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말기(고종 ․ 순종)의 행정 관리
[개설]
본관은 안동이고 1856년 4월 9일(증손 김태균자료/ 1856.4.2~1921.4.21) 충주시 엄정면출신으로, 엄정에서 훈장을 하시다 무과에 급제하시어 2번의 경무사와 경상남도 ․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신 행정가이다.
[활동사항]
고종 25년(1885년) 무과에 급제하여 1895년 일본유람신사(日本遊覽紳士) 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897년(광무 원년) 중추원 참서관(參書官), 1902년 평리원 수반검사 동년 7월 중추원 의관, 고종 43년(1903년) 4월에 경무청 경무국장, 1905년 3월 경무청 경찰국장(정3품), 동년 9월에 경무사로 승진되었으나 11월에 의원면관 되었다.
1907년 1월 경무사로 부임하고 동년 5월 중추원 찬의를 거쳐 동년 6월 경상남도 관찰사(종2품)를 지내다가 1908년(순종1년) 6월 경기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으며, 1910(순종3년)년 2월에 훈장(훈3등)을 받으시고, 동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원면직 하였다.
1903년 7월 경무국장 재직시 내장원의 고미(庫米)가 시전상인(市廛商人)을 거쳐 간상(奸商)에게 싸게 팔려나가 은닉되어 모리(牟利)를 꾀하고 있다는 얘기가 항간에 떠돌았다. 이에 김사묵은 경찰의 직책을 담당한 자로서 부지런히 검찰(檢察)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청죄(請罪)하는 자핵소(自劾疏)을 올려 견책과 함께 2개월 감봉처분을 받았다.
융희 4년(1910년) 6월 7일(화요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의하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와의 공문을 일문으로 시행하는 것을 내각령으로 금지하였는데도 근일(近日) 각관찰사의 공문을 보면 경기관찰사(김사묵)를 이외에는 모두 일문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보도 하였다.
1920년 6월 한규설·이상재·유근 등의 발기로 민족교육의 장려 진흥을 내걸고 출범한 교육운동단체인 ‘조선교육회(회장 이상재)’의 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1934년 「삼천리」라는 잡지(기사제목 : 13도관찰사의 기후(其后), 저자 : 목춘학인(木春學人))에서는 “김사묵은 2번의 경무사 경력을 가진 경찰의 선배로 경상남도 ․ 경기도의 2도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강직 고결했던 인격자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묘소는 충주 엄정면 논강리 선산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db.history.go.kr)』
『한국고전번역원(http://www.minchu.or.kr)』
『大韓每日申報(1910년 6월 7일)』
『東亞日報(1920년 6월 27일)』
『삼천리」제6권 제7호(1934년 06월 01일)』
김태균(011-485-4088)
증조부(김사묵(본관:안동))께서는 1856년 4월 9일 충주 엄정에서 출생하시고
고향에서 훈장을 하시다 무과에 급제 1900년 중추원 참서관, 1902년 평리원 수반검사
동년 7월 중추원 의관,고종43년(1903. 4월) 경무청 경무국장, 1905년 경무청 경찰국장(정3품),
1907.1월 경무사로 승진하신후 같은 해 5월 중추원 찬의 같은 해 6월 경상남도 관찰사(종2품),
1908년(순종1년)6월 경기도 관찰사로 영전하신후 1910(순종3년) 훈장(훈3등)받으시고 한일합방과 동시
벼슬길을 접으심 그후 1920.1. 26일 경성 윤치소 집에서 조선교육회 창립총회시 회장 월남 이상재
부회장에 김사묵(증조부)으로 우리나라 신교육에 기틀을 마련 하셨습니다.
융희4년6월7일(1910. 화요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와 의
공문을 일본글로 시행하는것을 내각령으로 금지하였는데도 경기관찰사(김사묵)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문으로 시행하였다고 하고 있슴
후일 1934. 6. 1일자 삼천리(잡지)에서는 김사묵 경무사는 경남, 경기도관찰사
경력을 가진 경찰의 선배로 강직고결했든 인격자로 평하고 있습니다.
