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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조의 개성과 방향
글쓴이:정수자
가고 싶은 길
글쓰는 이에게 개성이 없으면 때주머니라 했다던가(文人無是氣 則垢囊也). 개성이 문인에게만 필요할까만, 새로운 길에 선 시인에겐 특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시적 지향이 확고히 서 있다면, 자신이 기성 시단에 새롭게 열고 싶은 세계로 난 ‘인적 드문 길’이 보다 잘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조는 정형시라는 특성으로 인해 무제한적 실험이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실험도 일정한 형식 장치를 벗어날 수 없고, 형식에 바탕한 시조 미학 또한 도외시할 수 없기에 더 그렇다.
이번 <젊은 시인들>은 등단 5년에서 10년 내외의 주목받는 시인들로 꾸며져 있다. ‘젊은 시인’이란 생물학적 나이를 떠나, 등단 연도와 시정신을 기준으로 삼아 선정한 것이다. 이들은 평소 선배 시인들이 이루어 놓은 시조 미학에 안이한 편승을 하기보다, 좀 힘들더라도 ‘나의 길’을 추구하는 시세계를 보였다. 시조단에 꾸준한 자극이 될 이 <젊은 시인들>의 개성과 시적 지향은 무엇인지, 또 어떤 성취와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본다.
일상 비틀기 혹은 갖고 놀기
일상을 비틀고 뒤집으며 갖고 놀 수 있다면 시쓰기는 좀더 즐거울 것이다. 이종문 시인은 이런 즐거움을 종종 보이는데, 언어 유희에도 단수가 높다. 한자의 교묘한 사용으로 회화성을 한껏 살리는 것에서부터 저절로 웃음을 물게 하는 풍자나 해학 등, 나름의 독보적 어법을 이번 신작에서도 여전히 보여준다.
삶은 돼지머리,
삶은 돼지머리
양쪽 콧구멍에 시퍼런 돈을 꽂고 고사상 가운데 앉아
큰절을 받고 있는,
月出山 月燈寺에 이제 막 떠오르는 초생달 같은 눈에
곧추선 속눈썹을 하나씩 뽑아 당겨도 눈도 깜짝 하지
않는,
아아 저 拈花示衆의 절묘한 미소를 짓고, 자네 열반이
란 게 무엔지 아느냐며,
다시금 으하하하하 웃고 있는 돼지머리.
-<열반> 전문
이 작품을 보면 누구나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그저 빙그레 웃다가 마지막 “으하하하하”에 이르면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그 웃음의 끝쯤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열반의 의미를 새기게 된다. “양쪽 콧구멍에 시퍼런 돈을 꽂고 큰절을 받는” 돼지머리만 해도 해학적인데, “월출산 월등사에 이제 막 떠오르는 초생달 같은 눈”으로 돼지를 그림으로써 더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게다가 “염화시중의 절묘한 미소”에, “자네 열반이란 게 무엔지 아느냐며” 웃어제끼는 돼지라니-. 돼지머리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종문 시인처럼 “으하하하하” 웃는 것이 어울리는 어법이나 일상을 갖고 노는 여유가 없으면 이만한 형상화에 도달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말법과 상상력은 <아침>에서 “청과상에 청과물들이 가지런히 모여 앉아 잘 익은 햇살 아래 뭐라뭐라 조잘대고 그 중에 홍과도 몇 알 말참견을 하는 아침”으로 또 한번 유감없이 발휘된다. 과일가게의 모습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살려낼 뿐만 아니라, “청과”와 “홍과”를 대비하면서 능청스레 “말참견”을 펴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자칫하면 작위를 드러내거나 시를 단조롭게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상처>는 사유의 폭과 깊이를 보여준다. 모과 한 알이 떨어져 “세상의 한 모퉁이가 금이 가”다니, 이 예사롭지 않은 인식은 “삼천의/대천세계가//시퍼렇게/멍든다”는 종장으로 뒷받침되며 단시조의 시적 공간을 넓고 깊게 만든다. 나아가 전일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주의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준다.
