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6. 15
해마다 아카시아꽃이 지면 꿀을 주문한다. 피곤하거나 달달한 것이 당길 때 꿀을 한 숟가락 푹 퍼서 입에 넣으면 기분이 갑자기 확 살아난다. 초콜릿이나 설탕이 대체할 수 없는 달콤한 맛이 바로 꿀맛이다. 그런데 올해는 꿀값이 많이 올랐다. 지난 겨울에 약 80억마리의 꿀벌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80억마리는 전국 벌통의 15.1%에 해당하는 숫자다.
문제는 꿀벌의 죽음이 단순히 꿀값을 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꿀벌의 죽음은 인류의 식량난으로 연결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꿀벌은 세계 식량자원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100여종의 작물에서 70%를 수분(受粉)하고 있다고 전한다. 수분은 꽃가루받이로 그 주요 매개자가 꿀벌이다. 꿀벌이 사라지는 것은 곧 세계 식량의 7할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식량 부족은 전쟁을 낳을 것이고 그 결과 인류문명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꿀벌의 어깨에 인류의 운명이 짊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꿀벌들이 갑자기 떼죽음을 당했다고 하니 우리가 무심한 사이 뭔가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 전(傳) 신사임당. ‘초충도병풍’ 중 ‘가지와 방아깨비’. 종이에 색. 32.8×28㎝. / 국립중앙박물관
벌의 소중함을 알아본 신사임당
조선시대 꽃 그림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꽃을 그리면서 꿀벌은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꿀벌이 있어야 할 자리는 나비와 새가 차지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문제를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가지와 방아깨비’를 감상해보도록 하겠다. 이 작품은 8폭으로 구성된 ‘초충도병풍(草蟲圖屛風)’에 포함되어 있다. 그림 중앙에 두 그루의 가지를 그렸다. 가지 옆에서는 두 마리의 나비와 벌이 날아다닌다. 가지의 뿌리 부근에는 바랭이풀이 보인다. 바랭이풀은 세로로 그린 가지와 달리 가로로 그려 땅과의 경계선임을 드러나게 했다. 가지 옆에는 쇠뜨기풀과 땅딸기가 자라고 있다. 앞쪽에는 두 마리 개미와 방아깨비도 보인다. 몸체가 큰 방아깨비는 바랭이풀을 향해, 몸체가 작은 개미는 땅딸기 쪽으로 기어간다. 그림은 구도도 단순하고 주제도 명쾌하다.
이런 특징은 ‘초충도병풍’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입체적이기보다는 평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수록 정감이 가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의 이유를 ‘가지와 방아깨비’에서 찾아보자. 우선 색채의 변화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 가지는 크기에 따라 짙은 보라색과 연한 보라색 그리고 흰색으로 칠했다. 가지 모양도 세심하게 그렸다. 가시가 돋친 꼭지와 열매 끝부분은 보라색으로 칠했고 꼭지 바로 밑부분은 흰색으로 칠했다. 잎사귀는 앞뒷면의 색을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흰색 나비는 하늘 위로, 주황색 나비는 가지를 향해 날아가도록 배려했다. 신사임당은 그림에서 나비, 벌, 방아깨비, 개미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곤충들을 전시하듯 보여주었다. 네 종류의 곤충 중에서 나비는 가장 화려하고 눈에 잘 띈다. 반면 무채색의 벌은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은 벌을 그려 넣었다.
▲ 박제된 곤충을 활용해 재현한 신사임당의 ‘가지와 방아깨비’. / 경기도박물관
조선시대 그림에는 꿀벌이 없다
이것은 그녀 작품의 원천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초충도’는 말 그대로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이다. 그녀가 그린 8폭의 ‘초충도병풍’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풀에 해당하는 ‘초’와 벌레에 해당하는 ‘충’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풀인 ‘초’에는 수박, 가지, 오이 등 식용식물과 양귀비, 맨드라미, 도라지, 여뀌, 봉선화, 원추리, 패랭이 등의 꽃이 포함된다. 벌레인 ‘충’은 개구리, 도마뱀, 쇠똥벌레, 개미, 쥐 등 기어다니는 것과 벌, 나비, 잠자리, 매미 등 날아다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신사임당은 주변에 살고 있는 초충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작품화했다. 이런 자세는 다른 작가들의 초충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한 초충은 4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곁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에서는 2013년에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옛 그림 속 우리 생물’이란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했다. 옛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물들을 그림과 함께 재현한 전시회였다. 그때 신사임당의 ‘가지와 방아깨비’도 전시되었다. 위 그림은 신사임당의 ‘가지와 방아깨비’이고 아래 그림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신사임당의 그림 속에 등장한 나비와 벌, 방아깨비, 개미들을 박제해 만든 작품이다.(두 작품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이 주변 사물에 얼마나 관심이 많고 그것을 그리고자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참 좋은 전시회였다.
