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단락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 (2:8-3:5)
Ⅰ. 자아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2:8-15)
여기서는 그녀의 죄악이나 실패를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는 영적인 노정에서 반드시 체험해야 할 단계이다. 그녀에게는 결점이 있는데, 이것은 그녀가 아직 이르지 못한 곳에 마땅히 도달해야 하나 이르지 못한 방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A. 부활의 능력(2:8-9)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8절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듣기를 기뻐하고 임재의 즐거움을 기뻐하지만, 사랑하는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없고 아직 실제적인 순복이 없다.
9절의 '영양(羚羊)'은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각주에 모두 '영양(단수의 어린 영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과 미국 표준역의 본문에는 모두 '암사슴(단수)'으로 되어 있다. '어린사슴'은 다비, 영국, 미국 등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 모두 '어린 수사슴(단수)'으로 번역했다.
주님이 사슴으로 비유된 유일한 곳은 시편 22편으로, 아침의 사슴을 말한다. 성경학자들은 모두 이것이 칠 일의 첫째날 아침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인정한다. 아침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부활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요, 영적인 생명의 새로운 기점이며 새로운 하루이다.
8절부터 9절은 부활의 왕성함을 말한다. 성경에서 산과 언덕은 어려움과 장애를 가리킨다. "그분이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달려 넘어오는구나". 이것은 어떤 큰 것이나 어떤 높은 것도 그분을 막을 수 없음을 말한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하셨고, 그분은 이미 모든 어려움과 장애를 이기셨다.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지난날에 속하고 그분은 이제 다른 날 안에 사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러한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그분의 발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분이 뛰어넘으시기만 하면 어려움과 장애는 모두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주님이 그분의 부활 능력으로 나타나 활력 있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장에서의 그녀의 체험에는 결코 이러한 것들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뛰어 보았지만, 그녀는 아직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은 이제 그녀가 이 공과를 배우기 원하시므로, 그녀를 향하여 소리를 발하며 부르시는 것이다. 그녀가 주님과 매우 친밀하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알기란 매우 쉬운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결점은 그녀와 주님 사이에 벽이 있다는 것인데, 벽이 그녀를 속에 가두고 주님은 밖에다 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이 벽의 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나의 벽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벽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인즉 나와 나의 주님의 벽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 이 벽이 그 속에 그녀와 그녀의 주님을 가두고 세상과 기타의 모든 것은 밖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때에 그녀는 주님과 안에서 교통하며, 안식도 있고, 그 안에서 기쁘고 통쾌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는 항상 자기의 마음 안에서 그녀의 주님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을 개의치 않으며, 모든 형제자매를 개의치 않으며, 모든 일상적인 본분을 개의치 않고, 많은 시련을 개의치 않을 수 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세상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녀는 단지 교통의 달콤함을 알 뿐, 결코 일의 능력과 전쟁의 흉악함을 알지 못한다. 산 위에 세 개의 초막은 있는데 산 아래의 한 무리의 죄인은 잊어버렸다. 주님은 산에서 그녀와 함께 계시고, 귀신은 산 아래서 죄인과 함께한다. 그녀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으나, 그녀의 '초막' 안의 생활은 죄인으로 하여금 귀신의 능력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의 기쁨만 찾는다. 이것이 그녀의 벽이며, 이것이 믿는 이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내주하심을 깨달은 이후에 갖는 하나의 위험이다.
우리는 결코 영적인 면에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님이 벽 뒤에 있다는 뜻은, (1) 주님은 앉아 있지 않고 서 계시는데(앞에서 주님은 앉아 계신다), 주님이 움직이실 준비가 되셨다는 것이다. '서는 것'은 움직이기 전의 준비이다. '앉는 것'은 안식하는 문제인 반면에 '서는 것'은 어떻게 일하는가의 문제이다. (2) 주님이 밖에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를 밖으로 이끌려고 하신다. 부활의 능력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넘을' 수 있으므로, 그분을 벽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제 그녀는 안에서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닌 밖에서 주님으로 그녀를 인도하시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붙잡는 것이 필요치 않고, 주님으로 그녀를 붙잡으시게 해야 한다. 그녀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주님을 따라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주님의 임재의 느낌을 의지하지 않고 살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사람은 비록 벽이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위하여 창문을 남겨 놓으신다. 만일 큰 창문이 없다면 작은 창살 틈이라도 있다. 헌신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그를 빛 비추실 방법이 있다.