그런데 얼핏 보면 <돼지머리>가 시인지 장형시조인지 구분이 얼른 가지 않는다. 분명 세 수짜리 단형시조인데, 기존의 배행과 다른 배열을 했기 때문이다. 첫째 수는 중장과 종장, 둘째 수는 3장 모두, 셋째 수는 초장과 중장을 각각 붙여 놓고 있다. 또한 상의 단절을 피하듯 계속 연결어미와 쉼표를 배치하다 셋째 수 종장에 가서야 마침표를 찍고, 독립적으로 배치한 돼지머리가 수미상관을 이루게 한다. 이는 세 수를 한 편의 시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정형의 단조로움을 벗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치밀한 배려에 의한 유기적 구조가 내적 필연성을 짐작케 하지만, 정형시라는 시조의 정체성 측면에서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시조의 미학은 분명 자유시와 다른 지점에서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양란 시인도 가끔씩 일상을 가볍게 비틀며 놀기를 즐기는 것 같다. <놀부뎐>을 끌어다 재치 있게 패러디한 <봄 이야기> 맛이 잊히지 않더니, 이번 신작에서 그와 유사한 말놀이의 즐거움을 보이고 있다.
좋기로야 흐벅진 함박눈만한 게 또 있는가
천지현황 우주홍황 아아라히 채우고
사뿐히 가지에 내리면 부얼부얼한 꽃송이라.
소나기눈 더욱 좋지, 만석꾼집 곳간 터져
잠시잠깐 눈결에도 한 자 가웃 너끈하니
푼푼한 마음씀씀이 풍년 인심 부럽잖아.
하필 나는 싸락눈, 싸라기만도 못한 눈
조막손이 시주하듯 인색하게 내린다고
내리며 지청구 먹는 개 물어갈 팔자야.
-<싸락눈, 탄식하다> 전문
이런저런 눈의 특성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봄 이야기>는 장형시조라 사설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단형시조인데도, 그 틀을 넘지 않으면서 능청스러운 주워섬김 같은 말맛을 발휘하고 있다. 그간 <봄 이야기> 같은 작품이 기대되었던 바라, 이런 유의 작품이 더 눈에 드는가 보다. 시인에게 언어 감각은 기본기에 속하지만, 실제 작품마다 그 형식에 딱 들어맞는 언어 찾기는 지난한 일이다. 이 작품에서 “지청구 먹는 개 물어갈 팔자”로 대변되는 “싸락눈”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표상이건만, 쓸쓸해야 할 그의 탄식이 오히려 익살스럽게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흐벅진 함박눈”, “소나기눈” 내리는 모습이 어깨춤이 나올 만큼 풍요로운 농촌의 한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막손이 시주하듯 인색하게 내린다고” 지청구를 먹는 싸락눈조차 제목이 안 어울릴 만큼 한판 잘 노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생동감 넘치는 말과 그 놓음새에 따른 가락의 창출이 어울려 빚어내는 힘이다. 공소한 관념에 그칠 “천지현황 우주홍황”을 “아아라히 채우고”로 극복하는가 하면, “부얼부얼한 꽃송이라”, “한 자 가웃 너끈하니” 등은 가락의 활력을 잘 살리고 있다. <싸락눈에 관한 성민이의 생각>은 재치 있는 동화적 발상을, <싸락눈 내리는 밤 풍경>은 묘사를 주로 보여주는데, 깊이가 갖춰지면 말맛이 더 빛날 것 같다.
전복의 즐거움
전민 시인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조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그의 처럼 이번 신작도 시조에서 자주 만날 수 없는 상상력과 기법을 보인다.
