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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雅歌書)
(1:1)"솔로몬의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 입니다"(원문에는 '아(雅)'자가 없음).
솔로몬은 일찍이 노래 일천다섯 수를 지었는데(왕상 4:32), 그의 많은 시구(詩句) 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귀한 것이 이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지성소는 거룩한 곳 중 거룩한 곳이며, 주 예수님은 왕 중 왕이시요 주(主) 중의 주이시며, 이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 전도서는 공허함 중의 공허함이요, 이 노래는 노래 중의 노래이다.
이 노래(아가서)와 전도서는 서로 대조적이다. 전도서는 방황의 생활을 말한 것이고, 이 노래는 방황으로부터 안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전도서는 사람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지 못함을 말하고, 이 노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전도서는 해 아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고, 이 노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전도서는 대상을 잘못 찾았고 길도 틀렸으므로 결과가 공허 중의 공허함이고, 이 노래는 찾는 것이 옳고 길도 옳으므로 결과도 좋다.
제1단락 처음의 추구와 만족(1:2-2:7)
이 단락은 이 책의 요점이다. 영에 속한 체험의 원칙이 다 여기에 있다. 이 단락은 이후에 체험할 것에 대한 한 폭의 그림이다. 이후에 배울 것은 결코 새로운 공과가 아니며, 한 차례 한 차례 지나면서 더 깊이 배울 뿐이다.
이 책의 영에 속한 체험은 매우 평온하고 순조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체험들이 다 이 단락에 있다. 처음의 헌신과 처음의 계시는 모두 매우 평온하고 순조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의 헌신과 나중의 계시는 반드시 확실하게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반드시 불을 통과해야 한다. 이 단락은 영에 속한 체험에 대한 한 폭의 그림이며, 이후로 하나 하나 시험하여 그것으로 실재가 되게 해야 한다. 처음의 체험은 결코 깊지 않으며, 두 번째 체험은 더 전진되고 더 믿을 만하다. 그러나 사람이 두 번째 체험을 할 때에는 결코 첫 번째만큼 달콤하지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든 여전히 이전에 체험한 것이다. 깃발은 사랑이다.
이 단락의 체험은 '영성의 흐름'에서 말한 빛과 길 같고, '영적 생명의 네 단계'에서 말한 부흥 단계와도 같다. 이것도 우리 개인의 체험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Ⅰ. 사모함(1:2-3)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2절에서 추구하는 '입맞춤'은 결코 아버지가 우리의 목을 안고 입맞추는 것이 아니다(눅 15:20). 왜냐하면 그러한 입맞춤은 용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님께 속한 모든 사람은 이미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주의하는 것은 곧 믿는 이와 주님 사이의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사해 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 노래는 결코 우리에게 한 사람이 어떻게 하여 죄인의 위치에서 변하여 믿는 이가 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고, 한 믿는 이가 어떻게 하여 굶주리고 목마른 위치에서 만족한 위치에 이르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비로소 이 노래가 왜 이같이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첫 번째 부르짖음이 생명을 얻고서 얼마나 지난 뒤에 있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르짖음이 구원받은 한 사람이 성령에 의해 일깨워진 후에 주님에 대해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긴 상태임을 안다. 그녀의 마음이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그의 입으로 내게 입맞추기 원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녀는 결코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중에는 단 한 분의 '그'가 있는데, 곧 그녀가 추구하는 '그분'이다. 이전의 그녀와 주님과의 관계는 보편적인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녀는 매우 불만족스럽게 느꼈다. 그녀는 이제 주님과 보다 개인적인 왕래를 갖기 원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입맞춤', 즉 사랑의 개인적인 표시를 사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과 입맞출 수 없으므로, 이것은 개인적인 표시이다. 또한 유다가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입맞춘 것이 아니고(마 26:49), 그 여인이 한 것처럼 그의 발에 입맞춘 것도 아니며(눅 7:38, 45) '입으로 나에게 입맞춘'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랑의 표시이다. 지금의 보편적인 것은 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다.
나는 이제 개인적인 것, 다른 사람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진보의 시작은 이러한 요구가 속에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영성(靈性)의 양성은 배고프고 목마른 추구와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다. 만일 한 믿는 이의 안에 아직 성령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러한 평범한 상황에 불만족하여 개인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이 주님과의 친밀한 체험을 갖게 한다는 것은 영원히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곧 나중에 있게 될 모든 체험의 근원이다. 우리에게 만일 이러한 배고프고 목마른 마음이 없다면, 아래의 모든 기록은 시적 의미를 지닌 노래에 불과할 뿐, 결코 솔로몬의 노래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 내게 이러한 추구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상(異象)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게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 이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시를 얻어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것 때문에 나는 그의 입의 입맞춤을 사모하는 것이다.
