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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가 주간하고 신한일보 사가 후원한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6박7일 간에 걸쳐 다년온 적이 있다.
영등포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다.
이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았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 경치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여행은 문외한이었다.
순둥이라 할 수 있었다.
부산 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부관페리 국제선 여객터미널로 이동했다.
전국의 국사담당 교사들이 속속 모여들기시작했다.
부관페리 부산 국제선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갓 넘어가고 있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부관페리에 승선했다.
부관페리는 부산 항과 시모노세키 항을 왕복하는 정기 여객선이다.
가방을 사물함에 보관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뱃전을 유유히 날고 있었다.
그런데 부관페리 갑판 위에서 고향 선배를 만났다.
고향선배는 전라남도 광주직할시 살레시오 고등학교 국사담당 교사다.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반가왔다.
대학 동기도 만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여행은 혼자가 아니었다.
출국수속이 끝났는지 부관페리가 움직이기시작했다.
후진한 가 싶더니 방향을 바로잡기시작했다.
파도가 갈라시기시작했다.
부산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오륙도가 희미하게 보였다.
엔진이 가속되기시작했다.
선수가 힘차게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기온이 낮아지고 날씨도 어두워지기시작했다.
파도는 느슨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도가 선체에 부딪치면 무거운 물체가 강타하는 것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파도와 충돌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부터 시작된 파도가 페리를 강타 하고 있었다.
부산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예고를 하고 있었다.
여행 초반부터 기를 꺾고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있다.
갑판위는 대낮처럼 환하게 전등이 켜져 있다.
전등 불을 보고 멀리서 갈매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부관페리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던졌다.
재빨리 낚아챘다.
한 두번 해본 것 같지 않았다.
하늘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들 뿐이었다.
부관페리는 파도를 가르며 세차게 이동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하늘에 떠있는 별들 뿐이었다.
옛날 항해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망망대해를 항해 했을까?
그것은 별이었다.
별이 가까이에 있었다.
손으로 잡을 것도 같았다.
속삭이는 듯 다가왔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추위도 엄습해 왔다.
방으로 내려왔다.
방은 침대가 없는 다다미 방이다.
여기서 50명 이상이 잠을 잤다.
그러나 잠이 쉽게오지 않았다.
주변에서 속삭이는 잡답때문이었다.
그리고 엔진소음도 한 몫 했다.
그래도 눈을 붙여야했다.
비몽사몽이었다.
페리는 밤새 시모노세키항을 향해 이동했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했다.
그러더니 엔진소리가 약해졌다.
시모노세키항에 다까워지고 있었기때문이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하얀 안개가 항구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나라 어느 항구 와도 비슷했다.
우리가 이동해온 항로를 이용해 일본 사람들은 조선을 왕래했다.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을 경영하기위해서다.
조선시대 통신사 사절단도 이 항로를 이용했다.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은 통신사와 수신사가 있다.
통신사는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수해주기 위해서고 수신사는 그 반대다.
세종 이후 왜구는 끊임없이 조선을 침략해 약탈해갔다.
그 피해는 엄청 컸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일본과의 조약을 강화시켰다.
그런데도 1555년 조선왕조 명종 때 왜구는 6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해남 군 남창 리(달량포)로 침략해 주민들의 재산인 가축을 약탈하고 주거지를 소각시켰다.
그 과정에서 장흥부사가 전사했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조선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끈질기게 사절단 파견을 요청했다.
사절단 파견이 다시 부활된 이유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서인을 대표한 정사 황윤길과 동인을 대표한 부사 김성일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사와 부사는 의견이 상충되었다.
정치성향이 다르기때문이었다.
1591년에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는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나 내용은 상반되었다.
서인 이었던 정사 황윤길은 “왜적 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 같다”라고 주장을 했고, 동인 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보고서를 냈다.
그러면서 부사 김성일은 “민심을 동요시킬 필요가 있는가?”라며 부연했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의견을 채택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 가도’가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통신사는 쓰시마 해협을 횡단하여 대마 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식재료를 보충하기위해서다.