어제는 토하고
오늘도 토하고
어제는 쓰러지고
오늘도 쓰러지고
내일은
일어서야지
토하기 위하여
그녀의 방에 누워
세상을 토해내고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토해내고
내일은 고함을 질러
의자를 토해야지
-<구토> 전문
이 작품은 정격에 가까운 시조인데도 상당히 낯선 느낌이 든다. 기존의 시조 어법을 전복시키는 상상력과 환유 때문이다. 환유는 인접성에 근거한 기법으로 모더니즘 시에서 많이 쓰는 만큼, 응축을 중시하는 시조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전복의 장치로 환유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적 인접성에 근거한 첫째 수는 “어제”와 “오늘”을 맞물려 놓은 위에 “토하고” “쓰러지”는 화자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일상의 지리멸렬함과 현대인의 왜소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일은/일어서야지”라는 범상한 다짐 역시 곧바로 “토하기 위하여”에 의해 뒤집히면서 초 중장의 의미를 강화한다. “토하기 위하여” 일어선다는 아이러니는 현대인의 순응 혹은 저항을 자조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수는 3장에 똑같이 “토해내고”를 반복 제시함으로써, 첫째 수 “토하고”와 의미상 연결을 꾀한다. “세상”, “그녀”, “의자”는 상식적으로 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토해내고”에 각각 엮이면서 종장으로 결집되고, 이는 다시 “내일은 고함을 질러/의자를 토해야지”라는 놀라운 구절을 만들어낸다. 의자를 토하다니! 그것도 고함을 질러서! 신선한 전복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화자가 고함이라도 질러 토해내고 싶은 “의자”에 응집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살면서 늘 전전긍긍하는 어떤 자리, 나아가 탐욕이나 부조리 같은 삶의 ‘암 덩어리’가 아닐까. 이렇듯 얼마든지 의미 대체가 가능한 “의자”는, 마치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바위를 들어올려야 하는 현대인의 삶 그 자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시조는 정형에다 짧다는 특성상, 시어의 반복을 금기시할 만큼 절제가 중요하다. 그런데 전민 시인은 언어의 반복을 통해 의미의 확장과 전복을 동시에 꾀한다. 반복을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닌 시적 전략으로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포스트 모던에 가까운 상상력을 보이는 <테러>는 읽기에 상당한 난점이 따른다. 앞으로 <어떤 그리움> 같은 서정성과 전복적 상상력이 길항한다면, 더 독창적인 시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장형시조, 확장의 세 유형
장형시조는 우선 형식의 확장에서 확보할 수 있는 세계관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법을 활용해야 그 묘미가 살아난다. 산문시와 다른 특성을 잃지 않으려면 우선 가락을 살리기 위한 사설의 말법 위에 풍자와 해학 등 시적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달균 시인은 이번 신작에서 장형시조의 말법과 가락을 잘 구슬리고 있다. 예술가의 삶과 의미를 판소리조 사설로 신명나게 펼치는 것이다.
부지깽이도 모찌러 가는 오뉴월 한 방장을
휘이훠이 풍채 좋고 신수 훤한 조한량 거동 보소. 풀멕인 도포 입고
꿩털 처억 높게 꽂은 중절모 눌러쓰고, 명무(名舞)에 붓 한 자루, 손기름
자르르 밴 단소도 동무하니 이만하면 근 달포 지낼 노자 마련은 되었것다.
오냐 가보자 어여 가보자 물 뎁히지 않아도 암탉이며 도야지 솜털까지
죄다 벳긴다는 돈 많고 한량 많은 동래하고도 펄펄 끓는 온천장이 아니더냐
왜인(倭人)들 떼로 몰려 떼돈 쓰고 나자빠지는 동래 권번(券番)이 거기라면
오냐 놀아보자 화선지 펼쳐놓고 치자하면 설중매에 쓰자하면 초서에다
추어라 하면 나붓나붓 춤사위도 으뜸이니
보아라, 천하의 조금산이 풍류여행 떠나신다
-<예인 열전1- 한량 조금산> 전문
조금산은 고성오광대를 이끌던 유명한 예인이라고 한다. 시인은 지금의 고성오광대가 있기까지 튼실한 받침이 된 조금산과 허종복 두 예인을 기리듯, 공들여 그 생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풍류를 살리기 위해 도입한 판소리조 사설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시적 장치로 쓰인다. 조금산의 풍모나 행위 등을 묘사하는 중장은 <춘향가>의 한 대목, 즉 인물치레를 보는 듯하다. 그만큼 묘사가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말의 구슬림이 치밀하면서도 능청스럽다. 3,4음절을 기본으로 조사도 절제하는 사설은 4음보의 넘나듦을 통해 변화 속에서도 통일된 가락을 이끌고 있다. 게다가 사실적인 주워섬김은 사설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역동적인 리듬을 입힌다. “훠이훠이 풍채 좋고 신수 훤한 조한량”이 “풀멕인 도포 입고 꿩털 처억 높게 꽂은 중절모 눌러쓰고, 명무에 붓 한 자루, 손기름 자르르 밴 단소”를 든 인물치레를 흥취 넘치게 살려내는 것이다. 이렇게 차려 입고 나서는 조금산의 입을 빌어 하는 말, “오냐 가보자 어여 가보자” 역시 적절한 시적 장치로 중장 후반부의 전환을 이끈다. 조금산의 차림이 행위로 전이되며 풍류행각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부지깽이도 모찌러 가는 오뉴월 한 방장”에도 한껏 차려 입고 풍류여행이나 가는 한량을 통해, 참으로 풍류에 미친 당대 예인의 생을 생각해보게 된다. 같이 발표한 두 작품도 예인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인이 천착하는 예술의 의미를 더 만나게 될 것 같다.