벽은 나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못 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창문과 창살을 남겨 놓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신다. 벽의 의미는 당신이 주님은 안에 가두어 놓고 세상 사람은 밖에 가두어 놓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이제 그녀를 구원하시려고 그녀에게,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임재가 있을 수 있으며, 혼자 그녀 안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깊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주님의 임재는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공장에서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벽 밖에서의 태도는 어떠하셨는가? 서서 활동을 기다리셨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 계속 자신의 기쁜 느낌만 주의하는 사람은 비록 주님의 태도를 보았어도 분명하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도 깨닫지 못한다. 반드시 주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
B. 부활의 풍성(2:10-13)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자"(10절). 주님은 여기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일어나 나가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은 여기의 체험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그러한 체험을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단지 계속 이와 같이 하면 당신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고, 일단 접촉하면 안식을 잃게 된다. 오늘 이후로 당신은 '산을 달리고 언덕을 넘는' 임재를 얻어야 한다. 귀용 여사(Madame Guyon)는 "이전의 임재는 지방과 시간의 문제였으나, 현재의 임재는 지방과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은 주의 임재가 있음을 믿을 수 있고, 안의 느낌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11절에서 주님은 이미 함께 가자고 그녀를 부르셨으므로, 과거의 체험과 현재의 사실을 모두 그녀 앞에 진열해 놓으실 것이다. '겨울'은 메마르고, 춥고, 성장하지 않고, 시련을 당하는 시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앞 단락의 체험에서 주님은 이미 그녀를 인도해 오셨다. 사망과 같은 각종 시련과 추위와 메마름에서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그녀를 인도해 오셨다. 주님은 아주 분명한 임재로 그녀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겨울을 지나게 하셨다.
이 '비'는 결코 봄비가 아닌 겨울비로, 당신을 춥게도 할 수 있고 눈으로 변할 수도 있다. 겨울비는 사람을 가두어 두며, 사람으로 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비는 틀림없이 시련을 가리키는 것이다(창 6-7장, 마 7:25-27). 주님은 우리에게, 과거의 너희의 그 많은 시련이 느낌에서의 임재로 인해 이미 지나갔다고 말씀하신다. 겨울비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1) 현재의 십자가가 이미 지나갔음을 말하고(시련이 이미 지나간 것을 가리킴), (2) 주님의 십자가가 이미 지나갔음을 말한다
(주님의 십자가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계속 죽음의 방면을 주의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12절과 13절에서 주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는 뜻은, 이제 너는 마땅히 부활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봄'은 죽고 부활한 것으로, 너는 이제 부활의 경지(境地)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부활의 광경인데, 이는 이것이 겨울 이후의 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겨울을 말하지 않고 봄을 말했다면, 단지 '살아 있음'일 뿐이겠지만, 먼저 겨울을 말하고 나중에 봄을 말했기 때문에 '부활'인 것이다. 주님은 그녀에게, 그분의 부활 안에 이렇게 많은 것이 있으니 다시는 겨울의 죽음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건조함을 주의하지 말라고 알려 주신다.
'꽃'은 아름다운 장식이요, '새'는 노래하는 소리이다. 꽃은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며 새는 하늘에서 노래하는 것이다. 꽃은 예술이요, 새는 음악이다. 마태복음 6장에 따르면, 꽃과 새는 모두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시는 것들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이 노래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반구의 소리'는 마치 찬미의 소리와 같으며, 사랑을 표시하는 소리이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겨울 열매이다. 즉 죽음을 거친 열매요, 죽음을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열매로서, 십자가와 시련을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열매가 바로 이 열매인 것이다.
포도나무는 막 발아하여 꽃이 핀 상태로 현재의 상황이다.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는 것은 결실의 약속이 충만하며 결실에 아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포도나무의 꽃은 아무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이미 열매를 맺은 것이다. 다른 나무에 핀 꽃은 꽃이 피었다고 해서 반드시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에 핀 꽃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부활의 위치이다. 모든 죽은 것은 이미 다 지나갔다. 앞에 무한한 희망이 있다.
