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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김정우 교수님이 소개하는 전도서 주석들입니다.
◈ Barton, G. A. Ecclesiastes. ICC. T & T. Clark, 1908. Pp. xiv + 212쪽.
바톤의 <전도서 주석>은 20세기 초의 역사비평학적 관점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 작품이다. 저자는 치밀한 본문비평적 작업과 상세한 주석을 하고 있으며, 학문 용으로 쓰여졌다. 그는 전도서와 그리스 사상의 밀접한 연관성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 Crenshaw, J. L. Ecclesiastes. OTL.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7. 192쪽.
크렌샤오는 듀크 대학(Duke Uni)의 구약학 교수로서 평생동안 구약의 지혜문학 분야 연구에 바쳐 왔으며 특히 전도서에 대해 가장 심도 있는 통찰을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있다. 그의 주석은 온건한 비평적 접근을 하지만 탁월한 주석을 제시하며, 지나치게 전문적이 아니면서도 심도 깊은 통찰을 담는다. 섬세한 주석과 성숙한 신학적 사색이 담겨 있다. 저자는 전도서에 대해 미세 정보 뿐 아니라 가장 최신의 자료까지도 소개한다. 이어 이 책의 성격, 가르침, 문학적 형식, 저작권, 역사적 배경, 정경화의 과정, 의의 등 서론적인 주제를 다룬다. 크렌샤오에 따르면, 전도자는 독특한 문학적 표현과 일관성 있는 신학적 논증과 주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이 하나의 형식 (예, 왕의 유언)으로 전체를 풀 수 없고, 세심하게 짜여진 문학적 구조를 드러낼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여기에는 개인적 관찰이 지배적이며, 핵심 단어와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으며, 말씀의 묶음들이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또 서로 상충되어 나타난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책 안에 있는 갈등은 후대 편집자의 침입이 아니다 (그렇지만 표제 [1:1], 두개의 후기 [12:9-11, 12-14], 아마 표어 [1:2, 12:8] 그리고 몇개의 첨가들 [2:26상; 3:17상; 8:12-13; 11:9하; 아마 5:18]은 예외이다). 오히려 갈등은 변화는 상황을 반영해 주며, 지혜의 스승은 새로운 경험과 발견을 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있다고 본다. 1인칭으로 말하는 화자는 한결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크렌샤오는 무덤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요소임을 본다. 전도자는 지혜가 인생에 안전을 준다는 가르침을 부인한다고 본다. 즉 도덕적 질서가 현실을 지배하며 상선벌악이 존재함을 부인한다. 전도자는 "헛됨"을 지속적으로 말한다. "헛됨"(hebel)은 "쓸모 없음"이며, "모순"이며, "유한성"이다. 크렌샤오는 전도자가 인생은 무가치 하고, 모순되며, 궁극적으로 의미 없다고 말한다고 본다. 전도서의 저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도덕적 성격이 일관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와 같이 우리도 회의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저자는 본다 (23, 53쪽). 왜냐하면 전도서 13:13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석은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의 개요에 따라 단락을 나누고, 각 단락에 대해 저자의 사역을 제시한다. 그의 번역은 형식적 일치(formal correspondence)와 역동적 동등성(dynamic equivalence)를 아름답게 잘 섞고 있다. 핵심 단어와 구절에 대해 방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저자의 히브리어와 고대 근동 아시아의 지혜 문헌에 대한 지식이 해박함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독특한 점은 그가 전도자의 메시지를 순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의 비정통적 성격이 이 책의 가치이다. 우리 생의 모호성과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은 전도자를 더욱 우리에게 가갑게 만들고 있다. 전도자가 무덤 대신 인생을 축하하는 점을 강조했다고 보는 자들은 크렌샤오와 전혀 다른 해석을 할 것이다. 아마 이 책은 전도서에 대한 최고의 주석으로 여겨질 것이다.
◈ Davidson, R. Ecclesiastes and the Song of Solomon. The Daily Study Bible.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Pp. vii + 160.
데이빗슨은 "전도서와 아가서"를 함께 묶어 주석한 이유에 대해 전자는 "인생에 대해 편견을 가진 책"이며 후자는 "열렬한 사랑과 홀림의 찬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책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두 감정을 신선할 정도로 정직하고 건강하게 탐구하고 있으며, 우리 인생은 답이 없는 질문들과 그 격정 뿐 아니라 그 기쁨과 좌절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1-2쪽). 데이빗슨은 각 단락에서 먼저 서술적인 제목을 하나 달고, 이어 본문을 제시한 후 단락에 대해 전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설명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전도서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 Eaton, M. A. Ecclesiastes. TOTC. Leicester: IVP. 1983.