이해완 시인은 이달균 시인과 다른 각도에서 장형시조를 통한 시세계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사설이라는 가락의 맛보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 속에는 해맑은 동자승이 한 분 사셨나 봐요.
물낯바닥에 작은 돌멩이 하나 떨어뜨려 놓고 하루 종일, 아니 삼백
예순 다섯 날을 물무늬 퍼져나가는 것 바라보다가 해 바뀌면 또 그
렇게 돌멩이 하나 던져놓고 그리움 속에 수 백년 동안 갇혀 살았나
봐요 내가 앉은 이 자리 물빛 그리움이 번져가 멎은 이 선명한 나
이테
아직껏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걸 보면.
-<나이테> 전문
<수묵담채>에서 보여주는 정밀한 관찰이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은 나이테를 한 동자승의 “물빛 그리움이 번져가 멎은” 것으로 포착한다. 파문과 나이테의 유사성에 바탕한 이 상상력은 새롭고 아름답다. 어린 나이로 산 생활을 하며 끝없이 몰려오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돌멩이를 던지며 세월을 견디는 동자승은, 나무와 다름없는 맑은 심성의 존재이다. 동자승이 물에 던지는 그리움은 파문이 되어 나무에게 가고, 나무는 이를 제 몸에 받아 적는다. 둥근 생명의 고리 속에 돌멩이 던지기가 하나의 명상으로 화하면서, 나무에 그 무늬가 각인되는 것이다. 이들은 거대한 우주에서 서로의 존재를 연민으로 헤아리고 포용하는 자연 그 자체이다. 나이테는 곧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존재들의 삶의 무늬이다. 짧은 순간의 그리움이나 기쁨, 슬픔들이 모여 하나의 나이테라는 큰 매듭을 형성하는 것이다.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있는 나이테에 이렇듯 존재의 유기적 관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섬세한 관찰 덕분이다. 그런데 <까닭 모를 적의>와 <그리움>은 이런 관찰과 사유가 <나이테>만큼 살아나지 않는 아쉬움을 남긴다.
시조의 형식과 내용 두 측면에서 확장을 꾀하는 시인 중에 정휘립 시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 호흡이 긴 시조를 통해 표현 기법을 다양하게 실험하며 나름의 세계를 확대 심화하는 데 적극적이다.
차라리 뜨거웠다, 눈부신 저 눈발은...
샤워 온수처럼 톡톡 쏘아대는 눈송이의 따가움에 네 몸은
온통 맨살이다. 허연 입춘, 외줄기 들길가에, 오, 나는 꽁꽁 곱은 손
가락들 뻗쳐 올리며, 울컥 이는 더운 김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한
그루 매화이고자 한다.
시야 덮은 저 눈보라 속 어딘가, 너 홀로 서서 뜨겁게 날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난 그저 한없이 서 있지만 않으련다. 널 기
꺼이 찾아 나서련다. 푸른 햇살 찬란한 설레임으로 내 손 끝에 뾰족
뾰족 돋는 꽃눈망울들을 몇 아름씩 늬게 안겨주마.
너 역시 그 뜨거운 품을
아직 열고 있으라.
-<매(梅)-봄에게> 전문
이 작품은 굵직한 육성의 남성적 어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른 봄 눈을 견디며 서서 기어이 꽃을 피우고 말리라는 매화의 결기가 퍼렇게 배어 나오는 듯하다. 매화는 전통적 선비 이미지에서 차츰 현대적 남성의 이미지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중장 전반부, 눈발이 “차라리 뜨거”울 만큼 결연한 의지로 “꽁꽁 곱은 손가락들”을 뻗쳐 올려 서 있는 “벌겋게 부어오른” 매화는, 지조와 절개의 표상이라는 전통에 잇대어 있다. 그러나 중장 후반부에 오면 그 의지를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으로 매화의 상이 변모되고 있다. 이는 “그저 한없이 서 있지만 않으련다. 널 기꺼이 찾아 나서련다”는 굳센 의지의 다짐과 “너 역시 그 뜨거운 품을/아직 열고 있으라”는 당부에서 기인한다. 이제 매화는 오직 인내하며 기다리는 정신의 표상이 아니라 행동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 정열적인 한 남성의 이미지가 된다. 이러한 전이의 과정에서 직정적인 어조는 힘찬 울림을 거느리는 동시에 사랑의 열정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매화는 “꽃눈망울들을 몇 아름씩 늬게 안겨주마”고 자신의 의지로 꽃을 피우는 건장한 남성의 표상이 된다. 꽃에서 일반적으로 보던 여성적 이미지와 비교하면 상당히 동적이며 격정까지 지닌 새로운 이미지의 발현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같이 발표한 <화전(火田)>과 <아들의 독주(獨奏)>는 이전 작품에 비해 단순하고 평이하다.