주님은 부활의 풍성에 근거하여 그녀가 나갈 것을 권하신다. 그녀는 단지 느낌에서 즐거움만 고려해서는 안 되고, 이제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지금은 소극적일 때가 아니라 적극적이어야 할 때요 나가야 할 때로서, 세상에서 그분의 생명을 나타내야 한다.
C. 십자가의 부르심(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14절에서, 이전에는 단지 그녀의 눈이 비둘기 눈과 같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녀 자신이 비둘기라고 말한다. 주님은 그녀가 이르러야 하는 위치에 근거하여 그녀를 그렇게 부르신다. 만일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다면, 그녀는 참으로 성령의 생활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를 이같이 부르시는 것이다.
'바위 틈'은 갈라져서 생긴 틈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녀가 아는 십자가가 충분히 깊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에서 시적인 말을 사용하여 그녀에게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 뜻은, 위에서 말한 부활의 능력과 풍성을 이제 네가 본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얻고, 나중에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과 아가서 2장 8절부터 14절은 서로 부합된다. 이 십자가는 완전히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분은,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얼굴과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낼 수 없고 여기서만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모형(틀)이 완성할 바이다.
주님이 첫 번째 단락에서 만족스러워하시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 단락에는 헌신이 있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는 뜻이 있는데, 지금은 마치 그녀를 십자가로 인(印)치려는 듯하다. 얼굴은 사람이 보는 것이요, 소리는 사람이 듣는 것이다. 얼굴과 소리 모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나타나야 한다. 여기의 강조점은 십자가와 하나 됨(연합됨)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녀의 십자가가 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난 아주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체험상으로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거쳐야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듣고 보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이 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거쳐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곧 부활이다.
주님의 뜻은, 그녀가 다 좋으나 여전히 경박(輕薄)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중하고, 헌신의 범위가 얼마나 크며, 주님의 약속 안에 어떤 뜻이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전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어야 한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소리는 한 면으로는 기도이고, 다른 한 면으로는 찬미이다(아 2:14). 첫 번째 단락은 거의 모두가 여인의 갈망과 추구로서, 그녀는 줄곧 왕을 얻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거기서 왕은 단지 그녀의 눈이 비둘기 눈과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많은 찬미가 다 왕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락은 '여인의 왕'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왕이 중심으로서, 그녀는 마땅히 왕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단락은 여인이 어떻게 중심이 되는가이고, 지금은 왕이 어떻게 중심이 되는가이다. 여인은 단지 왕에게 예속되었을 뿐이며, 그녀는 응당 왕의 마음을 만족케 해야 한다(그녀는 이미 왕을 얻었고 만족을 얻었다). 지금은 여인이 왕을 사모하고 왕을 감상하는 때가 아니라, 왕이 그녀를 감상하고, 그녀를 보고, 그녀를 사모하는 때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나를 위했으나,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다.
이제 주님은 그분의 수고의 공로를 얻어 그분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가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암시하신다.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으로 오도록 부르셔서 그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녀가 자신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느낌에서 벗어나며,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그녀를 일으키신다. 주님은 그녀가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그녀에게 주는 정결한 새 창조를 나타내며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기를 원하신다. 이제는 그녀가 포도주의 집에 있을 때가 아니고 마땅히 주님을 위하여 생활해야 할 때이다.
일어나서 무엇을 하는가? 일어나서 중심을 바꾼다. 그 뜻은, 오늘 이후로 주님을 더욱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살 때 다름 아닌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생활을 살아 내어 주님으로 감상하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는 결코 우리 개인의 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께 속한 모든 사람을 감상하시는 것이다.
