속적 선악관으로서 궁극적 선이라고 할 수 있는 열반이라는 이중적 구조임을 7불통계게를 통해 설명해 보았다. 이것은 어떤 곧 속제적 교설과 진제적 교설이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 교설이 아닌 상의상관적 연기설에 입각한 중도적 특징을 지닌 선악구분론이 『암바라티까-라후로와다숫타』(Ambalatthika-rahulovada sutta, 敎誡羅睺羅菴婆藥林經)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라훌라야, 거울은 무엇에 쓰는가" 라훌라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는데, 거울이 쓰인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붓다는 계속해서 "너는 이전에 네가 행한 말과 뜻과 몸으로 행한 어떠한 것도 비추어 보아야 한다.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네가 숙고한 행동이 너에게도 해가 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또한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이로운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선(kusala)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며, 수행해도 될 것이다. 반대로 네가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네가 숙고한 행동이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로운 것이라고 느끼면, 그와 같은 행위는 악(akusala)으로 간주해야 하며, 단념해야만 한다. W.G Weeraratne는 이러한 붓다의 교설을 바탕으로 선이나 악으로 여겨지는 어떤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7가지 범주로 공식화 하였다.
1. 행위자에게 해로운 행동이지만, 나머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악행이다. 2. 행위자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이지만, 나머지에게 해로운 것은 악행이다. 3.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해로운 행위는 악행이다. 4. 행위자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이지만 나머지에게 효과가 없는 것은 선행이다. 5. 나머지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이지만, 행위자에게 효과가 없는 것은 선행이다. 6.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는 선행이다. 7.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효과가 없는 행위는 선행도 악행도 아니다.
붓다의 경설에 근거한 라트네의 ‘선악구분 7범주론’ 의 내용에 나타난 중도적 특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행위자와 피행위자를 구분하고 각각의 선악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해보았다.
<선악 구분 7범주>
(O : 이익, X : 불이익, - : 효과없음) 위의 도식화된 선악구분표를 살펴보면 선악의 구분에 있어서 하나의 특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표에서 행위자와 나머지 중 어느 한 쪽이라도 해로움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상의상관적 연기설에 입각한 선악구분에 있어서 양자의 가치를 모두 중시하는 가치존중적인 ‘열린 중도’의 입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붓다의 교설이 세상만물에 갖추어진 진리의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 평등하고 가치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1번의 경우이다. 자신에게 해가 되고 나머지에게 선이 되는 행위 중에는 살신성인과 같은 대승보살적 실천행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라트네의 설명을 통해 그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라트네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수단을 채택하든 행위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채택된 수단과 도달한 결과는 독자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중략) 판단이 어려울 경우에는 중도를 따라야 한다.’ 라트네는 어떤 행위의 가부판단이 어려울 경우에는 중도를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가치존중적 양자긍정인 ‘열린 중도’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열린 중도’의 관점은 탐진치 삼독심을 떠난 자비심의 입장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수단을 채택함에 있어서 행위의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행하려는 행위의 근원에 탐진치의 삼독심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성찰해야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똑같이 남을 위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향해 흉악범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고 할 때, 한 사람이 그 흉악범의 계속적인 살생을 막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흉악범을 살해한 경우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집단을 위해 자살폭탄테러를 저지른 경우는 결코 같은 살신성인으로 볼 수가 없다. 바로 ‘그 안에 자비심이 깃들어 있는가 아니면 삼독심이 깃들어 있는가’ 라는 근원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독심을 벗어난 열린 중도적 입장에서 자신의 행위가 이루어질 때 이것은 진정한 선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의도와 행위결과에 대한 중도성
흔히 불교의 업설의 특징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고의로 지은 업에 대해서만 그 과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팔리『增支部』6•63에는 “나는 행위(業)를 意志(cetanᾱ, 思)라 설한다. 意志를 作用시켜(cetayitvᾱ) 身•語•意에 依한 행위를 일으키게 한다.” 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불교가 행위의 과보를 낳는 선이나 악의 판단과 관련하여 결과로서 나타난 행위의 선악보다는 그 행위를 낳게 한 동기의 선악 쪽을 중시한다는 사고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행위의 본질을 의지나 의도(意業)에서 찾는다는 것이지 몸이나 말로써 짓는 업을 경시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될 문제가 『밀린다왕문경』의 대론에서 제시되었던 ‘본심에서 벗어난 살생행위’의 문제이다. 