묘사의 힘 또는 이미지
염창권 시인은 묘사를 통한 이미지 직조 능력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이번 신작도 모두 시조에서 자주 만나기 어려운 상상력과 신선한 이미지로 그만이 보일 수 있는 개성적인 세계를 펼치고 있다.
껍질 속은 굴곡이 많은 별빛으로 채워졌다.
뇌수처럼 빡빡한 생에는 좀체 휴식이 없다.
별빛을 헤아려 본다
부유하는 먼지 같은...
우주는 딱딱한 두개골처럼 소리가 난다.
반짝이는 머리통 속 질량은 충분하다.
욕정의 신호나 되듯
은밀한 느낌이다.
금기의 강이 있다. 건너지 못하는...
확인되지 않은 진실이지만
그들은 서로 잇닿아 있다.
별들도 사랑을 나눈다.
눈빛을 보면 안다.
때론 호두껍질을 두드려서 잠든 별을 깨운다.
메마른 기억의 숲 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듯
어둠이 파동을 따라 긁힌다.
이젠 추억의 힘이다.
-<호두껍질 속의 별> 전문
<호두껍질 속의 별>은 시조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이미지와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호두껍질이 마치 주름 많은 뇌와 닮았다는 유사성에서 출발, 이를 바탕으로 “우주”와 “금기의 강”을 돌아서 다시 “추억”으로 돌아오는 넓고 깊은 사유를 담아낸다. “껍질 속은 굴곡이 많은 별빛으로 채워졌다”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하는 이미지는 시 전체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면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 매 수마다 다르게 제시되는 이미지와 사유가 치밀한 전략에 힘입어 유기적 구조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간 무심히 깨어 버린 “호두껍질”에 새롭게 제시된 이미지는 삶에 대한 사유로 의미를 확장해 간다. “호두껍질” 같은 뇌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내장한 채 “좀체 휴식이 없”는 “뇌수처럼 빡빡한 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이런 생을 견디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인의 전언대로 “추억의 힘”일 것이다. 함께 발표한 두 작품도 참신한 이미지와 사유가 돋보인다. 목련에겐 “한 갈피의 생이 시”드는 긴 시간이 “꽃잎이 떨어지는 동안/함께 멀미를 했을 뿐…”인 짧은 한때라는 인식을 서정적으로 그린 <목련나무 아래서> 역시, <상수리 열매>의 잘 직조된 이미지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이번 작품들은 음보가 상당히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호두껍질 속의 별>에서 셋째 수 같은 것은 엇시조로 보아야 할지, <선사시대의 시인을 기억함>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애매하다. 정형의 꽉 짜인 틀에 변화를 주려는 단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이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조의 반영일 것이다. 조동일 교수에 의하면, 정격(3434/ 3434/ 3543)에 3장이 모두 들어맞는 시조는 확률상 4%를 넘지 않으므로, 정격에서 벗어난 유형은 ‘광의의 시조’에 속한다. 하지만 작품을 주의해 읽으면, 정격에 가까운 시조에서 3장의 구조적 특성에 따른 미학 즉 응축에 따른 긴장미, 간결미 등이 훨씬 잘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늘어난 음보는 대부분 이완으로 이어지는데, 염창권 시인이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두고 볼 일이다.