"네 소리가 달콤하고('부드럽고'는 '달콤하고'로도 번역할 수 있다)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것은 결코 그녀의 소리와 얼굴이 천연적인 면에서 달콤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음으로써 생긴 달콤함과 아름다움으로서, 곧 그녀가 십자가의 죽음 안에 있음으로써 높은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위 틈'이 갈라졌기 때문에 그녀가 숨을 수 있는데 이것은 연합을 나타낸다. '은밀한 곳'은 완전히 내적인 문제로, 이것은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합쳐서 말한다면 완전한 연합이다.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확실히 승천을 가리키는데,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다(골 3:3-4). '낭떠러지'를 어떤 사람은 '높이 오르다'로 번역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수 없는 곳'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것이 승천 곧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임을 보여 준다. 낭떠러지는 높고 험준한 곳으로 보통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이다. 낭떠러지는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것은 에베소서 2장의 '하늘에 앉히시니'(6절)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체험을 주의한다. 주님은 항상 십자가의 생활과 승천의 생명을 요구하신다. 주님이 여기서 그녀의 소리가 달콤하고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완전히 십자가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그 뜻은, 그녀가 여기서 십자가의 처리를 받고 죄악과 천연적인 것을 벗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나온 모든 죄악과 천연적인 것이 모두 처리되었다. 오직 부활한 것만 남았고, 모두 새 창조 안에 있다. 이것이 곧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의 달콤한 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매일 매일 십자가의 처리를 받음으로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부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생명을 잃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부활 생명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아담에게서 온 많은 것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문제는 얼마나 얻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잃었는가이다.
주님은 즉시 그녀의 소리가 달콤하고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씀할 수 없으시다. 주님은 그녀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녀가 밖의 것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4절의 '…이다'는 원래 십자가가 있은 후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가 잃는 곳이다. 부활을 거친 사람만이 비로소 잃을 수 있다(죄인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므로 부활을 전하고, 믿는 이에게는 잃는 것이 필요하므로 십자가를 전한다).
D. 장애를 제거함(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15절의 이러한 말들이 사랑하는 자가 한 것이라면 2장 13절의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에 이어진다. 여기의 '우리'와 2장 12절의 '우리'는 어조가 같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명령조이다. 큰 여우는 전적으로 열매를 먹지만, 작은 여우는 기회만 있으면 포도나무 가지를 꺾는다. 큰 여우가 열매를 먹으면 당신이 다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지만, 작은 여우는 당신으로 하여금 열매 맺을 가능성조차 없게 한다. 만일 이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부활 전의 십자가의 생명과 부활 후의 승천의 체험이 모두 작은 여우에 의해 망쳐질 것이다.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함이라"(원문 참조)는 막 꽃이 피어 향기를 발할 때로서 아직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부활의 표현이 시작되고 승천의 체험이 시작되려는, 부주의할 때를 틈타 그들이 와서 이러한 것들을 망쳐 버릴 수 있다.
무엇이 작은 여우인가? 옛 생명의 작은 표현과 습관과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모두 작은 여우이다. 꼭 큰 죄는 아니더라도, 작은 우매(愚昧)함이 지혜와 영광을 파괴시킬 수 있다(전 10:1). 작은 여우는 포도나무 뒤에 숨어 있으며, 조심하지 않으면 포도나무가 그것에 의해 망쳐져 버린다.
주관적인 방면에서 주님을 따르는 첫 발걸음을 방해하여 결국 포도나무로 열매 맺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여우이다.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아직 견고하게 서지 않았으므로 이 작은 여우를 잘 막아야 한다.
작은 문제(작은 여우)를 처리하는 것은 여인 혼자서 할 수 없고 왕 혼자서도 할 수 없으며, 여인과 왕이 협력해야만 한다.