참으로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아름답다. 성령은 나에게,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으며, 사람을 흥분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람이 자신을 쏟을 만하다고 여기는 해 아래의 어떤 것도 당신의 사랑만 못하다. 나는 보았고, 나는 알았다. 해 아래의 어떤 것을 당신의 사랑에 비할 수 있겠는가!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당신 자신은 기름 부음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기름을 바르며, 당신은 성령으로부터 각종 기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향기를 맡을 뿐 아니라 우리도 당신의 향기를 맡는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어디에서 들은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본 것도 아니며 우리가 영문도 모르게 당신의 향기로운 기름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동시에 당신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이 우리를 매혹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부터 이미 하나님이 나왔음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기름은 이미 쏟아 부어졌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미 죽으셨음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기름이 이미 부어졌습니다! 오 예수, 이 이름은 정말로 귀합니다! 그러나 누가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향기를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당신 자신(기름)으로 인해, 당신의 이름(쏟아진 기름)으로 인해 '처녀들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 자신 때문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사랑할 수 없고, 우리는 어떤 능력을 사랑할 수 없으며, 다만 인격이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매혹된 것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비록 여기 있을 때 우리가 아직 당신의 향기를 충분히 맡지 못하지만, 우리가 맡은 것으로 이미 당신을 사랑하기에 충분합니다. 주님의 품격에 대한 계시가 사람으로 하여금 찬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게도 합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시발점은 곧 주님의 품격을 보는 것이다.
'처녀들'은 곧 '숨겨진 자들'(시 83:3)이요 '규수(閨秀)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녀들은 이 여자의 동반자들이다. 그녀들도 똑같이 정결하고, 똑같이 주님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영에 속한 길을 가는 사람은 실로 그녀 한 사람만이 아니요 그녀는 처녀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Ⅱ. 추구함(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달려간다'의 원문의 뜻은 '뒤쫓아 따르다'이다. 우리가 비록 원함 이 있고 기꺼이 따르고자 해도 우리는 추구하는 능력의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추구의 능력은 결코 성령이 우리 안에 한 덩어리의 능력을 나눠 주어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밖에서 그분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우리를 매혹시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매혹시키는 능력이 바로 추구하는 능력이다. 만일 주님이 참으로 나를 매혹시킨다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당신이 만일 나를 매혹시킨다면,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리라"('따라 달려간다'는 것은 즉시 원한다는 뜻이다). 빨리 달려 쫓아가는 능력은 주님의 매혹시키심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의지해 주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배워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주님께 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매혹시킴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이가 된 후에도 여전히 빨리 달려가 주님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매혹시킴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는 이 개인과 믿는 이들과의 관계도 본다. 매혹당하는 것은 나이지만 '당신을 따라 달려가는' 것은 '우리'이다. 침궁으로 이끌어 들여진 것은 '나'이지만,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이다. 만일 한 사람이 주님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다른 사람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Ⅲ. 교통함(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그녀의 기도가 있은 후에, 우리는 그녀가 곧 응답-'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을 얻은 것을 본다 '침궁'은 '은밀한 곳'(시 91:1)으로 잠자는 방이다. 당신이 만일 어떤 사람과 친분이 상당히 두텁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그를 당신의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이 그녀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교통의 시작이요 계시의 기점(起點)인 것이다. 그 침궁 안에서 그녀는 이전에 맛보지 못한 교통을 맛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사실도 본다.
여기의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직 주님을 남편(사랑의 대상 : 역자 주)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 먼저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인식해야 함을 보여 준다. 헌신의 생활은 항상 사랑의 생활 이전에 있고, 만족된 체험은 항상 헌신의 절차 뒤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인데, 우리는 그녀가 이미 그녀의 왕을 인식했다는 것을 본다. 이제 왕은 침궁의 체험을 그녀에게 주려고 한다.
이제 처녀들은 고개를 들고 장래의 전도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 앞길이 무한량(無限量)함을 안다. 침궁의 체험이 시작되면 사랑의 생활에는 만족스런 소망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하나님이 일단 역사를 시작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빌 1:6). 그러므로 그녀들은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장래에 있을 것들에 대한 말이다. 그녀들은 지금 체험이 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것이다. (포도주를 찬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잠언 23장 35절을 참조할 수 있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는 마땅히 "그녀들이 정직함 안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로 해야 한다. 그 뜻인즉 그녀들의 이러한 사랑은 선한 양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딤전 1:5).