강현덕 시인도 그간 주로 깔끔한 묘사와 이미지를 통한 경쾌한 시조 문법을 보여주었다. 이는 대상에 함몰되지 않는 객관적 거리 유지와 감상을 배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번 신작은 이전 작품과 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왜 저리 생각도 없는
꽃처럼 지고 있는가
지나는 부슬비에도
쉬 마음을 다치고
서둘러 절벽을 찾아
난분분 흩어지는가
강물은 어찌하여
또 두 팔을 벌리고
저 젊은 가슴을 받아
눈물을 더하는가
꽃처럼 이내 잊혀질
조간 귀퉁이 얼굴 하나
-<낙화> 전문
이 시인은 다 퍼내고 버려진 폐광을 “텅 빈 어머니 몸” 즉, 모성적 공간으로 선명하게 부각시킨 적이 있다. 게다가 “내 몸도 조금씩 비어 간다/거기에 겹쳐지겠다”며 대를 이어 생산하고 비워지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그 생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소임을 다한 여성의 자궁은 “잊혀진 중심”이지만, 생은 그렇게 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도 생각케 해준 것이다. “세상의 눈부신 것들/모두 다 쏟아”낸 폐광 같은 어머니의 골반은, 그래서 성스러운 이미지로 아직 기억된다. 그런데 <낙화>에 포개 놓은 죽음은 어떤 것인지 구체성을 띠지 않는다. 다만 “지나는 부슬비에도/쉬 마음을 다치”는 꽃처럼 연약한 모습이 짐작될 뿐이다. 낙화 같은 삶이라고 짧은 생 앞에서 회의하고 절망하는 봄을 보낸 것일까. 지는 꽃들이 “서둘러 절벽을 찾아”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가. 이 구절은 절벽에 유난히 몰려 아름답게 부서지는 낙화의 눈부심과 무상함을 나타내지만, 시인 자신의 요즘 심경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강물”이 “두 팔을 벌리고” “저 젊은 가슴을 받아/눈물을 더” 한다는 대목에서는 젊은 영혼들의 분신 같은 게 연상되지만, 앞 뒤 문맥으로 보아 그렇게 읽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난분분 흩어지는” 낙화에 삶의 덧없음을 얹은 것일 터이다. <하지> 역시 묘사를 통한 시각화를 꾀하지만, 이전 작품들에 비해 시적 긴장이 처진다. 멀리 뛰기 위한 잠시의 웅크림이길-.
일상 속의 잔잔한 깨달음
일상이라는 틀을 우리는 대개 잊고 살지만 가끔 벗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생이 문득 지루해질 때면 끝없는 반복을 떠나 일탈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히 일어나게 마련이다.
암벽을 타는 것도 그런 욕구 중의 하나일 것이지만, 박명숙 시인의 <암벽 타는 사람>에서는 보다 내면화된 삶에 관한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암벽은 하늘로
치솟는 중이다
누구나 걸어서
하늘로 간다
암벽은
밀촛불처럼
걸.음.걸.음 까물댄다
눈발이 깊어진다
몸 밖은 허공이다
걸어온 길에게
갈 길을 묻는다
암벽은
제 몸 지우며
서둘러 하산 중이다
-<암벽 타는 사람> 전문
암벽 타는 사람을 보면 왠지 절박한 심정이 된다. 한순간에 전생을 건 듯, 거대한 바위에 거미처럼 매달려 오로지 한 발 한 발 오르는 길은 신과 대면한 느낌마저 들 것 같다. 박명숙 시인이 그린 <암벽 타는 사람>에는 이렇듯 자신과 대결하는 사람의 정신적 극점 같은 것이 보인다. 특히 암벽이 “밀촛불처럼/걸.음.걸.음 까물댄다”는 첫째 수 종장은 암벽 타는 사람의 모습과 긴장된 심리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거대한 바위벽에 한 자루 작디작은 “밀촛불”처럼 까물대는 암벽의 길. 그런데 “암벽은 하늘로 치솟는 중이”니, 아무리 노련한 선수라도 쉬 닿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절대절명의 순간.- 그 순간의 집중이 모여 하나의 길을 이룬다. 그러나 그 길은 발을 떼는 순간 또 사라진다. 그런 상황에서 “눈발이 깊어”지고 이미 “몸 밖은 허공이”다. 그렇다면 다시 “걸어온 길에게/갈 길을 묻는”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암벽은/제 몸 지우며/서둘러 하산 중”일까. 눈에 덮여 낮아 보이는 현상을 나타낸 게 아니라면 구도 같은 길이 다시 사라진다는 것인지, 이 비약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 다른 신작 <속죄염소를 위하여>에서는 속죄양의 입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삶은 유죄”이고, “내 몸에 기록된 죄를” 읽을 수 없다는 시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진실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순결한 속죄의식이 앞으로 어떤 세계를 보여줄지 궁금하다.