Ⅱ. 실패와 회복(2:16-3:5)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16절에서, 여인은 이미 왕의 태도를 보았고, 왕의 부르심을 들었고, 완전히 연합되었음을 본 후에 이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앞 단락에서 그녀가 이미 가졌던 체험을 돌이켜 본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만족케 한 한 가지 일은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하는 자의 어떠함을 그녀는 이미 분명히 알았다. 그녀 자신도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가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의 체험을 회고해 본다(여기서는 그녀가 중심이다. 6장 3절에서는 왕이 중심이지만, 아직도 그녀 자신에게 강조점이 있다. 그러나 7장 10절에서는 왕이 유일한 중심이시며, 그분이 계실 뿐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녀가 한 말은 틀리지 않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실망시키는 답변인지! 문제는 이 말이 좋은가 나쁜가에 있지 않고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들었느냐에 있다. 이제 갓 헌신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결코 그녀가 주님께 어떠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사랑하는 자가 그녀에게 어떠해야 하는지만 관심한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중심 삼으며 그분이 중심이신 것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녀에게 한 가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이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비록 여기에서 일의 문제를 말했지만, 아직도 주님이 양 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는 중시하지 않고 주님과 백합화의 관계만을 중시한다. 백합화는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주님 자신이 심은 것이요 주님 자신의 일이다(시편 45편은 백합화의 노래이다). 주님은 한 무리의 사람 가운데서 그분의 양 떼를 목양하신다. 그녀가 뜻하는 것은, 나는 백합화이며, 주님이 나를 목양하시니 나는 주님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여전히 나를 위한 그분이다. 그녀의 말에는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만족케 할 수 없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새고 그림자가 사라질 때에 베데르산의 영양(羚羊)과 어린 수사슴처럼 돌이켜 오려무나"(17절, 원문 참조) '영양(羚羊)은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각주에서는 모두 단수의 '어린 영양'이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본과 미국 표준역본의 본문에는 모두 단수의 '암사슴'으로 되어 있다. '어린 사슴'은 다비역, 영국, 미국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는 모두 단수의 '어린 수사슴'으로 번역했다. '베데르산'은 분리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녀에게 그림자가 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그녀는 은연 중에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다는 것도 시인했다. 그녀는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충분히 깊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십자가의 부르심과 승천의 요구와 부활의 표시의 중요성을 알지만, 그녀 자신이 이러한 것들에 미치지 못함도 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기서 주님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그녀는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어느 날 날이 밝아지고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게 돌이켜 올 것을 요구한다. '돌이켜 오라'는 이 단어는 한 면으로 그녀의 미치지 못함과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부르심에 응하여 곧 일어나 달려갈 수 없음을 나타내며 또 한 면으로는 그녀가 사랑하는 자의 임재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함께 놓고 볼 때, 그녀는 사랑하는 자의 임재를 원하지만, 그녀의 장소 곧 벽 안에서의 임재를 원한다. 그녀는 여전히 안의 느낌을 주의하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자기 느낌으로 누릴 수 있는 임재를 원한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와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임재를 갖고자 하는 원함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느낌상의 즐거움은 추구하지만 부활의 움직임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메마른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가며 어느 환경에나 가는 그러한 공과를 그녀는 아직 배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큰 계시를 얻었는데, 곧 그녀가 결코 주님과 모든 곳에서 계속적인 임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래 그녀는 단지 그녀 안에서만 주님과 함께할 수 있었고 느낌상으로만 임재를 살아낼 수 있었다. 원래 그녀가 누리는 주님의 임재도 이곳에만 있다. 그녀는 이 임재가 가장 높고 유일하며, 이것 이외에는 다른 임재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녀의 일과 가정과 세상 안에서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 '산을 뛰며 언덕을 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이전에는 그녀가 몰랐는데 이번의 계시를 통과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됐다. 그녀는 단지 자신 속에서의 임재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임재는 아직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러한 무소부재한 임재를 얻으러 갈 능력이 전혀 없다. 그녀는 아직 이러한 무소부재한 임재의 귀함을 느끼는 공과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서 얻을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가서 요구할 능력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도 '베데르'의 고통은 맛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주 냉정하게 빨리 돌이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이 갈 수 있는 곳에 그녀가 갈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는 모른다. 그녀는 단지 벽 안의 그러한 임재만으로 만족스러워한다. 그녀는 아직 주님과 함께 그곳에 갈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곧 주님께 구하여 '베데르산의 영양과 어린 수사슴'처럼 그렇게 빨리 돌이켜 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주님이 그녀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녀를 이끌어 그녀가 베데르산(분리의 장애)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지 않는다. 그녀는 베데르산을 그대로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주님이 밖에서 물러나실 때 그녀 안의 느낌에서의 임재도 잃게 됐다. 주님은 결코 그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느낌에서 그분은 분명히 그녀를 떠났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를 세상의 환경 가운데로 가져갈 수 없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 안의 느낌에서의 그분의 임재를 잃게 하심으로 그녀를 가르치신다. 2장 17절의 시간이 얼마나 긴지는 우리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 이후에, 우리가 만일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면, 우리의 느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면 느낌으로도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를 느낀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체험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주님이 그분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시면, 당신도 당신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 당신이 만일 그분의 새로운 은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옛 은사도 잃게 됨을 볼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이 아직도 1장 13절의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찌 3장 1절의 체험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원문에서 1장 13절과 3장 1절에는 모두 '밤'이라는 글자가 있다). 여전히 그녀는 밤새도록 이전과 같이 주님을 그녀의 가슴 사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밤에 주님이 계시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느낌상의 임재를 귀히 여긴다. 그녀는 차라리 벽 안에 숨어서 이러한 느낌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차라리 세상의 환경으로 향하지 않으며,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 혼자 일하고 흥미를 갖게 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차라리 주님과 그녀의 연합이 완전한 하나가 아닌 것이 낫고, 주님이 그녀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그녀가 귀하게 여기는 느낌을 제해 버리고 그녀로 느낌(비록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에서 주님의 임재를 잃게 하여 밖으로 나가 주님을 찾도록 유인하신다. 이것이 여인을 밖으로 나가도록 하는 첫 번째 이끄심이다.
