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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학 스크랩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詩 / 이동순
박물관 추천 0 조회 37 10.08.24 1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詩 / 이동순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마왕의 잠]으로 詩부문으로 당선된 후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분]에 당선,
문단에 데뷰하신 이동순님의 옥고를 게재합니다.
1987년 백석문학이 해금된 이후,최초로 백석시전집을 집필하여
문단에 백석이라는 문학을 복원, 많은 문인과 문학지망생들에게
백석시문학을 전수해주고,문단에 백석이라는 문학을 복원시킴으로
국내 백석문학연구의 1인자이십니다
[시인.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詩


李 東 洵



1

한 개인이 산출해내는 창작물로서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세상에 없다.

인간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의 어느 한 지점을 살아가고 있는 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심신에는 전대로부터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과 유전학적 인자들이 계승 전달되어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고보면 현실에서의 한 개인의 활동은 대체로 전대로부터의 영향에 기반해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어떤 사람이 수원 백씨 가문의 아무개파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신체와 정신 속엔 수원 백씨 아무개파 고유의 독자성과 그와 같은 어떤 무엇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인자적 요소만이 그의 오늘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오늘을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전대로부터의 바탕 위에 오늘의 사회와 환경 등

여러 공시적 요인들과의 관련에 의한 형성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제반 요소들을 토대로 해서 문학사 영향론의 중요성과 그 의미는 일단 성립이 된다.

2

문학인의 창작이라는 것도 그의 창작행위와 그 과정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그가 습작 시기에서 과연 어떤 선배 문인을 특히 좋아했으며,

선배 문인의 작품 경향에 얼마나 오랫동안 심취했었던가가 중요한 관심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한 문인이 기성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사회와 환경의 영향이 그 첫번째일 것이지만

선배 문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야말로 그 다음의 부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습작 시절에 대개 어느 특정한 선배 문인들에게 깊이 심취해본 경험들이 있다.

선배 문인의 창작세계와 그의 정신적 통로를 거쳐나옴으로서

우리들의 창작에 대한 안목은 놀랍도록 발전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선배 문인들의 작품세계와 정신은 후배 문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훌륭한 교본이나 창작을 위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가령 고려 시대의 작품들은 신라의 그 화려했던 향가 문학의 형식과 내용,

문학 정신 따위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것을 자기 시대에 맞게 개량하고 발전시켜서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문학 형태를 만들었다.

조선 시대의 작품들도 고려 시대의 작품에서 계승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

황진이와 기녀들의 시조작품만 하더라도 이별을 주제로 한 신라의 향가와 고려가요에서의 [만전춘 별사] [가시리] 등에서 배달된 요인과 잠재력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진다.

조선 시대 기녀들의 작품에 나타난 이별 정서는 김소월 한용운 등 현대 시인들의 시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또 소월 만해의 시작품은 그 이후의 전통적 서정시의 출현에 커다란 자극과 충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모든 개별적인 작품들은 결코 그 자체가 평지에서 돌출한 듯이 독불장군으로 생성된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셈이다.

사실상 문학사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영향을 토대로 해서 형성되어가는 문학의 한 영역이다.
한 작가의 작품 속에는 그 작품을 가능하게 했던 "어제"의 요소, 즉 전통성이라든가

역사성 따위로 풀이될 수 있는 과거 시간의 요소가 들어있고 그 기반 위에 "오늘"의 요소,

즉 현재성, 사회성 따위로 풀이될 수 있는 공시적 요소가 상호 배합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춘원 이광수가 일찍이 20세기 초반, 그의 문학적 견해를 나타낸 글

[문학이란 何오?]에서 말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과거란 없다 함이 가하다.