Ⅳ. 침궁의 계시 (1:5-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원문 참조). '예루살렘의 딸들'은 어떤 류의 사람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시(詩)이므로 여기의 예루살렘은 결코 땅 위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이 처녀들이 하늘의 예루살렘 영역 안에 있는 한, 그들은 틀림없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녀들을 딸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그녀들은 하나님이 낳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다지 추구하지 않으며 아주 냉담하고 모호하며 마음대로 하는 한 무리의 사람일 뿐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녀들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간신히 구원받은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그녀가 침궁에 있은 결과, 먼저는 자신이 검다는 것을 보았다. 추구가 없으면 볼 가능성조차 없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이 검음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 검음은 검게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검은 것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사랑하는 자 안에서 자신이 열납받는 것도 본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열납받는 것을 가리킨다.
"계달의 장막과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달'은 '암실'이라는 뜻이다. 계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외면이 검고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휘장'이 만일 세마포로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킨다(계시록 19장 8절에서 말한 의(義)는 성도가 성령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의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는 구약이므로 성도의 의를 가리킬 수 없다). 이 휘장은 당연히 성전 안에 있는 것이다. '솔로몬의 장막과 같다'는 것은 내적 아름다움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이다.
"해가 나를 쬐어 내가 검으니 나를 쳐다보지 말라 나의 어머니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다비 역).
'해'는 원문에서 하나의 전문관사이다. '쬐어 검다'에서 '검다'라는 글자가 원문에는 없다. 그녀는 하나님이 침궁에서 빛 비추셨기 때문에 이미 자기가 검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이 그녀의 그때의 심경(心境)이다. 성령이 사람을 깊이 처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 앞에서 가리기를 좋아한다. 성령에 의해 더 깊은 부분까지 처리를 받은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는 사람 앞에서 어떤 것도 덮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때에야 그녀가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같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는 기꺼이 "그 해가 나를 쪼이므로 나는 검습니다."라고 시인한다.
"나의 어미의 형제가 나에게 화내어". 여기서 '아비'라고 말하지 않고 '어미'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의 '어미'가 약속의 원칙 곧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28절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미의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을 말한다.
'형제'는 객관적인 방면을 대표한다. 이러한 어미의 형제들은 교리적인 방면에서 아주 역량 있고, 객관적인 방면에서 아주 강하며 또한 비교적 권위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침궁의 가르침이 있으며 일에 변화도 있기 때문에, 어미의 형제들이 그녀를 경시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화를 내게 된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아 내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네". 앞에 말한 포도원은 복수로서 사람의 손으로 조직한 것이다. 뒤에 말한 포도원은 단수로서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것이다. '그들이 일찍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네'는 이전의 일이다. 그녀는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고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받은 후에 이전 일의 공허함, 즉 사람이 그녀에게 위임한 것을 했을 뿐 하나님이 그녀에게 하도록 정하신 것은 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7절에서, '사랑'은 동사이다. '양을 치다'는 '양을 먹이다'로 하는 것이 더 낫다. '얼굴을 가리움'은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녀는 침궁에서 이미 외적인 일이 공허한 것임을 보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양식과 안식임을 보았다. 왜냐하면 먹이는 것은 양식을 중시하는 것이고 누워 쉬는 것은 안식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늘 이후로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양식과 안식이다. 이 '안식'은 완전한 안식이다. 왜냐하면 정오는 완전한 때-"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이기 때문이다. 정오에 이른 것은 완전한 위치에 이른 것이다. 태양이 정오에 이르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정오에서 오후 세 시까지 이르렀다. 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시작부터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것이었지 조금씩 증가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이 '동무'는 주님의 동무이다. 그러나 양은 주님의 양 떼가 아니고 주님의 동무의 양 떼이다. '얼굴을 가리다'는 '창피를 당하다'이다. 그녀는 아직 양무리 밖에 있다. 그녀는 부득불 주님께, "당신은 왜 나에게 어디에서 양식을 찾아 얻으며 어디에서 안식을 찾아 얻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줄곧 양식과 안식을 추구했으나 동쪽에서도 찾지 못했고 서쪽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동무의 양 떼 곁에서 장소를 잃고 유리하는 사람처럼 그들의 비웃음과 비평을 받았습니다. 주여! 당신은 왜 내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Ⅴ. 왕의 말함(1:8-11)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그녀가 침궁에서 본 세 가지는 (1) 아담 안에서 검고 사랑하는 자 안에서 아름답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처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일의 공허함을 보았다. (3) 영적인 필요를 느꼈다. 그러므로 이때에 주님은 그녀에게 추구로 말미암아 응답을 주셨고 칭찬하고 약속을 주셨다.