3장 1절의 '밤'은 복수(1장 13절의 '밤'은 단수임)로서 며칠 계속되는 밤이다. 마치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숨은 것 같다. 이것은 완전히 그녀의 예상 밖의 일이다. 주님의 목적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느낌에서의 교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그녀가 그분이 얻기를 원하시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인하시는 것이다. 그녀는 느낌에서의 주님의 임재를 잃었기 때문에 주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지식이 없고 체험도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우매하여 여전히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가서 그녀의 마음이 사랑하는 것을 찾는다(1절부터 3절까지에서 세 차례나 이 말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분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는 "내가 내 마음이 사랑하는 그이를 찾는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느낌에서의 임재를 찾고 있을 뿐임을 알지 못한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는 결코 그 보이지 않는 것이 가짜임을 알지 못한다.
누가복음 15장 20절의 '일어나서'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고, 여기의 '일어나서'(아 3:2)는 아들을 향한 것이다. 이 책 3장 1절에서의 찾음은 침상에서의 찾음이다. 그 뜻은 그녀가 아직도 그녀의 그 잘못된 위치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있는 주님을 아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말하지 않았다. 이미 첫걸음을 인식한 이상, 마음 안의 그리스도, 즉 느낌에서의 교통-내실과 포도주 집-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후에는 여전히 환경의 제한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녀는 첫걸음과 두 번째 걸음은 보았으나 아직 세 번째 걸음은 보지 못했다. 그녀의 침상 곧 그녀가 안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 그녀가 안식하는 곳에 문제가 생겼다. 주님은 이제 그녀의 이 안식을 흩트러뜨리려고 오셨다. 아직까지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의 체험을 얻지 못한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이 그녀를 인도하여 이 안식을 얻게 하신다. 그러나 이 안식을 이미 얻은 사람에 대해서는 주님이 그녀를 이끌어 더 진보하게-주님과 함께 산을 뛰며 언덕을 넘게-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로 하여금 안식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던 침상에 그분이 계시지 않음을 느끼게 하신다.
그녀는 이제 일어나기로 결심한다. 이제 그녀는 믿음의 진보 없음과 느낌에 있어서 무언가를 잃은 것을 보았다. 일어난다는 뜻은 더 이상 침대에서 잠자지 않고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제 그녀로 장소에 제한이 없는 안식과 시간에 제한이 없는 안식을 배우게 하신다. 이전에 그녀는 장소에 국한된 안식과 시간에 국한된 안식을 비할 데 없이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주님이 한 발 더 인도하실 때, 장소와 시간에 국한된 안식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일어나서 이 안식을 벗어 버리고 처한 환경에서 안식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녀가 일어나서 '성중에 돌아다녀야'한다고 말한다(당초에 이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켰다. 오늘날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모든 하늘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 그녀는 모든 하늘에 속한 일에서, 하늘에 속한 것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아내려 한다. 아마도 그녀는 시간을 들여 성경 안의 많은 말씀을 읽어 보았을지 모르고 혹은 다른 사람의 책도 보았을지 모르며 혹은 영적인 사람의 집회에도 가 봤을지 모른다. 그녀는 다 해보았고, 이럴 뿐 아니라 '거리나 큰 거리'에도 가서 찾았다. '거리'는 길가로 보통 길이며, '큰 거리'는 넓은 길이다. 이러한 장소는 모두 성안의 거민(居民)이 왕래하는 곳이며, 그들이 교통하는 곳이다. 이러한 곳은 그들이 은혜를 받는 방법인데, 이는 주님이 길이시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평소에 교통을 갖고 은혜를 얻는 방법을 그녀가 모두 적용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아마도 죄를 자복함, 회개, 기도, 금식, 집회, 성도와 왕래함, 믿음과 의뢰함 등이 모든 것을 포함할 것이다(죄인을 찾는 것은 큰 길이나 작은 골목에서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길과 큰 길 밖에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걸어갈 작은 길이 없다. 세상 사람은 자주 작은 골목을 걸어가지만, 영적인 방면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곳에서도 그녀는 주님을 찾지 못했다.