우리 일행은 쓰시마 섬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시모노세끼 항으로 이동했다.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생각하며 시모노세키 항구를 지켜보고 있다.
일본 입국심사는 오전 9시가 넘어야 가능하다.
세관업무가 그때부터 시작되기때문이다.
일행은 선내서 식사를 신속히 마쳐야했다.
입국절차에 대비하기위해서다.
조식 후 일본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다.
소나무나 대나무 등 모든 식물이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의 문물을 접해보지 못한 무지 탓이었다.
이곳도 인간이 살아가고 있었다.
산천초목도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네 하고는 현저히 달랐다.
모든 것이 선진화되어 있었다.
여행기간 중에 오사카 한인학교를 방문했다.
대학동기를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기뻐서 둘이 얼싸안았다.
그 기억은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한인학교 방문 후 우리민족의 영혼이 남아있는 다카마쓰고분으로 이동했다.
고구려 수산리고분 벽화와 비슷한 다카마쓰고분 벽화를 감상하기위해서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은 고구려 귀족 부부의 무덤이다.
벽화 속에는 나들이를 가는 귀족 부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수산리 고분 속 부인의 치마 주름 모양과 다카마쓰 고분 속 여인들의 치마 주름 모양이 비슷하다.
고구려 수산리고분과 유사했다.
가슴이 뿌듯했다.
우리 민족이 자랑스러웠다.
콜럼버스 Christopher 와 같은 선구자가 우리 한반도에도 존재했다.
삼국시대 때 많은 모험가들이 일본에 건너갔다.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수하기위해서다.
그 중에서도 백제가 압도적이다.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파했다.
이후 백제 26대 성 왕 때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27대 위덕 왕의 둘째아들 아좌 태자도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쇼토쿠태자는 야마토시대 때 태평 성세를 구가 했던 인물이다.
그 때 호류사(법륭사)가 건립되었다.
고구려 인으로는 담징이 있다.
그는 승려 이면서 화가였다.
영양왕 21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갔다.
불법을 강론하고 종이, 먹, 벼루의 제작법을 일본에 전수했다.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벽화를 그렸던 인물이다.
호류사(법륭사)가 가까워지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었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를 관람하기위해서 일본까지 건너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금당벽화는 발견할 수 없었다.
벽화는 소실 되어 창고에 방치되고 있었다.
이것도 금당벽화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씁쓸한 가슴을 안고 미야자키현 산속에 위치한 백제
마을로 이동했다.
백제가 패망 하면서 왕족이나 귀족 등 유민들이 일본 큐슈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남향촌에 정착 하면서 일본 고대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신라인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구려와 백제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술과 축제술을 전수했다.
삼국문화가 고스란히 일본에 전파된 것이다.
이것이 일본속의 한국 고대문화다.
일본문화 탐방을 통해 우리민족의 선구적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기때문에 일제의 조선 침략을 늘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보다 선진국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맹목적으로 일본을 비판했다.
왜구의 출몰과 임진왜란, 한일 병합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을 탐방하고 인식이 달라졌다.
맹목적인 비판보다는 우리에게 유익한 사상이나 제도는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침략행위는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선진적 사고는 수용해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사위와 딸, 그리고 외손자와 함께 두번재로 일본을 방문했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이전과 격차가 줄었다.
한국인은 두뇌가 우수하다.
모험적 이면서도 끈질기다.
때문에 머지않아 일본을 추월할 것이다.
그래서 희망적이다.
이틀동안 아마가세 료칸과 야마다야 료칸에서 숙박했다.
일본 요식 업계의 정수를 이곳에서 경험했다.
세계 사람들이 왜 일본 문화에 열광하는 지 체험할 수있는 기회였다.
구마모토 성으로 이동했다.
구마모토 성은 나고야 성, 오사카 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으로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 성은 대부분의 일본 성과는 달리 검은 외관을 갖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1400년경 부터 이곳에 있던 성들을 개축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축성했다.