갑자기 어떤 큰일이 닥치면 권태롭던 나날의 삶이 새삼 소중해진다. 진순분 시인은 이런 일상의 한 축에서 맞닥뜨린 어느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겨보고 있다.
이승의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뜨거운 눈물이 문패를 적시고 있다
흙으로 묻히기 전에 비가 먼저 울고 있다.
어허 달궁, 어허 달궁 예사롭던 사람 여기
한생애 모진 비바람 그렇게 무너지며
천상에 확실한 거주지 전입신고 하고 있다.
-<下官> 전문
하관을 지켜보는 것은 죽음을 실감하는 확실한 체험이다. 누군가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생과 사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이승의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비가 먼저 관이 놓일 자리로 뛰어들어가는 상황은 죽음을 더 슬프게 만든다. 그렇지만 “어허 달궁, 어허 달궁”하며 사람을 묻는 동안 장례는 마치 축제처럼 이어진다. “예사롭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일 것인데, “한 생애 모진 비바람”이 암시하듯 고인의 생은 고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천상에 확실한 거주지”를 마련하는 죽음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내막을 아는 이들은 슬픔을 접으며 망자를 보내기도 하는가 보다. 이 작품에서 진순분 시인은 전보다 감상을 제거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따뜻한 그늘.2>에서 여전히 그리는 “세월가도록/다 퍼내지 못하”는 그리움에 집중하는 것은 “지병처럼 남아있는/네 깊고 깊은 눈물”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주된 테마인 지병 같은 그리움은 자칫 감상에 함몰될 위험이 따른다. 이제 소재도 좀 넓히는 게 좋을 듯싶다. 실패를 무릅쓰고 과감한 시도를 감행할 때 새로운 시조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정희 시인은 보잘것없는 ‘멸치’를 시조에 등재시킨 적이 있다. 이번 신작에서도 다시 한번 ‘멸치’를 통해 생명의 관계에 대한 모색을 보여준다.
삶은 멸치를 건져내다 몸 속을 들여다본다
죽 곧은 척추 뼈와 빗살 같은 갈비뼈들
작은 몸 열어 보이는 그 몸 속의 지적도
한 몸을 지탱하던 뼈들과 힘줄의 길
한 목숨 부지하던 심해의 저 물길 건너
몸 속의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을까
한 생을 버리고서 다른 생으로 몸을 섞는
멸치의 거듭남을 가만히 생각하면
제 몸이 저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거.
-<환생(幻生)> 전문
‘멸치도 생선이냐’고 우스개 소리를 할 만큼 초라한 멸치.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 공급을 위해 식탁에 늘 놓이면서도, 그야말로 밑반찬이고 국물을 우려내는 즉시 버려지는 존재이다. 이런 멸치에서 시인은 생이란 그저 혼자 왔다 가는 게 아니라는 나직한 타이름을 본다. 그 가냘픈 멸치의 뼈를 보며 “몸 속의 지적도”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식탁에 놓이는 작은 멸치 한 마리가 어느 먼 심해를 건너와 우리 몸 속에 섞이고 있다. 그러나 “한 생을 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생으로 몸을 섞”는 것이다. 이런 멸치의 거듭남을 보면서 “제 몸이 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우리 생명체는 모두 유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이런 점에서 전정희 시인이 택한 멸치는 일상을 돌아보며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빗소리를 돈과 모르스부호로 재치 있게 매개한 <빗소리>는 종장의 뒷받침이 약해 의미를 확대하지 못한 아쉬움을, <성묘>는 안이함을 보이고 있다.
김수엽 시인은 시조의 대중성 확보를 중시하며,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귀에 걸어 들어온 출렁이는 웃음
짓눌린 하루가 살짝 풀려지고
내 가슴 기침을 벗겨낸
목소리로 가득하다.
