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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참으로 하느님으로서, 인생의 기준, 사회의 가치 기준으로서 받들어 모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세계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선포되고 구현되었다. 예수님께
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당하신 후 갈릴래아로 오셔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고 선포하셨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구현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발하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세력을 나타내는 징표로써 악신(惡神)들을 몰아 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종말론적 증거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열둘'이라는 숫자가 지니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하겠다. 이스라엘인들 에게 있어서 열둘이란 수는 완전한 충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열두 부족의 동맹 체제를 이루며 살았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세 개의 부족들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열두 부족의 동맹체 복구라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숙원을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의 선발로 승화시켰고, 이를 만민을 위한 보편적인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선포하셨던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상황 속에서 자주 병자들을 치유하셨는데, 이 치유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현존을 나타내는 표징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회에 서 소외받고 있던 가난하고 모멸받는 천민과 죄인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가 이 미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다가왔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가난한 사람들 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한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겸손한 사람들, 즉 자기는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말세에 나타날 결과로서의 낙원이 아니라, 이 지상 생활의 한 가운데 세워져야 할 하느님의 지배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시작부터 완성된 형태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의 또 다른 대목을 읽어보기로 하겠다. 13장 31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또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앗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그것은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 그러나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커져서 나
무가 됩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다....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한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고 계신다. 우리들은 오늘 날 세상이 이렇게 험해지고 부조리와 악이 만연해 있는데, 하느님의 나라가 과연 어디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서 아주 미약하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힘차게 성장해서 마침내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게 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가 가진 유일한 지향은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한 것'(현대세계의 사목헌장 45항)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위하여 투신해야 함을 의미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 나라가 교회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고, 하느님의 뜻이 성취 되는 곳이라면 언제나 어느 때나 실현되는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에 의해서 생겨나고 하느님에 의해 서 완성될 것이지만, 그 실현을 위한 성장 과정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의 협력을 요구하신 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통치가 도래하는 데 있어서의 공동 협력자인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노력들이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위해 어떠한 공헌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우리의 그러한 노력들이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어떤
의미 있는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세상과는 분리된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가정과 사회, 세상 안에서 수많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생활한다. 세상 안에서 고통받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기만이 깨끗하고 경건하게 생활하여,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교회가 현세의 부정과 불의를 외면한 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말세의 행복에만 희망을 두고 부당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에는 무관심할 것을 가르친 적이 없었는가 반성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허공에 뜬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것이다.
요즘 전인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전인(全人, Whole Man)으로서 인간을 대상으로 말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구분(Distinctio)은 가능하지만 결코 분리(Separatio)할 수는 없는 다섯 가지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성적 차원, 심리 -정서적 차원, 신체적 차원, 사회적 차원, 그리고 영성적 차원의 다섯가지이다. 이 다섯가지 차원이 통합되어서 하나의 전인적인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도 이 다섯 가지 차원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 나라도 이 다섯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개인적이고 영성적 차원에서만 하느님 나라를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노력 역시 이 다섯 가지 차원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기도 생활에 충실하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함은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위한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매우 막막 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사회의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속에 살면서 그 생활 양식을 전수받았다. 우리는 독이나 약 모두를 이 사회와 함께 마시고 살아간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험지옥과 같은 입시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될 수 있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 소비 사회의 낭비를 반대하지만 상점에서 상품 하나를 사는 일 자체가 그러한 사회 구조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렇듯이 우리는 마치 큰 바다에 떠 다니는 해초와도 같이 사회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바위에다 계란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무에서 천지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 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며 마침내 는 이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하였지만 '아직 아니'(Not Yet)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렇듯이 완성의 도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맛들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생활이어야 하겠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상이 보장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지 숨
겨 두고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 또한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비슷하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
자 물러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예수님의 진복선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5장은 이 진복선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생활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산상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써 제시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마태오복음 5장 38절에서 39절, 43절에서 45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
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
에게 다른 편을 돌려대시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여 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 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은 참으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 하듯이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생활 양식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규칙과 계명처럼 억지로 사랑해야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애를 써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많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한사람 한사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이 변화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생활양식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할 때 틀립없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데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고 어떠한 생활 양식을 이루고 있는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자 반성해 보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변화될 때 교회가 변화되고 마침내 세상이 변화될 것임을 굳게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두움과 악의 세력이 만연하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들, 즉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경제성장과 번영, 능률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사회, 너무도 시끄럽고 분주하게 우리 를 일로 몰아 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더욱 빼앗아 가는 사회, 자기의 이익과 성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필요없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살시키려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 의(義)를 찾아가는 것, 자기의 이해와 관계없이 참으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께서는 설령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혁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써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위해 살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철시키셨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우리의 삶과 죽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증거해야겠다.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1983(2)
2. 심상태, 한국교회와 신학, 성바오로출판사, 1988
3. 이봉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분도출판사, 1991(6)
4. Richard P.McBrien, 사목직이란?, 이봉우 譯, 사목총서7, 분도출판사, 1989
5. Gerhard Lohfink,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譯, 분도출판사, 1985
6. 김웅태 編著, 가톨릭교리, 도서출판 지혜, 1991
[출처] 하느님 나라의 완성 |작성자 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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