장기간의 식량을 확보할 목적으로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것이 유래가되어 은행나무 성 이라고도 부른다.
구마모토 성을 관람하고 감동을 받았다.
옛 것을 중시하고 보존하려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나를 감동 시켰기때문이다.
우리도 마땅히 이것을 배우고 모방해야할 것같다.
구마모토 성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린 외손자 지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문화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 세번째 일본 여행을 추진하고 있다.
집사람 모임에서 5명이 여행을 추진하다가 1명이 펑크를 냈다.
이미 여행사 측에 여행경비를 송금한 후라 고민하다가 나를 추천했다.
그런데 모두가 여성분들이다.
7년전 터키여행 때도 이런 경우와 비슷했다.
이번 일본 여행도 터키여행 때처럼 행운이 따랐으면 했다.
일본에 대한 평소 나의 생각은 반 일본적이다.
독일처럼 전후 처리문제가 매끄럽지 못하고 있기때문이다.
어느 민족 에게나 슬픈 역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상대에게 슬픈역사를 안겨주었으면 반성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점에서 독일은 세계 일등국가다.
세계는 정치 뿐만아니라 모든 분야가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국가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평화공존을 추구 했으면 한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 소비로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
지진의 발생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엘니뇨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인간의 삶에 불리한 조건들이다.
인구도 점증하고 있다.
신기술의 계발이 이직을 촉진하고 있다.
인터넷 또한 폭발적으로 발달을 거듭하고 있다.
모두가 인간의 삶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번 일본여행의 일정은 2017년 12월 26일(화)부터 28일(목)까지 2박 3일이다.
26일(화) 08:30분에 OZ1145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해 28일(목) 22:15분에 다시 OZ1155편으로 귀국한다.
출국장소가 인천 국제 공항 이면 하고 생각 했으나 김포공항 이라서 조금은 아쉬웠다.
2017년 12월 26일(화) 오전 06:00에 김포공항 1층에서 미팅이 있다.
적어도 오전 04:30분에 집에서 출발해야하는데 이른 새벽이라서 적당한 이동수단이 없다.
양재 동에서 김포공항 행 첫 버스는 오전 05:10분에 있다.
공항까지 70분이 소요된다.
미팅시간까지 공항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다.
지하철 9호선으로 김포공항까지 이동할수도 있지만 첫출발 지하철이 오전 05:50분이다.
역시 지하철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승용차로 이동해 김포공항 주차장에 승용차를 놓아둘 수도 있다.
하지만 눈이 쌓이면 집으로 이동이 불편하다.
아직까지 공항까지 이동수단이 해결되지 않아 고민이 쌓여가고 있다.
그런데도 출국 날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김포공항으로 이동해서 근처의 호텔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숙박 비가 상상을 초월했다.
친구 중의 한 사모님이 서울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포 공항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까도 생각했다.
그래서 공항으로 이동해 근처 호텔을 찾아보았다.
롯데 호텔의 경우 하루 숙박비 만도 17만원이었다.
집사람이 주도적으로 롯데호텔을 예약했다.
하루가 지나자 숙박 비가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잠실에서 5명이 1만원씩 지불하며 김포공항까지 이동할 수 있다고 하면서 예약을 취소하자고 했다.
그러나 양재 동에서 잠실 역까지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당일 새벽 네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가도 걱정이다.
요즘 날씨가 영하권을 거듭하고 있다.
잠실까지 택시를 타야하는데 새벽 4시에 택시가 있을 까도 걱정이다.
평소 등산과 걷기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어서 건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일본 여행 첫번째는 부관페리를 이용했고 두번째는 대한항공을 이용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한다.
해외여행을 자주 했는데도 비행기를 탑승 하려면 두근거린다.
양재동 동원산업 앞에서 적어도 새벽 4시에는 택시를 승차해야하는데 일어날 수 있을 까?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