그 업인에 대한 고찰은 다음 논의로 미루더라도 행위의 결과로서 나타난 부정적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이미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가지는 부적절성을 지적하였고 그러한 답변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불교는 의도성이 없는 행위가 낳는 부정적 결과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보이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마찬가지로 의도와 행위결과에 대한 ‘열린중도적’ 입장으로서 설명이 가능하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거의 열대 몬순기후에 속해있다. 따라서 인도의 계절은 무더운 여름(3~5월), 장마철(6~8월), 건조한 겨울(10~2월)등 세 계절로 나누어진다. 장마철인 6월~8월 사이의 기간은 기후적인 악조건으로 인해 수행자들이 한 곳에 모여 안거를 하게 된다. 안거의 목적은 그 기후적인 불편함도 있었지만 우기를 맞아 땅위로 나온 온갖 초목과 생물들을 본의 아니게 밟아죽이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붓다 당시에 6명의 비구가 우기동안 세간을 다니면서 산천의 초목과 생물을 밟는 것을 보고 몇 몇 거사들이 항의를 하자, 붓다는 안거기간동안에는 한 곳에 모여 있도록 율을 정하였다. 하지만 안거의 근본 제정목적은 본의 아니게 살생을 하게 되는 업보의 방지가 아니었다. 당시 우기라는 기후적인 조건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고, 세간인들의 질타라는 윤리적 비난과 비의도적 행위에 의한 살생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방지하기 위하여 한곳에 모여서 바깥출입을 통제한 것이다. 물론 본의 아닌 살생에 대한 과보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모르고 지은 죄의 업보에 대한 논의 이전에 우기의 극복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붓다의 이러한 비의도적 행위에 따른 결과론적 문제점들에 대한 관심은 식물이나 나무 등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율장의 조항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불교가 나무를 정령이 머무는 기세간으로 여긴 반면, 당시 인도인들은 나무와 같은 식물도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하였기에 비구들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 그들의 신앙심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붓다는 율장으로서 그런 행위를 제제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이 행위의 의도성을 중시하지만, 의도성이 없는 행위의 결과가 낳는 외재적 영향 또한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행위의 의도 및 과보와 관련해서 중아함경 3권의『思經』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설도 보인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위의 마지막 경설인 ‘我說此不必受報’ 라는 문구와 관련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적 이견을 보이기도 하는데, 문맥상으로는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서로 대비되어 있기에 앞 문장이 전체긍정이라면 뒷 문장은 전체부정(완전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하지만 행위의 의도를 중시하는 불교업설의 입장에서 앞 문장의 해석은 완전긍정을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겠지만 비의도적 행위가 유발하는 외재적 효과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뒷 문장은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윤리적 책임의 소재를 묻는 동기론과 결과론의 선택문제가 아니라, 근본 윤리적 입장은 동기론적이지만, 행위로 인해 현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영향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열린중도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붓다가 제시한 업설의 진정한 의도에 다가선 것이라 할 것이다.
3) 업인의 유무에 대한 중도성 중도를 설명하면서 양극단의 가치를 평등하게 인정하는 입장으로서의 중도인 열린 중도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업인의 존재 유무는 결국 업인이 과보를 낳는 원인이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의도적 행위나 비의도적 행위의 과보성립을 묻는 문제로 회귀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의도와 행위결과의 중도성 분석’에서 부분부정의 입장을 취하였다. 물론 그 ‘의도’ 라는 것은 윤리적 책임의 기준점이었고, 비의도적 행위결과에 관해서는 부정적 결과의 인식과 방지로 설명되었기에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본고의 입장은 ‘不必受報’의 개념을 부분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였으므로 자동적으로 비의도적 행위에 있어서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또한 이 세계의 연기원리가 단편적이거나 기계론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에 있어서 업인의 존재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확고하게 존재한다’ 라던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입장은 ‘닫힌중도’의 입장에서 초월되어야할 논리이다. 왜냐하면 ‘확고하게 존재한다’ 라고 주장할 경우 업의 소장처로서 자아를 상정하거나 고정불변한 실체로서 Atman적인 요소를 인정하게 되어 불교의 무아설의 교리와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확고부동한 업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칫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업처럼 有我說적이고 有自性적인 업을 중시하면서 인간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신체적 행위에 의한 절대적인 업인을 인정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할 경우 로마사캇사파나등이 주장하는 偶然論에 빠져버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유물론적 사상에 빠져버릴 경우 인과과보라는 도덕법칙을 무시하고 道德否定論에 내세우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붓다는 중아함경의『度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는 자가 있다. 인간이 어떠한 樂또는 不苦不樂을 感受할지라도, 그 전체는 前에 행해진 것을 因으로 하고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는 자가 있다. 인간이 어떠한 樂, 혹은 苦, 혹은 不苦不樂을 感受할지라도 그 전체는 自在神의 創造를 인으로 하고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는 자가 있다. 인간이 어떠한 樂, 혹은 苦, 혹은 不苦不樂을 感受할지라도 그 전체는 無因無緣에 따르고 있다라고.”