A. 왕의 응답(1:8)
왕은 그녀를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불렀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이 말의 어조는 마치 왕이 약간은 그녀를 꾸짖는 듯한데 그 뜻은 그녀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르라". '양 떼의 발자취'는 한 면에서 오늘날 믿는 이들의 발자취로서 한 무리가 서 있는 위치, 즉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오늘날 양은 비록 많지만 무리를 짓지 못하고 교회의 위치에 서 있지 않다). 당신이 어디에서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가? 또 한 면에서는 이 오랜 세월 동안 이미 죽은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이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당신도 양식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자취'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방목'과 '목양'은 같은 단어로 '먹이다'는 뜻이다. '어린양'은 양이 아니며(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양이기 때문임), 양 떼도 아니고(왜냐하면 그녀는 양 떼 밖에 있으므로), 그녀보다 더 어린양이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어린양)를 먹일지니라". 이것은 사람이 양식과 안식을 추구하고 있을 때에 일상생활 중에서 염소 새끼에 대한 본분을 잊고 염소 새끼의 문을 닫아 버릴까 염려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을 주의한다. 양식과 안식을 추구할 때에도 어린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문을 닫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의 양식과 안식은 여전히 어린양을 먹임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의 '목자'는 복수로서 작은 목자, 즉 주님 휘하의 목자들을 말한다. '장막'도 복수이다. 주님의 뜻은 그녀가 많은 목자들 곁에서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 사이에서 어린양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면에서 그녀는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과 믿음과 기다림과 의지함과 하나님의 뜻을 구함과 전심으로 기도함 등을 따라야 하며, 또 한 면에서 그녀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녀보다 더 어린 믿는 이를 돌보는 데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추구하고 있을 때에도 일상적인 본분을 느슨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B. 왕의 칭찬과 약속(1:9-11)
'준마'는 원문에서 좋은 말(馬)이란 뜻이다. 솔로몬 당시의 말은 모두 애굽으로부터 왔다(왕상 10:28-29). 9절에서 10절은 그녀의 천연적인 아름다움이요, 그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11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 구절에서 여섯 가지, 즉 (1) 말 (2) 뺨 (3) 머리카락 (4) 목 (5) 금사슬 (6) 은을 박음을 말한다. 이제 하나씩 보기로 하자.
(1) 말(馬). 성경에서 말에 대해 유일하게 취하는 것은 그것의 빠름이다. 시편 147편 10절은 "말의 힘이 크다"라고 말한다.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많은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이라는 뜻이다. 영적인 의미로는 그것의 빠름을 취한다. 말은 천연적인 면에서 빠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은 힘이 세기 때문에 빠르다. 여기의 '빠름'과 1장 4절의 '빨리 달림'은 아주 대조적이다. 빠르긴 빠르나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빠를 뿐이다.
(2) 뺨. 사람의 아름답고 추함은 두 뺨에 달려 있다. 뺨은 가장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3) 머리카락. 뺨의 아름다움은 땋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드러난다. 머리카락은 천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연적인 능력으로부터 온 것임을 볼 수 있는데, 그 뜻은 그녀가 아직도 천연적인 방면에서 좋다는 것이다.
(4) 목. 목의 장식은 그녀의 천연적인 온유함을 가리킨다. 목은 원래 곧은 것인데, 그녀에게는 장식품이 있으므로 그녀가 천연적인 온유함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진주 목걸이가 없는 목은 모두 곧은 목이다). 9절은 그녀를 말에 비유했고 10절은 그녀를 말에 비유한 이유를 말한다. 그녀의 천연적인 능력과 온유 때문에 그녀가 빠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녀가 비록 침궁의 계시와 영적인 추구를 갖고 있지만, 그녀의 천연적인 빠름, 즉 천연적인 능력과 온유가 여전히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천연적인 빠름 때문이다. 9절과 10절에서 그녀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천연적인 아름다움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래의 두 가지는 하나님이 그녀를 위해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가 하리라"는 왕의 약속이다. 성령은 여기에서 삼이일(三而一) 하나님을 생각했다.