앞으론 오직 양양한 미래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지나간 시간에 대한 전면부정,

전통단절론 따위가 얼마나 무리하고 반이성적인 것이었던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의 심각성은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후배 문학인들에게 그대로 흡수 전달되고

또 통합된다. 정지용, 이병기 등의 시작품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조선 중엽 이후의 서간문들이 지니고 있던 이른바 아어체(雅語體)의 높은 품격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관통하고 있는 독특한 여성적 어투와 그 화법은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하나의 관습처럼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내방가사(규방가사)의 문체로부터 받은 영향이라는 설도 있다.
채만식의 소설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바로 남도 특유의 판소리 가락이라는 설은 거의 확실하다.

실제로 채만식은 어려서부터 들었던 판소리 가락에서 자신의 창작 심리의 토대를 찾고자 했고, 직접 판소리 연창을 듣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 점은 김영랑, 서정주 등의 호남 출신 시인들의 작품 경향에서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채만식은 그의 풍자적인 소설 [태평천하] [치숙] 등의 작품 속에서 판소리 특유의 문체인 아니리調,

추임새의 삽입 등 전적으로 판소리 형식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을 원용 채택하고 있다. 김영랑은 전남 강진의 고향집에서 기거할 때 아예 판소리 가객을 초빙해다가 연창을 듣기 위해 커다란 대청마루가 딸린 건물까지 일부러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판소리의 영향은 오늘날 호남에서 배출된 시인들의 작품 속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바

특히 김지하의 담시 계열의 작품들 [오적] [소리내력] [비어] 등의 작품이나 80년대 초반부터 집필되기 시작한 이른바 "대설(大說)" [남(南)] 연작에서도 짙게 나타난다.

고은의 [만인보] 연작 시리즈와 최근에 완성한 그의 서사시 [백두산]에서도 남도 판소리 가락의 영향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타 김준태, 김용택, 그리고 "오월시" 동인들의 작품속에서도 마찬가지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창작물들은 상당한 부분이 전통문화의 유산에서 받은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선배 문인이 후배 문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떠한가.

우리는 한때 시인 정지용의 작품세계는 물론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왜냐하면 정지용이 월북 시인으로 늘 낙인 찍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경력 일체가 정치적인 금지 속에서 매몰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채동선 작곡 정지용 작시의 [고향]이란 가곡도 분단 이후 이은상, 박화목 등에 의해 개작된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을까.

그러나 정지용이 일제 후반기 {문장}지에서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배출해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 등은 그들 문학 작품의 초기 성과들에서 자신을 뽑아준 정지용의 작품을 방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물론 이런 경우 후배가 존경하는 선배 시인의 작품에 깊이 심취하고 경도된 나머지 선배 시인의 창작방법을 흉내낸 아류 작품을 산출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청록파" 삼가시인이라고 불리우는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경우가 더욱 정지용적인 요소가 있다.

그들 세 사람이 펴낸 {청록집}을 보면 이름을 가리고 보았을 때 이것이 과연 조지훈의 것인지 정지용의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작품들마저 있는 것이다.

1920년대 후반 카프 계열 시인들의 작품에는 일본 프로문학 작품의 영향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또 김석송의 작품에 끼친 미국의 민중시인 월트 휘트먼의 영향도 명백한 사실로 인정된다.

김안서 김소월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전래 민요의 독특한 가락의 재창조도 인상적이다.

김소월의 학교 후배로서 선배인 소월의 문학을 흠모했던 백석의 문학에는 소월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백석의 문학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국내외 문학인은

제임스 조이스, 프랑시스 잠,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이사코프스키 등을 들 수 있다.

서정주의 초기시에 영향을 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에르의 영향도 지적할 수 있다.

김팔봉의 시에 깊은 각인을 주었던 일본의 국민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영향.

황석우의 시에 영향을 주었던 일본 아나키즘 시인들의 흔적, 김춘수에게 영향을 주었던 독일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등 여러 사례들을 들 수 있다.

3

우리는 이 가운데서 시인 백석의 영향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심도있게 논의하고자 한다.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 풔?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 恝?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 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현재까지 약 90여편 가량의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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