그렇다면 앞에서 업보와 관련하여 ‘의도적 행위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과보가 존재한다.’ 라는 입장은 어떻게 이해되야 할까? 여기에도 숙명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불교는 숙명론적 교설들과는 달리 인간의 의지와 자유,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업인이 현재의 과보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는 숙명론적인 색채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고 해도 현재의 업인이 미래의 업과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는 인간의지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것을 근거로서 노력정진한다는 점에서 큰 도덕적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감수(苦痛)가 업의 과보로써 생기는 것만이 아니고, 8종류의 원인에 의한 병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것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의 경험 모두가 과거의 업인이 가지게 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 업인에 의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현재의 감수 중에서는 여러 가지 인과관계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기에 과거의 업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상응부의 경전에서는 苦樂의 自作自受는 常見에 떨어지고 他作他受는 斷見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석존은 이러한 二邊을 떠나서 중도를 설한다고 하면서, 십이인연의 順逆二觀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연기의 법칙이 상의상관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해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특징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즉 常斷의 양극단을 초월한 중도의 입장에서만이 업인과 과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용길은 ‘초기불교의 업설에 관한 연구’ 라는 그의 논문에서 ‘원시불교에 있어서는 업의 사상은 세간적 입장의 교설로써 받아들여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교 본래의 세간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거기에 진입시키기 위해서의 전단계로써 설해져 있던 것이었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물론 업사상이 세간적 선악의 기준을 설명하고 세간적 윤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업 사상을 단순히 세간적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계과로서의 열반마저도 포함하는 유위법적 세계의 진리라는 점은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는 三種外道說의 비판을 통해 業因의 有無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에 빠지지 않고 연기와 중도의 입장에서 열반을 향한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업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業이라는 것은 생명에 빌붙어 작용하는 종속적인 힘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자기창조를 행할 때의 내적결정이며, 그 업이 그 스스로의 힘에 의해 미래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것은, 그 본질이 무한한 창조력을 지닌 잠재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로마사캇사파의 행위를 분석함에 있어서 의도성이 없는 행위, 즉 자각이 없는 행위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 행위의 주체자에게 업인이 발생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하여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은 불교의 업설에서는 의도적 행위의 과보를 반드시 인정하지만 비의도적 행위의 과보에 대해서는 부분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논하였던 점을 다시 상기시켜본다면 어느 정도의 답변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 세계의 연기원리가 단편적이거나 기계론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행위가 낳는 결과의 책임성은 묻지 않지만 부정적 결과 그 자체는 인정하고 그것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은 또한 불교의 업설이 중도의 진리속에서 설해졌다는 측면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열반지향적 특성 인간과 자연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인이 되기도 하고 되기도 한다는 것은 앞서 상의상관의 법칙을 통해 설명하였다. 결국 十二處設에서 나타난 意와 法이 갖는 작용과 반응의 인과관계에서 업설의 이론적 기초를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가 그 대상인 法에 대해 가하는 작용이 곧 업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意라는 것은 곧 業의 주체적 위치에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행위적 업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근원으로서 의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의도성을 중시한 업설은 앞서 살펴본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불설의 종교적 사실성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본심에서 벗어난 행위’는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도중심적 불교의 업설이라는 입장에서 답변을 하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된다.