(5) 금사슬. 금으로 사슬을 만들려면 반드시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한다. 금사슬은 가장 정교한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가장 정교한, 그런 종류의 표현이다. 또한 '사슬'은 원문에서 면류관 같은 것으로, 둥글며 금사슬의 면류관 같다. 금사슬로 땋은 머리카락을 대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 생명, 영광에서 나온 것으로 그녀의 천연적인 능력을 대체한다는 의미이다.
(6) 은을 박음. 혹은 '은받침'이라고도 번역한다. 은(銀)은 '구속'을 의미한다. '은을 박아 넣다'는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에 근거하여 금사슬이 땋은 머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대체한다는 뜻이다.
Ⅵ. 여인의 말함(1:12-14)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A. 항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1:12-13)
12절에서 솔로몬의 상은 성경이 특별히 제기한 것이다(왕상 4:22-23, 10:5). '왕의 상에 앉았을 때'는 믿는 이가 주님의 풍성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풍성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밀가루로서 이것은 주 예수님의 생명, 주님 자신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기 요리로서 이것은 주님의 일,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왕의 상에 앉았을 때'는 우리가 음식을 먹으며 누리고 있을 때를 가리킨다. 우리가 왕의 식탁 앞에 올 때마다, 그것은 늘 양식을 얻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 곧 하나님이 기뻐하신 그 역사를 받아들인다(그러므로 구약의 제물에는 남겨 두어 사람으로 먹게 한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을 먹는가? 하나님은 주님의 죽음을 보시면 곧 제물-속죄-을 보신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이 단지 대체일 뿐 아니라 연합임을 본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곧 향기와 찬미를 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열납하신 제물이 곧 우리가 누리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헌신하고 찬미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것과 하나님이 얻으신 것이 같다는 것을 본다면, 자연히 나도 기름이 흘러나올 것이다(나도 기름의 흘러나옴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먼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주님께 드린다. 먼저 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헌신이 있을 수 있다.
13절의 '몰약'은 고난 받음, 즉 십자가를 의미한다. 주님이 곧 돌아가시려 할 때, 어떤 사람이 그분께 고통을 의미하는 식초를 마시게 했다. 주님이 죽으신 후에 니고데모는 죽음을 의미하는 몰약으로 주님의 몸에 발랐다. '밤'이라는 이 단어는 이 책에서 모두 솔로몬이 없을 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의미에서, 주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고 또 이 세상에도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품'은 '양 가슴', 즉 '양 가슴 사이'로 번역해야 한다. 양가슴은 성경에서 모두 '믿음과 사랑'을 가리킨다(살전 5:8).
12절과 13절은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말한다. 12절의 상에 함께 앉음은 당연히 함께 먹는 것이다. 함께 상에 앉는 조건은 문 즉 안의 문을 여는 것이다(계 3:20-21). 안의 문을 열지 않으면 함께 상에 앉을 수 없다. 그러므로 12절에서는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따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몰약'은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지 않을 때 믿음과 사랑을 사용하여 지켜야 하는데, 이것이 안의 교통의 시작이다. 우리가 참으로 침궁으로 인도되고, 참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참으로 헌신한 후에, 우리는 그분과 내적인 교통을 갖기 시작한다. 마음 문을 열면 그분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참된 헌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고난 받고 죽으신 한 분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믿음과 사랑을 사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B. 외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음(1:14)
14절에서, '봉선화'(鳳仙花)는 손가락에 물들이는 꽃으로 유대 여인들이 몸에 지녔던 것이다. '엔게디'는 유대의 지명으로, 글자의 뜻은 '어린양의 샘'이고, 다윗이 피신했던 땅이며 광야의 지방이다(수 15:61-62, 삼상 23:29). '포도원'은 마땅히 '포도밭'으로 번역해야 한다. 포도의 끝은 보이지 않고 포도밭은 꽃이 없는 곳이다. 이 포도밭은 광야에 있는 것으로, 만일 그 가운데 한 송이 꽃이 있다면 매우 돋보일 것이다.
