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사상이 인도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동,서양을 통해서 중도와 같은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말하는데 전혀 틀리는 사상입니다.
중용(中庸)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인데
그 책 속에서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희·로·애·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바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이 중(中)이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히 설명해 왔지만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바로 알게 되면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이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보면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불교나 유교나 도교나 예수교나 혹은
헤겔철학이나 칸트철학과 같지 않느냐고 혼동시켜 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럼 중도사상이란 다른 어떤 종교나 무슨 이론과도 타협할 수 없는
고립된 사상인가?
예수교나 유교나 도교나 회교나 또는 어떤 철학이든지 간에 각기 자기의
독특한 입장이 있으면 그 입장을 고집하여 타협할 줄 모릅니다.
그것은 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알고 보면 일체 만법이 불교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도사상을 모를 때는 유교는 유교, 불교는 불교, 무슨 철학은 무슨 철학,
유신론이든지 유물론이든지 각각 다 다르지만 중도사상을 바로 알게되면
「금강경」에서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
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도란 일체만법,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보면 예수교도 우리 불교요, 유교 도교도 우리 불교입니다.
결국 불교를 바로 알려면 부처나 마구니를 함께 다 버려야 합니다.
부처와 마구니가 서로 옳다고 싸우면 양변에 집착했기 때문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우리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부처와 마구니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입니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습니다.
그 싸움 때문에 고(苦)가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순 상극인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걸림없는 자유의 세계, 해탈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원통자재한 중도에 입각하여야 합니다.
양변을 떠나 가운데〔中〕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사상만이 오직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에 理自顯이요 據顯理에 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望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 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 버리는 쌍차(雙遮)를 말하며,
정리(正理)가 나타난다 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 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雙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雙照),
즉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첫댓글 불교의 중도(中道)와 유교의 중용(中庸)은 비슷하여 개념상 혼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많이 혼용하여 쓰는 것 같습니다. 중용에서 중(中)이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며, 용(庸)은 평상(平常)을 뜻합니다. 유교에서는 중용을 인간 처세의 중요한 윤리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사(子思)는 중(中)이란 희로애락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는 상태의 마음이라 하고 화(和)는 이미 발한 정(情)이 중(中)에 의해 조절된 상태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희로애락 어느 것에 치우쳐 평상심을 잃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니 평상심을 잃지 말라는 사회적 처세적 측면이 강합니다.
이에 반해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용에서 보듯 치우친 감정의 조절을 통한 평상심 찾기를 넘어 양극단에 흐르는 견해를 타파하고 바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친 쾌락을 구하는 길이고 한 가지는 지나친 고행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이 두가지 길을 버린 것에 중도가 있습니다. 흔히 두 가지 극단은 有와 無)로 대변됩니다. 불교는 연기사상에서 보듯 모든 것(實相)은 공(空)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 집착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 없다에 집착하는 것은 쓸데없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있다-없다, 좋다-나쁘다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견해는 유아적(有我的) 견해입니다.
양 극단에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적(無我的) 견해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게 됩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는 것은 무명(無明)이 가리어 반야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타파되어야 할 근본적 명제입니다. 이 무명이 타파되면 반야지혜가 생기므로 양 극단은 없어지고(雙遮) 유무가 융합된 중도가 살현된다는 것입니다.(雙照)![^-^](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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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님, 감사합니다. _()_![^-^](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