묘소는 충주 엄정면 논강리 선산에 위치하고 있읍니다.
<조선교육회>
1920년 6월 민족교육의 장려 진흥을 내걸고 출범한 교육운동단체.
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商在)·유근(柳瑾) 등의 발기로 1920년 6월 26일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김사묵(金思默), 이사에 윤치소(尹致昭) 외 14명, 평의원에 유근 외 23명을 선임했다. 이후 한국인의 재력과 노력으로 교육사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취지 아래 교육제도의 개선, 교육사상의 보급, 교육기관의 확장, 교육계 풍기의 개선, 도서관 설치 및 잡지 발행, 교육공로자 표창 등의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이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민교육회 =>대한국민교육회라고도 한다. 학교를 설립하고 문명적 학문에 응용할 서적을 편찬·번역하며 본국사기(本國史記)와 지지(地誌), 고금의 명인 행적을 널리 알려 애국심을 고취하고 사기를 앙양하기 위하여 회장 이원긍(李源兢)을 중심으로 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최병헌(崔炳憲)·유성준(兪星濬) 등을 구성원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 기금 10원 제출
현주소 : 京城 北部 諫洞 30의 3
日本遊覽紳士 : 1895년
<중추원>
당초 中樞院을 설치한 이유는 前記한 바와 같이 병합 당시 공로자 및 당시의 顯官 要職者들을 우대하고, 또한 총독의 자문에 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병합 당시의 공로에 의해 선임되었던 자는 되도록 종신토록 우대하기로 하여, 大正 10년(1921) 새롭게 제도를 개정하면서 그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에 中樞院을 활용할 방침을 세웠다.
朝鮮敎育會創立總會를 尹致昭 집에서 개최하다.
會長 李商在副會長 金思黙理事 尹致昭金厚秉兪鎭泰 東亞日報 1920.6.27·28
朝鮮敎育會創立 26일 京城 內 尹致昭씨 家에 朝鮮敎育會의 創立總會가 有하얏스니 회장 李商在, 부회장 金思黙, 이사 兪鎭泰씨 외 14인, 評議員 張薰, 兪星濬, 金思容씨 외 19人인 바 敎育界 아니 有志人士를<67> 殆히 網羅하얏스며 그 목적은 우리 現下의 교육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자는 훌륭한 바 世人은 斯에 대한 期望이 多한 동시에 同會의 有名無實에 不終하기를 切祝한다 하얏다.
隆熙 4年 6月 7日(火) 이 날짜 「大韓每日申報」에 의하면 中央政府와 地方官吏 間의 公文을 日文으로 行하는 것을 內閣令으로 禁止하였는데도 近日 各觀察使의 公文을 보면 京畿觀察使 金思默 以外에는 모두 日文으로 施行한다고 한다.[출전]
大韓每日申報 1910年 6月 7日
1903년(癸卯, 1903, 淸 德宗 光緖 29年, 日本 明治 36年) 7月 12日(日)
警務使署理 侍從院卿 李裕寅을 譴責, 警務局長 金思默을 2個月 減俸으로 施行하도록 命하다. 이 날 前記 李裕寅과 金思默이 各各 自劾疏를 올려 앞서 都民의 難食을 特別히 걱정해서 內藏院庫米를 廛商에게 移給하여
삼천리 제6권 제7호(1934년 06월 01일) => 저자 : 木春學人
기사제목 : 十三道觀察使의 其后
減價로 팔게 하라는 聖旨가 있었는데 奸商이 利를 取하기 爲해 米를 감추고 賣買하지 않아 巷說이 沸騰해졌으므로 警察의 職責을 擔當한 者로서 부지런히 檢察하지 못한 責任을 지고 請罪했기 때문이다
<十三道觀察使의 其后>
京畿 金思黙
김사묵 경무사의 二度 경력을 가진 경찰의 선배로 경남과 경기의 2도에 관찰사가 되엿는데 강직 고결하든 인격자이엿다. 지금은 그 存沒도 알 수 업스나 병합후에는 일시 찬의 노릇을 한 것 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