14절의 범위는 13절보다 크다. 봉선화 한 그루는 광야의 포도밭 가운데 있는 것으로, 특별하게 나타나고 돋보이는 그리스도의 특수함을 가리킨다. 몰약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이 볼 수 없으므로 안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녀의 장식품이 되었고 그녀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이것은 밖으로도 그리스도를 인정했고 그리스도를 나타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사람 앞에서 봉선화요, 그녀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Ⅶ. 왕의 칭찬(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5절의 "어여쁘고 어여쁘다"는 '아름답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보라! 너는 아름다운 나의 사랑하는 자라! 아, 너는 아름답구나! 네 눈은 비둘기의 눈 같구나!" 여기의 칭찬은 그녀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 그녀가 아름답다고 말한 것은 격려요, 두 번째로 그녀를 칭찬한 것은 그녀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기 때문이다. '비둘기의 눈'은 사실적인 면에서는 아름답고,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영에 속한 안목을 가리키며, 기능으로 말하면 한번에 한 가지 사물밖에 볼 수 없는 단일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계시, 즉 영에 속한 안목을 얻었다. 그녀는 이미 몰약을 가슴에 품는 단순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왕이 이렇게 그녀를 칭찬한 것이다.
Ⅷ. 여인의 대답(1:16-2:1)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16절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를 "오! 당신은 아름다운 나의 사랑! 나의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뜻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기쁘다는 것이다. 이것이 왕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러요". 여기에서 이 여인은 이미 앞에서 그녀가 찾았던 안식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에는 안식이 있고 또 목양이 있다. 푸른 풀은 양의 침상이요, 눕는 것은 안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와 상합(相合)한다. 앞의 잔치에는 비록 안식이 있지만 먹는 것에 주의했다. 여기의 침상에서는 먹는 것도 있지만 주로 주의하는 것은 안식이다. 목자에게 만일 능력이 없다면, 양은 푸른 풀밭에서 계속 먹으려고 할 것이다. 목자에게 능력이 있다면, 양은 푸른 풀밭에서 누울 수 있는데, 그것은 즉 만족이 있고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17절의 '소나무'는 '잣나무'이다. 백향목은 높고 크고 견고하며, 성경에서 그것은 모두 지극히 영광스런 인성을 가리킨다. 성전 안의 많은 것들이 주로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요, 또 많은 것들이 잣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잣나무는 '죽음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서 나오므로, 잣나무는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대인의 무덤 곁에는 모두 잣나무를 심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안식을 얻는다. 푸른 풀은 모두 살아 있고 모두 생명이 있어서 양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 비로소 안식이 있다. 우리의 보호는 주님의 영광스런 인성과 주님의 죽으심에 있다. 솔로몬 성전 안의 주된 두 종류의 나무는 백향목과 잣나무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조화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은 백향목과 잣나무 사이에 거하신다. 우리가 지금 안식할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2장 1절은 마땅히 1장 17절에 이어져야 한다. 이 말은 왕이 한 말이 아니고 여자가 한 말이다. 만일 이 말이 왕이 한 것이라면, 조금 해석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왕이 한 말이라면, 다음 구절에서 여자를 백합화라고 하는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샤론'은 평원이다. '장미'는 '수선화' 혹은 '야생 장미'라고도 한다. 이 꽃은 유대에서 아주 천한 것이다. 골짜기 중의 백합화는 일반적인 것이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골짜기의 백합화이지 화분의 백합화가 아니다. 사람이 보살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하는데, 이는 왕이 1장 15절에서 그녀를 칭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1장 16절과 17절에서 한 면으로는 왕을 찬미하고, 또 한 면으로는 안식을 말했다. 이제 자신에 대해 말할 때에는 다만 들판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할 뿐이다. 그 뜻은, '나'라는 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에 의해 돌보심을 받는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Ⅸ. 왕의 대답(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절의 왕의 뜻은 그녀가 골짜기 가운데의 백합화인데 있지, 골짜기에 있는가 가시밭에 있는가의 비교에 있지 않다. 왕은, 이 여자는 백합화요 다른 것은 가시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가시'는 성경에서 볼 때, (1) 아담이 타락한 후에 사람이 소유한 천연적인 생명이다. 첫 번째 근거는 창세기 3장 18절인데, 거기에 있는 가시는 스스로 자라 나온 것이지 씨를 뿌려서 자라 나온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근거는 가시덤불이 있어서 불태워지나 가시는 타버리지 않는다(출 3장). 불과 빛은 가시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은 가시를 사용하시지만 가시를 소모시키지는 않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장래에 모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처리하고 이방인을 처리하실 때, 하나님의 어떠함으로 하시지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간증은 사람의 자본을 쓰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하나님 자신의 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것을 사용치 않으시고 자신의 것을 사용하신다. (2) 천연적인 것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 7절의 가시처럼 죄악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6장 8절에는 가시의 자람이 있는데, 그 의미는 자기의 뜻을 따라 과실을 맺는 것으로 결국 불살라지게 된다.