불교는 고통의 해결을 위한 가르침이다. ‘싱사파나무의 비유’ 나 ‘화살 맞은 이의 비유’ 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붓다는 중생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필요한 가르침만을 방편적 교설로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감수는 바로 내가 하는 것이며 그 나라는 것은 바로 意이다. 사리불은 고락의 받음에 대한 사구적 물음에 대하여 그러한 분별적 사고를 모두 비판하고, 그러한 고락의 중심에는 바로 감수작용으로서 接觸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결국 감수작용의 주체로서 意 의 중요성을 설한 것이다. 이 세상의 고락은 6근과 6경이 맺는 감수작용에 의해 발생하기에 어떤 자재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인간은 과거의 업인에 메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론적이거나 수동적으로 감내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고락의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중도의 입장에서 행위가 곧 업임을 믿고 꾸준히 닦아나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며 붓다는 이러한 중도적 대긍정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바꾸어나가는 주체로서 意業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무명을 타파하고 집착을 제거해 나갈 때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설하는 십선업이나 기타 윤리적인 교설들은 모두 그 초점이 열반에 맞추어져 있으며 불교의 업설또한 이러한 열반이라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때 교리적 모순점들도 해결될 수 있다. Ⅴ. 결론 지금까지 『밀린다왕문경』의 對論편에 나타난 메난드로스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에서 도출된 의문점들을 그 출발점으로 하여 불교업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붓다의 전생신인 로마사캇사파의 행위에 대한 해석에서 그의 행위가 찬다바티를 보고 애욕심에 휘감겨 저지른 살생행위임은 명백하다. 물론 문헌에 의하면 로마사캇사파는 직접 생육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한 바라문의 꾐에 넘어가 수백의 생육들의 희생물을 올리는 소마대공희제를 거행하였다. 나가세나 존자는 그의 이러한 행위들이 ‘본심’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행한 것이기에 큰 죄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본 논문의 출발점은 바로 이 답변에 있다. 만약 로마사캇사파가 애욕심에 휘감겨 행한 살생행위가 큰 과보를 낳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면, 나가세나는 중생들이 근본무명에 바탕하여 탐진치에 물든 미혹된 소견으로 죄를 짓게 되는 원리와 로마사캇사파가 죄를 짓게 된 과정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밝혔어야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메난드로스가 제시한 붓다의 전생담인 자타카의 진위문제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자타카가 당시 민담과 설화들에 등장한 영웅들이 대승불교의 흥기라는 배경에 맞추어 붓다에게 가탁되면서 성립되었기에 그 설화가 모두 붓다의 전생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대론도 오늘날 그 사실성이 의심되고 있으며 오히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집필된 논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여기서 밀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대론의 사실성을 인정하고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이 가지는 배경을 추측해 보면, 그는 상좌부 계통의 논사로서 자타카에 나타난 두 불설의 사실성을 헤치지 않으면서 개인의 意業을 중시한 불교적 업설의 특징을 메난드로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을 불교적 업설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 본심(자각)의 의미를 ‘선악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 ‘의지나 의도로서의 자각’ 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해보았다. 살펴하였고 다시 선악과 행위가 가지는 관계와 의도와 행위가 가지는 관계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불교의 선악개념이 7불통계게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재가인들을 위한 사회윤리로서의 선악의 윤리와 궁극적 선으로서 열반의 추구라는 단계적 구조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불교업설의 특징을 연기에 바탕을 둔 중도설로 파악하고 불교업설에 나타난 선악개념에 대하여 『라운경』의 경설을 바탕으로 구분된 Weeraratne의 7가지 구분론을 분석해 보았다. 여기서 불교의 선악론은 행위자와 행위대상자 양쪽 모두의 가치를 존중하는 중도적 교설임을 발견하였고, 의도와 행위의 관계에 있어서 업인의 형성과 같은 윤리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는 불교의 업설이 동기설이라 판단하였다. 하지만 비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비록 업의 인을 거론하진 않더라도 부정적 상황의 방지라는 노력이 있음을 경설을 통해 발견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곧 불교의 업설이 서구 윤리학적 개념에서 동기론과 결과론을 포함하는 중도적 입장에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행위의 의도로서의 동기와 의도와 비의도적 원인에 의해 발생한 부정적 결과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불교의 업설은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를 포섭하는 중도적 입장을 보여 주었다. 또한 업인의 분석에 있어서는 3종외도설의 비판을 통해 업인의 존재와 비존재라는 양극단을 초월하여 불교업설이 가지는 상의상관적 연기설의 측면을 통해 중도적 진리를 드러내 보았다.