주님이 일부러 자신을 감추시고 사람으로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실 때, 사람이 그것을 회복할 방법을 찾기란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서 그녀는 한 가지 공과를 배우는데, 곧 주님은 우리가 침상에 있도록 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밖으로 가서 찾아야 한다. 만일 기도가 기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며, 성경 읽기가 성경 읽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며, 고요한 것도 고요한 것을 위한 것이 아닌 주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라면, 그녀는 이러한 종류의 기도, 성경 읽기, 고요함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그것들을 모두 떠나야 비로소 주님의 임재를 얻을 수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이제 이미 그녀의 침상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와 왕래하고 하나님의 길을 붙잡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숨기는 것이 없고, 체면도 돌아보지 않으며 결코 밖의 많은 일로 안의 공허함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조화됨으로 그녀의 영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배운다. 이전에 그녀가 은혜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침상이었다. 이제 그녀는 성(城)중을 여행하며 많은 길과 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비록 아직 그녀의 주를 만나지 못했지만, 주님은 결코 성 바깥에는 계시지 않는다. 비록 그녀가 걷는 이러한 길들이 그녀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길들은 여전히 그녀가 걸어야 할 길이다. 조금 후에 그녀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문제는 시간 안의 문제인 것이다.
3절의 '행순하다'는 '떠돌아다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파수꾼들은 하나님이 영혼을 지키도록 위임하신 사람을 말한다(히 13:17). 그들은 성중에서 계속 걸어다니는 자들이고 영적인 일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자들이다. 아마도 이전에 그들은 이 여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 여인이 비록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직분을 지키는 곳에서 의외로 이 여인을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들은 내 마음이 사랑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길이나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주님을 만나려면 여전히 당신 자신이 주님이 계신 그곳에 가야 한다. 당신을 대신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파수꾼은 결코 없다. 파수꾼을 찾은 사람이 반드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직접적으로 주님을 대해야 하고, 주님의 처리를 받아야 한다. 지키는 사람이 비록 필요하지만, 때로는 쓸모가 없다. 당신이 주님의 처리를 받을 때, 만일 당신이 그들을 지나치게 의지한다면, 합당한 길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만일 마음이 사랑하는 자가 인도해 주시는 길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떠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당신은 이 여인과 같이 그들을 떠나자마자 당신의 마음이 사랑하는 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성중에 돌아다니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주님이 계신 그곳에 인도하지는 못한다. 비록 거리도 필요하지만, 그것도 그녀로 주님을 만나게 인도하지는 못한다. 주님은 그녀가 한 길을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파수꾼 모두 그녀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구나"(4절). 이번에 그녀가 사랑하는 자를 만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그녀가 성 중에 돌아다닌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녀가 걸은 거리와 큰 거리가 모두 옳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고 그녀가 파수꾼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시인한 것이 완전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배워야 할 공과가 많다. 그녀는 주님의 마음에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수중에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다시 주님을 만난 것은 그녀가 완전함에 이르렀다는 표시가 아니며, 주님은 그녀가 이 정도의 시험밖에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녀는 완전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가 마음에서 절실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여기에서 기꺼이 그녀를 만나 주신 것이며, 이번의 시험은 이것으로 일단락 짓고, 이러한 날이 지난 후 다시 그녀를 인도하여 전진하게 하신다.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지 못한 사람의 추구는 많은 불순물과 온전치 못함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것을 다루실 시간이 없다. 이 초보적인 체험 가운데에서 비록 그녀의 추구가 모두 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주님은 기꺼이 찾는 자로 하여금 만나게 하신다. 