'여자'는 복수이다. 이 여자들은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죄악에서 난 사람이 아닌 백합화 같은 그분의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은 그녀가 죄악 중에서 생활하는 그런 무리와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주위가 모두 죄악의 생활이고 모두가 천연적인 생명이지만, 그녀는 그녀들과 다른데 이는 그녀가 믿음(백합화)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여기에서는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런 죄악의 생활 환경 중에서는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X. 여인의 찬미와 누림 (2:3-6)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3절 : "남자들 중 나의 그이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분의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분의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원문 참조).
이제 그녀도 왕을 죄인과 비교한다. '남자들'은 사랑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이요, 사람이 사모할 만한 것이요(창 3:16), 사람의 마음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요, 믿는 이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풀'을 주의해야 한다. '사과나무'는 원문에서 '불수감나무'인데, 항상 푸르고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다. 겉모양은 석류같고, 맛은 귤 같으며 약간 레몬 같기도 하다.
남자들은 일반적인 나무일 뿐이다. 그녀의 사랑하는 이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1) 그분은 수풀 가운데 계시지만 중심 되는 나무이시며, 따라서 높고 크다. (2) 그분의 그늘은 영원히 쇠하지 않는다(항상 푸르므로 감싸 주고 보호해 준다). (3) 그분은 열매를 맺는다(많은 것들은 푸르지만 열매 맺지 못한다). 그분은 높고 크며 동시에 그늘이 있고 또한 열매도 맺는다. 그녀는 여기에서 이미 주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심을 보았다.
앞에서 그녀는 이미 주님께 완전히 돌아왔다. 이것은 그녀의 간증인데, 즉 입으로 주님께 대해 하는 말이요, 여러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녀는 그분이 더 나은 포도주라고 말할 뿐 아니라 이제는 더 나은 포도주를 칭찬하고 말해 내었다. 그녀는 그때에야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본다. 교회 안에는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요 혹은 아볼로에게 속한 자(이것은 육체임)라는 분쟁이 없다(고전 3:3-4). 이제 주님이 그녀의 눈에 가득하다. '심히 기뻐하였고'는 '즐거워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분의 그늘에 앉아'는 높여지고 들림받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분의 그늘에 앉아서 기뻐하였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마치 들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 나무 그늘과 1장 6절의 햇볕에 쬐는 것은 서로 대조된다. 여기에는 안식이 있다(시 91:1). 과실은 달다. 여기의 먹는 것과 1장 12절의 먹는 것은 조금 다른데, 거기서는 주님 자신에 중점을 둔다. 여기의 과실은 칭의, 거룩게 됨, 평강, 성령 강림 등과 같이 주님의 역사와 생명이 우리를 위해 얻게 한 것을 가리킨다. 한 면에서 그녀는 그분의 임재와 즐거움을 느끼고, 또 한 면에서는 그분이 그녀를 위해 이룬 것을 누린다. 우리는 이 맛을 볼 때마다 달다고 느낀다.
1장 4절은 '달려간다'고 말한다. 1장 8절은 '따른다'고 말한다. 1장 12절부터 14절에서는 아마도 그녀가 앉아 있으나 그것을 말하지 않고, 1장 16절, 17절에서도 아직 그것을 말하지 않으며, 여기에 이르러서야(2장 3절) 정식으로 그녀가 '앉아서' 그분의 임재를 누린다고 말한다. 1장 16절과 17절에서 그녀는 이미 안식을 얻었는데, 여기서는 다만 정식적으로 서술한 것뿐이다.-즉 그녀가 1장 16절과 17절에서 얻은 것과 누린 것을 말한 것뿐이다. 1장 16절과 17절은 역사이고, 여기는 서술이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4절). 여기의 '잔칫집'은 '포도주의 집'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그 뜻은 마음껏 기쁨으로 환호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의 '인도하여'는 두 번째의 인도이다(첫 번째는 1장 4절임). 여기의 잔칫집과 실과의 누림은 왕의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잔칫집은 잔치를 하는 곳으로 기쁨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처음의 헌신이 있고서 십자가의 길을 거쳐 주님이 당신을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을 보게 되면, 당신은 자연히 포도주의 집으로 이끌려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왕이 침궁으로 이끄는 것은 계시를 위한 것이며, 왕이 포도주의 집으로 이끄는 것은 시원케 함을 위한 것, 즉 왕의 임재의 시원케 함을 위한 것이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다"는 곧 사랑의 깃발을 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사랑이다. 깃발은 당신이 행한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시이다. 우리의 깃발은 사랑으로,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사랑뿐임을 나타낸다. "당신이 나에게 건포도를 주어 내 힘을 부축해 주고 사과로 나의 마음을 소생시켜 주오 내가 사랑으로 인해 병이 났기 때문이라오"(5절, 원문 참조).