물론 불교의 이러한 업과 윤회의 관념은 인도아리안족의 문화와 인도토착의 인더스문명이 결합하면서 형성된 고대 베다의 문헌에서도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인도 대륙내의 각 종교나 사상들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와 입장에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불교의 업보사상 또한 이러한 근본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불교의 업설은 불교성립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인도대륙의 사상적 뿌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기존의 업과 윤회의 관념에 대한 붓다의 자내증적 안목인 무아설과 중도, 연기 및 공의 원리와 함께 승화적으로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상의상관적 연기에 바탕을 둔 불교의 업설은 결국 중도라는 진리의 입장에서 밝혀진 사회적 윤리이자 심리적 수행이론으로서 번뇌의 제거를 통한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진리에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고 서 적> 1. 원전류 『緣起經』(『대정장』2, p.547中) 『玘經』(『대정장』2, p.198中) 『出家經』(『대정장』2, p.246中) 『伽彌尼經』(『대정장』1, 439中) 『十二因緣經』(『대정장』2, p.101中) 『法句經』(『대정장』4, p.567上) 『羅云經』(『대정장』1, p.436上) 『思經』(『대정장』1, p.437中) 『度經』(『대정장』1. p.435上) 『중아함』<가치나경> (『대정장』1, p.553中) 『대정장』32, p.702中 『장아함』<大緣方便經> (『대정장』1, p.60上)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대정장』23, p.776中) 오분율 (『대정장』22, p.41下) 『사분율』권55(『대정장』22, p.976下) 2. 사전류 『佛敎辭典』(耘虛龍夏 著, 東國譯經院, 1989) 『국어대사전』(한갑수 감수, 교육서관, 1988) 3. 논문류 『밀린다팡하에 나타난 나가세나의 佛敎觀』(김태원,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那先比丘經硏究Ⅰ』《印度學印度哲學》(印度學印度哲學硏究會, 윤호진, 민족사, 1989) 『無我輪廻問題의 硏究』(尹浩眞, 민족사 1996) 『阿含의 業說硏究』(權容甲,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복의 불교철학적 이해』(조윤호, 학술진흥재단, 1998) 『원시불교의 종교성과 윤리성』(『印度學佛敎學硏究』Vol.19-2, 三枝充悳, 1971) 『종교적 삶에서 비의도적 죄지음의 문제』(송선영, 佛敎硏究 25, 2006) 『原始佛敎思想』(丁鍾俅, 『철학연구』 제8집, 1969. 5) 『불교윤리와 공리성의 원리』(허남결,『佛敎硏究』Vol.- No.22 [2005] ) 『불교의 생명관과 살생의 범위 그리고 배아연구의 바람직한 방향』(김성철, <배아연구와 생명윤리> 세미나 발제문, 2006)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小考』(상덕,『僧伽』Vol.12 No. [1995] ) 『생명공학에 대한 불교윤리적 조망』(김성철, 불교문화연구, 제3집, 경주, 동국대불교사회문화연구원, 2002) 『佛敎業說에서의 動機論과 結果論』(朴京俊, 『佛敎學報』Vol.29, 1992.11) 『佛敎와 耆那(Jaina)敎의 業說 비교』(權五民, 『東國思想』Vol.12 [1979.12]) 『初期佛敎의 業設에 관한 硏究』(曺勇吉,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業說의 現代的 照明』(朴洪徹,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4. 단행본 『佛敎倫理學論集』(최법혜, 동국역경원, 1996) 『인도불교의 역사』상 (히라카와 아키라 著, 이호근 옮김, 민족사, 2004) 『唯識學 槪論』(李萬, 경서원, 2006) 『아비달마불교』 (권오민 譯, 민족사, 2003) 『밀린다왕문경』1, 2권 (이미령 譯, 민족사 2000) 『불교의 무아론』(한자경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계율론』(목정배 저, 불지사,1988) 『불교학개론』(교양 교재편찬위원회 編, 동국대학교출판부, 2002) 『印度佛敎史』(權五民, 경서원, 1985) 『삶과 윤리』 (이근원 外, 학문사, 1998) 『상담심리학의 기초』(이장호 外, 학지사, 2008) 『현대사회와 법』(천진호 外 공저, 法文社, 1998) 『Individual and Society in Buddhism』 W.G. Weeraratne, (Colombo, 1977), pp.34-45, Chapter 3 Criteria of good and bad (마성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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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번을 나누어서 겨우 읽어 내었습니다. 업 하나에도 이러한 많은 해석이 있고 업의 고리를 끊는데에도 자신의 무한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데 기독교인들은 신의 지시를 어긴데서 오는 그 원죄를 오로지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벗을수 있다하니 어찌보면 그들이 참 편해 보입니다. 업의 고리를 끊는 출발점 역시 자신의 본성을 찾는것에서 부터 출발 하는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