눈을 감았더니 보이는 건 옛날 그 때
어둠에서 더덩실 춤추며 일어서더니
한 입에 나를 깨무는
날카로운 입김들
씹을수록 짜릿하게 툭툭 살갗을 친다
떼지어 온 그리움도 가락과 몸을 섞어
내 사랑 꽉꽉 묶어 가는
고요한 절대자의 끈
-<음악 앞에서> 전문
음악은 대개의 경우 즐거움을 주지만, 지친 영혼을 위무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괴롭고 힘들 때, 시나 그림보다 음악을 찾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도 음악을 들으면 “짓눌린 하루가 살짝 풀려지고/내 가슴의 기침”도 벗겨지는 경험에 음악 듣기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 들으면 “떼지어 온 그리움도 가락과 몸을 섞어” 고요해지는 무위의 상태에 이른다. “내 사랑 꽉꽉 묶어 가는/고요한 절대자의 끈”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음악의 힘이다.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그래서 대중의 사랑을 가장 넓게 받는 예술이 된 것일 터이다. 시조도 시가였던 전통을 현대에 맞게 되살린다면 일반 독자에게 보다 친근하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성을 포기하면서 대중성으로 갈 수는 없으니, 이 둘의 절묘한 조화가 필요하다. <木蓮 考>는 “그리움만 뽑아 올려 동네 하나 꾸며내”는 목련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두 작품 모두 응축과 참신한 비유 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대중성 있는 시조의 추구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제의 미학
단시조의 묘미는 ‘촌철살인’에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곁가지 다 쳐낸 골수의 언어를 찾았다 해도 시로서의 폭과 깊이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애초의 의도와 달리 소품이 되고 마는 단시조가 많은 것이다. 권갑하 시인은 이런 어려움을 잘 극복한 단시조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
내 안에 막대기로
버티어 놓은
허공
누가 떠나가는지
바르르르
떨리는
손
눈물도
다 마른 저녁
몰래 건네는
흰
손수건.
-<목련> 전문
목련꽃이 지는 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내 안에 막대기로/ 버티어 놓은//허공”은 금방 무너질 듯 위태롭지만 대단히 서정적이다. 시인은 그 허공에 흰 목련 꽃잎이 지기 직전의 한순간을 “누가 떠나가는지/바르르르/떨리는//손”으로 그려낸다. 이 구절은 정적인 공간과 시간을 감각적으로 살리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 어떤 표현도 못한 채 가만히 떨기만 하는 손, 많은 말이 숨겨져 있는 손으로 의미가 증폭되는 것이다. 목련이 지기 직전의 순간에 겹쳐 놓은 이런 장면에 다시, “눈물도/다 마른 저녁//몰래 건네는//흰//손수건”이 제시된다. 막대기로 버티어 놓은 내 안의 허공은 그 손수건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목련은 이제 누군가에게 건네는 흰 손수건으로 허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 이미지는 아름답게 각인된다. 봄날 저녁 목련꽃이 지는 정경을 하염없이 바라본 사람이면 그 손수건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서 목련이 지는 장면을 오롯이 부각시키는 또 하나의 장치는 여백이다. 여백은 시상과 어우러지지 못하면 공허한 공백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이를 남용할 경우 식상을 초래한다. 이 작품에서 권갑하 시인은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여 시행 사이에 낙화 소리까지 함축적으로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형식인 <무늬>가 이와 달리 공소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가야 할 길
이상으로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다소 거칠게(한꺼번에 살피기엔 좀 많았음) 살펴보았다. 이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조를 쓰려는 의욕에 찬 시도와 함께 신선한 이미지와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사유를 만날 수 있었다. 모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숙지하고 그에 따른 지향점도 예비한 것으로 보인다. 나름의 세계를 열기 위해 진력하는 이러한 모습에서 시조단의 미래를 읽으며 필자 역시 한결 고무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시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치열한 시정신과 미학적 완결성을 더 주문하고 싶어진다. 치밀한 관찰과 사유에서 오는 발견, 혹은 발랄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 개성의 심화 확대, 나아가 부정의 정신에 근거한 새로운 세계 해석 등등, 오늘의 시조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미적 현대성을 더 깊이 있게 구현해내길 바라는 것이다. 시조에서는 특히 새로운 세계 해석과 발견을 만나기 어렵다. 보수적 세계관이나 시적 발상을 답습하는 안이한 태도에 기인하겠지만, 이제 젊은 시인들이 타파할 것으로 믿는다. 자신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게 완성에 이르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 갱생의 길이라면, 천착을 쉬지 않는 속에서 보다 크고 깊은 세계에 이르리라. 앞으로 이 시인들이 열어갈 다양한 세계를 만날 상상을 하니 지레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