'시원케 함'은 '소생시킴'으로 번역해야 한다.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는 것은 기뻐서 힘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무디(D. L. Moody)가 기뻐서 참을 수 없으므로 주님께 그치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과 같다.
이 구절은 구하고 되살아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님 앞에서 여전히 좋다. 그러나 죽은 것같이 땅에 엎드러지는 것이 오히려 옛 성도의 주님 앞에서의 체험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누리는 것은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한 것이다. 주님을 누릴 수 있는 분량도 주님이 힘을 주셔야 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본 것은 너무 많고 누릴 분량은 부족하게 된다. 이 질그릇은 이런 분량을 갖고 있지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분량을 넓혀 준다.
"그분의 왼손이 내 머리 밑에 있고 그분의 오른손은 나를 안는구나"(6절, 원문 참조). 왼손이 머리 밑에 있다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그분을 바라보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손으로 안는 것은 사람을 안는 가장 자연스런 자세이다. 여기서 중점을 두는 것은 사랑의 보호요 사랑의 부축이다. 여기서는 능력의 부축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부축에 중점을 둔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데에는 주님의 은혜의 부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ⅩⅠ. 왕의 부탁(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7절의 '노루'는 다비의 번역본과 미국 표준역의 각주에 따르면 모두 '영양(羚羊)'(다수의 작은 영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 흠정역과 미국 표준역본의 본문에는 '암사슴'(다수의 암사슴)으로 되어 있다. '암사슴'은 영국, 미국, 다비 등 세 종류의 번역본에서는 모두 '붉은 암사슴' (다수의 암사슴)으로 번역했다.
'부탁'은 명령이며, 따라서 왕의 어조이다. 1장 2절부터 2장 6절까지에서 영에 속한 체험은 일단락 지어졌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가 여기에서 쉬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 아마도 마땅히 도달해야 할 고요함과 평범함과 평온함에 이른 것이다. 침궁으로부터 포도주의 집에 이르는데, 믿는 이가 순조롭게 포도주의 집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주님은 그녀가 잠시 멈추기를 원하신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고 일에 상관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녀들에게 그녀를 격동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사슴의 본성은 쉽게 놀라는 것이다. 왕이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그녀가 이미 사랑하여 병이 났으니 다시 무엇을 하게 하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손안에 있으니 너희는 다시 와서 그녀를 놀라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그녀의 일에 참견한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그녀가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땅히 이 시기가 지나갈 때까지, 또 그녀 자신이 두 번째 추구를 가질 때까지 쉬어야 한다. 그녀를 놀라게 하지 말고, 그녀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가 너무 혼에 속했기 때문에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생각지 말라. 그녀가 여기까지 공과를 배우면 조금 멈춰야 한다.
사랑이 정점에 달했다. 그러므로 왕은 여기에서 잠잠해야 한다(합 2:20). 그분(주님)은 묵묵히 당신을 사랑하시는데(습 3:17), 이것은 주님이 안식 가운데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제1단락의 결론의 말
(1) 그녀가 앞의 한 장에서 본 것은 십자가이지만, 그녀는 아직 부활의 왕성함과 부활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2) 첫 단락에서 첫 번째 위험은 그녀가 너무 내적인 교통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3) 십자가의 순종과 헌신의 결말과 경중(輕重)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녀가 아직 시련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실제적으로 십자가를 져보지 않았고, 실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보지 않았다.
(4) 또 한 가지 위험은, 그녀가 비록 임의로 행동하는 것의 잘못은 보았지만 아직 역사하시는 주님이 일보다 크시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그녀는 비록 포도원지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보았으나 여전히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그녀가 이전의 많은 때에 주님께 그녀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만 생각했지 그녀에게 주님이 마땅히 어떠한 위치에 서 계셔야 하는지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이미 주님의 수고의 열매를 얻었으나 아직 주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수고의 열매를 얻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그녀는 이미 주님을 얻었으나 주님은 아직 그녀를 얻지 못했다).
(6) 제1단락에서는 단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할 뿐, 나는 아직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다.
첫댓글 아가서를 깊이 배우고싶었는데 이곳에서 은혜로운글을 접하게되어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