이 책은 비전문가들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서, 저자는 본문에 아주 좋은 통찰들을 많이 담고 있다. 틴델일 시리즈의 책이므로, 보수적인 입장으로 쓰여졌다. 목회자를 위해 쓴 책이므로 저자는 전도서에 대한 정통적 입장으로 접근한다. 이리하여 회의주의가 제시되면, 이것은 전도자가 결국 절망으로 인도하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병치시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턴은 전도서의 일관성 문제를 부정적인 관찰을 전도자가 예배를 떠난 지혜의 부적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법으로 처리함으로써 해결한다. A見?C臼ⓒ 이턴은 전도서 전체를 설교자를 위한 책으로 구해내었다. 마지막 후기에 대해 이턴은 이것이 전도자의 훈련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가 친필로 쓴 것으로 본다. 이 책의 약 1/3은 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장은 치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마소라 사본의 진정성을 다루며, 쿰란의 이독을 제시한다(NOTED). 그는 전도서가 가명 (혹은 필명)의 작품이 아니며, 이 이유 때문에 솔로몬의 이름을 피한다고 본다. 이 대신에 "설교자" (혹은 "전도자")라는 이름을 쓴다 (68쪽). 저자는 그가 "솔로몬의 가상적 저자"(Solomon's ghost writer)라고 한다. 언어학적인 근거에 의해 전도서를 후대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확정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경성에 대해 그는 "내재적 정경성"(inherent canonicity)과 "정경성의 인정" 문제를 구별하고 있다. 전도서의 수수께끼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가지 갈등을 일으키는 해석을 하게 한다. 이턴은 전도서가 복음전의 메시지(a preevangelistic message)를 전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본다. "이 책은 변증적인 에세이 이다. 저자는 느거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삶에 대한 정반대의 대안을 지적함으로써 참 신앙을 옹호한다." 이런 입장은 전도자가 아무런 통합도 하지 않은채 두개의 상반된 견해를 열거하고 있다는 입장 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인다. 본문에 대한 주석을 아주 명료하다. 어려운 구절도 잘 처리하며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시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전도서를 오늘날의 상황에서 다시 증거한다. 그러나 저자는 전도서의 저자가 "기쁨의 설교자"가 되어야 전도서가 정통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진다. 3:1-15은 절망의 표현이라기 보다 긍정적인 가르침으로 여겨진다.
◈ Farmer, Kathleen A. Who Knows What Is Good? A Commentary on the Books of Proverbs and Ecclesiastes.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1. Pp. xii + 220.
파머의 주석에 대한 서론적인 소개는 앞 호에 나온 <잠언서 주석 소개>를 보라. 그녀는 전도서에 대한 수많은 상이한 해석법들을 잘 열거하며,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녀는 핵심적인 히브리어 hebel이 "무의미성" 혹은 "덧없음"을 뜻할 수 있다고 본다. 그녀는 "당신 스스로 결정하십시오"라는 태도를 가지며 해석하고 있다 (146쪽). 이 주석은 좋은 주석이나, 지나치게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불필요하게 보인다. 파머는 특히 "지혜자의 말씀"을 히브리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이리하여 지혜자의 지혜를 우리 시대와 우리의 종교적인 이해와 연결시키려고 한다.
◈ Fox, M. V. Qohelet and His Contradictions. Almond. 1989. Pp. 384.
팍스는 1972년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전도서와 지혜 학교와의 관계"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부터, 오랫동안 전도서에 대해 여러 종류의 글을 써 왔으며, 이제 자신의 주석으로 전체적인 시각과 사상을 다 담고 있다. 이 책은 모두 서론을 포함하여 여섯 장으로 나누어졌으나, 크게 두 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제 1부로 여겨질 수 있는 서론부터 제 4장까지는 전도서를 전체로 다루면서, 핵심적인 주제에 대해 감질나는 그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핵심어인 hebel이 "헛됨"이나 "무의미"가 아니라 "모순"을 뜻한다고 본다. 제 2부로 여져질 수 있는 제 5장은 주석으로서 팍스는 어휘의미론과 본문비평, 구조, 해석을 담고 있다. 팍스는 전도서를 "테두리에 담긴 독백"(a framed monologue)으로 본다.
