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려각八旌閭閣
진주정씨진양군충장공파절제공파 해룡지파 33세 폄우 동석
어렴풋 잠결에 들으니 운전하던 동생이 “요 밑에 8열녀각이 있다“한다. 눈이 번쩍 뜨인다. 급히 ”들렸다 가세“하고 왼쪽을 보니 바다가 보인다. 동생은 말없이 차가 별로 없는 곳이라 유턴하니 오른쪽 저 앞쪽에 열녀각이 내려다보인다. 500여m 가다 유턴하여 급경사인 농로를 따라 열녀각 옆에 차를 세웠다. 풀 한 폭 없는 돌 섞인 비탈이다. 보니 바다까지 100여m 남짓 잔디가 없으니 황량하기만 하다. 왜 이렇게 두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보고 갑시다” 재촉한다.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밖에 세워진 비석부터 스마트폰에 담았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좀 그렇다. 동쪽 문을 열고 들어가 가운데 문을 활짝 열고 예禮는 갖추었다. 왼쪽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또 8분의 신주를 왼쪽에서 두 번씩 재차 담았다. 마음이 급한데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닷가로 나와 역광이지만 여러 기념비를 촬영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니 눈부신 햍빛에 해상록 그날의 일기가 떠오른다 ….
9월 27일 (선조30년 1597년 정유년)
배가 칠산(七山)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적선을 만났다. 사공의 놀란 고함에 온 배에 탔던 사람이 창황 실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님 이씨(李氏)께서 형수 박씨(朴氏)와 아내 이씨(李氏), 시집 안 간 누이동생에게 이르기를,
“추잡한 왜적이 이렇게 닥쳤으니 횡액을 장차 예측할 수 없구나. 슬프다, 우리네 부녀자가 자처할 방도는 죽음 하나만이 생사 간에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하시니, 아내가 말하기를 ,
“집에서 난을 처음 당했을 때, 일찍이 가장과 더불어 죽기를 약속했지요. 저의 결심은 이미 정해 있습니다.”
하고는 낯빛도 변함없이 늙은 어버이께 하직을 고하고, 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고 하오니 당신은 조심조심 몸을 아껴 형제분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꼭 생환토록 하시오. 이것이 바로 장부의 할 일 입이다. 간절히 비옵니다.”
하였다. 드디어 어머님ㆍ형수님ㆍ누이동생과 더불어, 앞을 다투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우리 형제는 적도(賊徒)가 배 안에 묶어 두어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었으니, 망극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법포(法浦*법성포)에서 피난하던 배가 애초에는 바둑판 벌여 있듯 했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만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쳐, 간장이 찢어질 듯하였다. 왜장의 이름은 삼소칠랑(森小七郞)이며, 바로 왜국 남해도(南海島) 아파수(阿波守) 봉수하 가정(蜂須賀家政)의 별장이라 하였다. 이날 갑자기 해천(海天)이 참담하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광풍이 크게 불고 폭우가 쏟아지며 물결이 공중에 솟구쳤다.
九月 二十 七日
船到七山大洋中。忽遇賊船。蒿卒驚呼。一船人蒼黃失色。罔知所措。母夫人李氏謂邱嫂朴氏,妻李氏,未笄妹曰。賊醜此迫。禍將不測。嗟吾四婦女自處之道。無出一死。將無愧於幽明之間矣。妻曰在家亂初。曾有與夫同死之約。吾計已定。神色不變。告訣老親而顧謂余曰。至誠感天。竊願卿卿愼重自愛。與兄衛親。必圖生還。此是丈夫之事。至祝至祝。遂與母嫂妹爭先投海。吾兄弟則賊徒縛置船中。求死不得。罔極罔極。痛哭痛哭。法浦避亂之船。初如布碁。而奈何吾獨至於斯境。叫天扣地。肝摧腸裂。船倭將名森小七郞。乃倭國南海道阿波守蜂次賀家政之別將云。是日忽海天慘惔。頑雲結黑。獰風大起。驚雨驟作。波浪接空。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9대 숙종조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숙종 7년 6월 30일 신해 3번째 기사 1681년 정유재란 때의 함평인 정함일의 처 이씨 등 12절부를 정려하다.
12사람의 절부(節婦)를 정려(旌閭)하였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년)의 변란(變亂) 때 함평인(咸平人) 정함일(鄭咸一)의 처(妻) 이씨(李氏), 정함일의 장자(長子)인 정경득(鄭慶得)의 처 박씨(朴氏), 차자(次子)인 정희득(鄭希得)의 처 이씨(李氏), 정함일의 딸 정씨(鄭氏), 정운길(鄭雲吉)의 처 오씨(吳氏), 정주일(鄭主一)의 처 이씨(李氏), 정주일의 아들인 정절(鄭㦢)의 처 김씨(金氏), 정절의 아들인 정호인(鄭好仁)의 처 이씨(李氏), 경도인(京都人) 심해(沈諧)의 처 정씨(鄭氏), 권척(權陟)의 처 정씨(鄭氏), 무장인(茂長人) 오굉(吳宏)의 처 변씨(邊氏), 김한국(金翰國)의 처 오씨(吳氏) 등 온 족친(族親)이 함께 배를 타고 난리를 피해 영광(靈光)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적선(賊船)이 뒤쫓아오자, 12절부가 동시(同時)에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당초에 모두 정문(旌門)하고, 일을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었었는데, 자손(子孫)이 쇠잔하고 유락(流落)해서 폐지(廢止)한 채 거행하지 못하였었다. 이때 이르러 그 후손(後孫)들이 연명(聯名)하여 상언(上言)하자, 예조(禮曹)에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게 되었다.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들이 살던 고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
재촉하는 소리에 돌아서서 보니 뱀골봉 산등성이는 강원도 어느 산을 연상케 한다. 이곳의 인연은 1999년 8월 정년을 퇴임하고 진도 해남을 거처 목포 장인장모님을 뵙고 영광에 들어서니 “백수 면사무소에서 갓봉을 거쳐 새로 등산로를 개장한다”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산행을 좋아하고 장비가 있으니 지나칠 수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중부님과의 사연도 있는 곳이다. 다음날인 12월 5일 일요일 면사무소에서 등산이 시작되어 중간에 준비된 도시락을 먹고, 6.25때의 참상을 들으며 폭신한 길을 걸으니 등산 끝(뱀골봉)에 이르렀다. 비탈진 급경사면 아래에 비각이 보인다. 평소에 선친께서 말씀하시고 족보에서 읽었던 열녀각인가보다 했지만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모두 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직선거리로 300m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10여년전 여름, 동생이 77번 해안도로가 전국 해안도로 10경 안에 든다며 법성포까지 가며 찾았지만 모르고 지나쳤다.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충청남도 지역의 열녀각을 통째로 옮겨 논 정려각이 있다. 답사를 다닐 때 종종 정려각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8열녀각이 생각나곤 했는데 이번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러 봤다는 안도감에 기쁘다. 언제 기회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번에는 꼭 들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였다. 동생(대석)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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