신사임당을 특별하다고 소개한 이유는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 그녀와 같은 시선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꽃을 그리면서 꿀벌은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꿀벌 대신 나비와 새를 그렸다. 민화에서도 꽃 옆에는 새와 나비만이 전매특허처럼 등장한다. 꽃과 나무 옆에 새와 나비를 그린 작가는 심사정(沈師正), 김홍도(金弘道), 신명연(申命衍), 조희룡(趙熙龍)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생략하겠다. 특히 남계우(南啓宇)는 나비만을 특화해서 그려 ‘남나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화가들의 나비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들의 작품에서 꿀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화려한 색감 때문이다. 나비는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어 꽃 색깔과 잘 어울린다. 새도 마찬가지다. 꿩, 꾀꼬리, 물총새, 제비, 딱따구리, 물오리, 매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꽃 같은 천연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여기에 날개를 펼치거나 고개를 돌린 새의 자태는 꽃이 채워주지 못한 율동감을 보충해준다. 암수가 정답게 마주 보는 모습은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시정(詩情)이 넘쳐 흘러 시인들로 하여금 시 한 수 읊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래서 새는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로 시작되는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의 ‘황조가(黃鳥歌)’로부터 ‘전라도나 지리산으로 꿩사냥을 나간다’로 시작되는 김세레나의 ‘까투리 타령’까지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벌은 어떠한가. 신사임당의 ‘가지와 방아깨비’에서 본 바와 같이 찬탄의 대상이 되기에는 외모에서 밀린다. 나비의 현란한 색채는 고사하고 몸집마저 왜소해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벌은 꼭 채색화가 아니더라도 수묵화에서조차 외면받았다. 무채색의 삶이 외면받는 것은 사람이나 곤충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벌에 물리면 침에 쏘일 수 있다는 불안감도 벌을 멀리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만해서는 쳐다보지도 않는 벌을 신사임당은 굳이 자신의 화첩에 그려 넣었다. ‘초충도병풍’에는 ‘가지와 방아깨비’ 외에도 ‘오이와 개구리’ ‘여뀌와 사마귀’ ‘원추리와 개구리’ 등에 벌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벌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그림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이 없다. 조선 중기의 학자 기대승(奇大升)이 “그저 무심하게 깊은 정원에 꽃 지고 봄날은 긴데/ 발 밖에 벌과 나비 늦도록 분분하네”라고 읊조린 바와 같이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만큼 벌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조선시대에는 살충제나 제초제 때문에 벌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 ‘가지와 방아깨비’의 벌
꿀벌은 꽃을 가리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어느 날 역대의 시(詩) 가운데서 어느 것이 가장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꿀벌이 꿀을 만들 때는 가리는 꽃이 없다. 꿀벌이 만약 꽃을 가린다면 반드시 꿀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를 쓰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집 안에 화분이 많은 필자는 아파트를 벗어나 옥상정원을 갖는 것이 꿈이다.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상추와 가지를 심고 나머지 공간에 꽃나무를 심고 살면 인생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옥상정원을 꿈꾸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집에 제라늄을 기르는데 씨앗을 받으려면 붓으로 인공수분을 해야 한다. 아파트라서 벌 같은 수분 매개체가 없으니 자연수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공수분이라는 것이 보통 힘든 중노동이 아니다. 집안에서 몇 그루도 되지 않는 화초를 기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수백 평 되는 과수원의 꽃을 인공수분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비싼 꿀을 주문하면서 옥상정원을 만들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발견했다. 옥상정원은 단지 꽃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꿀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꿀벌은 벌집으로부터 약 2㎞ 이내에서 먹이활동을 한다. 벌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꽃이 있어야 한다. 도시의 옥상마다 정원을 만들어 꽃을 심는다면 꿀벌에게는 훌륭한 먹잇감을 제공할 것이고, 꽃과 식물들은 그 덕분에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굳이 내가 인공수분을 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꿀을 만들 때는 가리는 꽃이 없는’ 꿀벌이 나의 옥상정원에 심은 꽃들도 가리지 않고 수정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귀한 꿀벌이니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내친김에 옥상정원에서의 도시양봉도 가능하리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과 식량농업기구가 세계 곳곳에서 식량 위기가 임박했음을 경고했다. 꿀벌은 단순히 내게 꿀만 주는 존재를 넘어 인류 멸망을 막아주는 엄청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래저래 꿀벌의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