◈ Garrett, Duane A.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Press, 1993.
개렛의 <잠언서, 전도서, 아가서> 주석의 전체적인 성격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잠언서 주석 소개>에서 다루었다. 그는 전도서 주석 부분에서 이 책의 저작권과 작품 연도를 다루며, 본문, 구조, 문체와 신학과 그 목적을 다룬다. 개렛은 전도서의 저작권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하면서, 솔로몬 저작권에 대한 반증이 솔로몬 저작권을 배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구약 속의 영주권자"로 여겨지는 전도서의 위치에 대한 고발에서 전도서를 "시민권자"로 지키려고 한다. 그는 전도서가 "귀족층 청중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본다. 전도자는 부한 관료들에게 그들이 인생에서 항구성과 가치를 이미 획득하였다고 인식하는 것은 허상임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개렛은 전도서가 창조와 타락의 지속적 의의에 대한 사색을 한 것을 기본적으로 묶은 것으로 본다. 그는 전도서 속에 "여러 개의 주제들이 떠돌아 다닌다"고 보며(270쪽), 이것들을 33개로 분류된다고 보며, 이 모든 것들은 서론과 결론에서 "해 아래어 하는 모든 것들이 무상하니, 따라서 최종 분석에서는 헛되다"는 이 책의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본다(343쪽). 그는 핵심어인 hebel을 "헛되다"고 번역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으며, "김빠졌다"(vapid)거나 "모순되다"고 번역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아마 이 단어는 아가페나 코이노니아처럼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고 말한다. "헛됨"은 허무주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목적에 대해 그는 "비록 인생이 가끔 인위적이지만, 절망과 냉소주의는 정당한 반응이 아니다. 지혜로운 독자들은 인생이 제공하는 좋은 것을 즐기면서도 하나님을 계속하여 경외할 것이다. 전도서는 실패한 영생추구에 대한 보고서로 묘사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277쪽). 나아가 그는 "전도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받아들이라고 한다"(278쪽). 궁극적으로 전도서는 창조와 타락의 지속적인 의의를 반추한 것으로서 신학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창세기를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 Gordis, R. Koheleth: The Man and His World. New York: Schocken. 1951, 1968.
고디스의 <전도서>는 1912년 Podechard (Paris)가 <전도서 주석>을 쓴 후 새롭게 쓰여진 고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 고디스는 "서문"(vii쪽)에서, 그가 전도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드랍시 대학(Dropsie college)에서 그의 스승 마골리스(M. L. Margolis)의 자극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신비롭고 흥미로운 책에 대해 20년 이상의 연구를 하게 되었고, 그 자신이 이 책에 대해 쓴 수많은 글들을 나열하고 있다. 고디스는 서론 부분에서 저작권, 언어, 연도, 히브리 사상에서의 위치, 전도서와 그리스 및 이집트 사상, 통일성, 전도자라는 사람과 세계관, 히브리어 본문과 역본 등을 다룬다. 저작권에 있어서 고디스는 솔로몬 저작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도서는 예루살렘에 사는 한 유대인이 히브리어로 쓴 책이다. 그는 아람어는 알았지만 그리스어는 몰랐다. 아마 그가 그리스 사상의 기본에 대해서는 친숙했던 것 같다. 이 책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쓰여진 것이며 주전 3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68쪽). 그가 볼 때에는 후대 언어들이 여기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도자가 "부유한 집안의 귀공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글로 본다. 그는 주석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도서 전체에 대해 새로운 번역을 제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문을 모음 부호 없이 함께 삽입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주석 부분에서는 절 별로 어휘의미와 문법적 구성과 본문비평 문제와 다양한 해석들을 다룬다. 이어 그는 참고문헌들을 총체적으로 소개한다.
◈ Hubbard, D. A. Ecclesiastes, Song of Solomon. The Communicator's Commentary Series. Dallas: Word Books, 1991. 351쪽.