에스겔이 말한 것같이 물을 척량함으로 건너가게 하신다(겔 47:3-5). 주님이 마치 이 단락을 척량하고 그녀로 하여금 가게 하신 것 같다. 이 단락의 노정은 주님이 척량하신 것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를 붙잡고 …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제 그녀는 그녀가 잃은 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마도 전번에 잃어버린 것은 그녀가 꼭 붙들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그분을 꼭 붙잡는 것이다. 전번에는 그녀가 충분히 깨어 있지 않아서 그분이 가 버렸다고 느꼈으므로 이번에는 아주 깨어서 그분을 지키는 것이다. 그녀는 비록 자기가 마땅히 나와서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느낌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구하고 마음에서 사모하고 있다. 나오는 공과는 배웠지만, 믿음의 공과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그분과 함께 가지는 못한다. 그녀는 아직도 그분으로 자유롭게 가시도록 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도 믿음의 생활에서 주님의 임재를 오래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이것을 붙잡는다. 그녀는 결코 느낌에서의 임재는 반드시 주님으로 자유롭게 오고가시게 해야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분이 기쁠 때 우리는 느낌에서의 임재를 얻을 수 있으며, 그분이 기쁘지 않으실 때 우리는 그분을 자유롭게 해드리고 다만 믿음으로 그분과 그분의 모든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느낌에서의 임재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할 뿐 믿음의 길과 생활은 여전히 모른다(아마 그녀가 이미 들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분을 붙들고 가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나온 붙잡음이 자신에게 손해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영에 속한 추구는 주님을 자유롭게 해 드릴 수 있으며, 혼에 속한 것은 비록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주님의 임재일지라도, 자기를 위해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을 다루신다. 그러므로 비록 그녀가 아직 배우지 못한 공과가 많이 있고, 아직 모르는 일이 많이 있지만, 주님은 오히려 기꺼이 그녀를 만나 주시고 그녀에 의해 붙잡힌 바 되어 끌려가신다. 왜냐하면 현재의 다루심 가운데서 그녀가 통과한 것이 충분히 좋고, 그녀가 받은 시험도 충분히 크며, 그녀의 추구도 충분히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영과 혼을 분리시키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여기서 그녀를 탓하지 않으신다.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비록 안에는 그녀 자신의 혼합물이 있지만, 여전히 주님은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그녀로 다시 한 번 주님의 임재를 잘 누리도록 하신다. 주님은 이제 그녀의 어미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잉태한 자의 방에 이르셨다. 만일 '어미의 집'이 은혜의 원칙이라면,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은혜의 원칙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신다(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는 정욕 가운데 잉태되었고 죄악 가운데 출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 안에서 잉태되고 은혜 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시적인 방면에서는 주님을 이끌어 친밀한 곳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녀는 여자이므로, 어미의 집과 나를 잉태한 자의 집은 그녀의 가장 좋은 곳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또 한 단락이 끝난다. 그녀는 여기에서 다시 주님의 임재를 잘 누린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여전히 피동적이시다. 이 여인은 어떻게 주님으로 자유를 갖게 하는지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상당한 공과를 배웠다. 여기에서 그녀는 또 얼마의 시간을 보낸다(아마 몇 개월이 지날 것이다). 붙잡는 힘이 가장 강한 때는 첫 번째로 주님을 잃었다가 다시 얻었을 때이다.
5절에서 주님은 또 분부하신다. 이번에 그녀가 받은 시련은 아주 크므로 주님은 그녀에게 한동안 고요한 시간을 주신다. 주님의 뜻은, 이 사람은 내가 다루고 있으니 너희가 그녀를 도울 필요 없고 너희가 가서 그녀를 격동시킬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여기에서 배운 공과는 아주 실재적인 것이며, 뒤에서 그녀에게는 참으로 큰 진보가 있게 된다.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2장에서 말한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풍성과 십자가의 생활을 그녀는 이미 상당히 배웠음에 틀림없다(비록 절대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녀가 앞의 세 가지 공과를 상당히 잘 배웠으므로, 다음에 주님의 그러한 칭찬이 있다.
첫댓글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의 기쁨만 찾는다....이것이 믿는 이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내주하심을 깨달은 이후에 갖는 하나의 위험이다.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깊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주님의 임재는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공장에서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