이 주석 시리즈는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을 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휴바드의 책은 이 시리즈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꼽힐 것이다. 휴바드는 풀러 신학교의 학장으로서 (그 당시), 전도서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과 수많은 비유법들을 탁월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구절들을 피해나가지도 않으며, 몇가지 가능한 해석들을 제시해 주고,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을 제시해 준다. 그는 히브리어에도 조예가 깊어서 적절한 주석적 의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휴바드는 "설교자"(전도자 대신)에 대해 그가 주전 400년에서 250년 사이에 살았던 성인이라는 마이클 팍스의 견해를 따른다. 코헬렛은 솔로몬의 인격 혹은 가면을 쓰고, 솔로몬의 제자들에게 호소하며 그들의 사고에 있어서 잘못된 점들을 고치려고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사색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석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전도자의 허무를 넘어 역사하시는지 멋있게 다루고 있다.
◈ Kaiser, W. C., Jr., Ecclesiastes: Total Life. Chicago: Moody, 1979. 128쪽.
오랫동안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친 카이져는 20세기의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플라스틱 같은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있는 자들에게 전도서가 답을 준다고 본다 (9쪽). 특히 이 책은 오늘날의 대학생들을 흥분시킬 수 있으나 (9쪽), 또한 당황케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것들을 헛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정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면 (믿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 계획과 목적을 전도서를 통해 알게될 것이라고 한다. 카이져는 서론에서 이 책의 통일성, 저자의 결어, 주제, 후렴, 논리와 본문 상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는 전도서 속에서 "사중적 구분"을 발견하며(1:2-2:26; 3:1-5:20; 6:1-8:15; 8:16-12:14), 이것들이 "공식적인 후렴"(2:24; 5:18; 8:15)으로 끝맺는 것을 본다 (21쪽). 그리고 이 큰 단락들은 일련의 말씀들이나 관찰들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2:13-14에 있는 결론에 도달하는 논증"을 갖고 있다 (43쪽). 따라서 그는 앞에 있는 사중적 단락이 모두 결론의 빛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 Kidner, D. The Message of Ecclesiastes. A Time to Mourn and a Time to Dance. B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76. 110쪽.
키드너는 구약성경의 "소리"(voice) 속에 수많은 "강세들"(accents)이 있다고 본다. 선지자들의 소리는 격정적이며, 지혜자는 냉정하고 반추적이며, 이 둘 사이에 시와 율법과 이야기와 환상들이 있다고 본다 (13쪽). 그러나 그 중에서 코헬렛과 같은 자가 없으며, 전도서가 "결코 끝나지 않는.... 깊음과 신비"를 담고 있다고 한다. 키드너의 책은 전도서 주석들 중 아주 인기가 좋으며 읽기도 쉽고 여러가지 생각할 점들을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잘 던지고 있다. 전도서를 강해할 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Loader, J. A. Ecclesiastes: A Practical Commentary. Text and Interpretation. Trans. by J. Vriend. Grand Rapids: Eerdmans, 1986. vi + 136쪽.
어드만사의 새 주석 시리즈인 Text and Interpretation는 보다 정교한 최근의 성서학자들로 보다 대중적이고 실천적인 글을 쓰게 하고 있다. 로드는 프레토리아 대학의 셈어학 교수로서 이미 전도서에 대해 구조분석적인 작품을 쓴 적이 있다 (Polar Structure in the Book of Qohelet [BZAW 152; Berlin: W. de Gruyter, 1979]). 이 책에서 그는 전도서가 "정반대의 갈등들"(polar tensions)로 짜여져 있으며, 한 사상이 주어지면 즉각적으로 그 반대의 사상이 뒤따라 나온다고 보고 있다. 예로서 로드는 3:1-9에서 "보전과 생명"이 한 축을 이루며, "포기와 죽음"이 그 반대축을 이룬다고 본다. 그는 이 대립적인 구조적 축을 그의 주석에서도 도입하고 있다. 먼저 로드는 약 16쪽에 걸쳐 서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는 솔로몬 저작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30쪽), 코헬렛을 "회의 소집자"(assembler)로 번역하고,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무의미한 것을 선언하는 책으로 전도서를 평가한다. 그는 전도서를 "왕실의 픽션"(royal fiction)으로 본다 (19쪽). 그는 전도서 전체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즉 전도서 전체는 인생 일반의 무의미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며, 그 어떤 대안이나 희망은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표면적으로 긍정적인 진술로 보이는 것은 피상적인 독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로서 3장에 있는 시간에 대한 유명한 시는 단지 "좋은 때와 나쁜 때"에 대한 대립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 따라서 그는 결어(12:9-14)가 과거시제와 삼인칭으로 말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33쪽). 그는 12:13-14은 "전도자가 정확하게 반대한 사상이므로, 이 부분은 그의 사상의 결론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135쪽).
◈ Longman III, T. Ecclesiastes.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6. xvi + 306쪽.
오랫동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친 롱맨은 예일대학에서 쓴 그의 박사학위 논문 Fictional Akkadian Autobiography (Winona Lake: Eisenbraun, 1991)에서 얻은 통찰을 전도서에 적용하여 NICOT 주석 시리즈에서 출판하고 있다. 저자는 전도서를 고대 근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나람신, 아닷-구피와 사르곤의 신이 쓴 "교훈적인 자서전" 형식과 같은 것으로 보며, 서문과 결어는 테두리 설화(frame narrative)로 본다. 즉 1:1-11과 12:8-14은 전체의 테두리를 만든 이야기꾼(frame narrator)의 작품으로서 그가 전도서의 최종저자라고 본다. 이 안에 담긴 코헬렛의 자서전적 연설은 완전한 문학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 저자가 볼 때 코헬렛은 "지혜자"이상이다 (12:8). 저자는 크게 두 부로 나누어 15장에 걸쳐 서론을 다루며, 이어 본문과 주석을 치밀하게 나누고 주석하고 있다. 본문 주석에서 그는 본문비평과 언어학적인 문제를 수많은 학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풀어가며, 좋은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정경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전도자가 주장하는 무의미성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본다. 이 책은 전도서 주석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질 것이다.
◈ Murphy, Roland E. Ecclesiastes. WBC. Dallas: Word Books, 1992. lxis + 170족.
지혜 문헌에 한평생을 바친 머피가 이제는 전도서 주석을 내어 놓았다.
"전도서는 끊임 없는 매력을 학생들에게 던지나, 성경에서 이 책 만큼 꾸준히 어떤 분석도 거부한 책이 없을 것이다... 코헬렛은 그의 이름 만큼이나 신비롭고 그가 추구하는 지혜 만큼 (물론 실패했지만, 7:23) 파악하기 어렵다. 코핼렛은 다른 어떤 성경 책 만큼이나 믿음의 질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정의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즉 전도서는 "지혜 체험과 야웨가 함께 하는 것이다"(155쪽). 머피는 서론과 번역을 포함하여 80쪽을 할애하며, 부드럽고 좋은 영어로 전도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전도서에 대한 최근의 모든 동향과 자료들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그는 전도서의 메시지를 "죽음" 대신에 "운명"(lot)으로 본다. 그는 코헬렛이 키엘케골이나 니체나 카프카 같은 우울증환자(melancholic)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결어에 대해 "이것은 코헬렛이 속한 전통으로서 그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132쪽). 즉 이 결어는 지혜 운동의 역사 속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지혜가 대중들에게서 나왔으며, 교육 기관 보다는 구전을 통해 전수된 것으로 본다. "헛됨"은 "모순"(absurd)으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 Whybray, R. N. Ecclesiastes. NCB. Eerdmans, 1989. xxiii + 179쪽.
오랫동안 구약의 지혜문헌 연구에 헌신한 와이브레이는 이제 전도서 주석을 썼다. 그는 전도자가 주전 3세기의 인물로서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며 가르친 스승으로 본다. 그는 코헬렛의 히브리어가 분명히 후대의 것이며, 코헬렛의 논증이 이전 지혜서들과 예리하게 다르다고 본다. 코헬렛은 "회의 소집자"("convener," "speaker")로서 서기관(에스라 2:55)과 같은 종류의 직업적인 칭호로 본다 와이브레이는 이 책의 문학적 통일성과 구조를 잘 다루고 있다. 코헬렛은 분명히 상충되는 진술들을 잘 엮어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코헬렛은 "현실주의자"(realist)로서 어떤 진술도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전체적인 진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코헬렛의 자료 중 대부분이 그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물론 다른 어떤 사람이 최종적인 편집을 한 것은 사실이다. 최종 편집자는 문학적인 뼈대를 마련하며 (1:2; 12:8), 아마 1:1-3과 몇몇 구절들 (7:27; 12:9-10; 12:11-14)을 제공했다고 본다. 주석에서 와이브레이는 대부분의 쟁점들을 잘 다루며, 핵심 용어들과 그 의미와 번역도 잘 하고 있다. 그는 수사학적인 특성에 따라 단락 분석도 잘 제시한다. 본문 비평의 차이점도 정당하게 제시하고 있다.
출처 : 21세기 카페 http://cafe.daum.net/cafe0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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