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도 성탄절 설교
제목: 난민 예수
마태복음 2:13~23
설교 소개:
예수님의 탄생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한 것이다. 마태는 그것을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하여 해설했다.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마치 시내산의 언약처럼 새로운 신분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 40일의 광야 시험은 마치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마치 이스라엘의 압축판과 같다.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로 소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누군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고 아브라함의 복을 만민에게 나눠줄 언약의 상속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택하셔서 잘났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리고 그 둘 다 난민생활을 거친다. 난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비천한 존재가 아닐까?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존재는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을 입는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이처럼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첫째 교훈이며, 둘째는 그렇게 하신 이유는 가장 약한 존재를 공감하고 돌보고 세우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주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대우하신 바로 그 방식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압축한 것이다. 성탄절에 우리가 기억할 소중한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설교 개요:
1. 난민 예수
2.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3.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4.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신
5. 난민에서 왕으로
1. 난민 예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실려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가 여관집 마구간이라고 소개됩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천사들의 말을 듣고 탄생하신 세상의 구주를 보러 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이를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시므온과 안나라는 나이 많은 성도들이 아이를 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열두살 되셨을 때의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두드러진 점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실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동방박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헤롯왕이 베들레헴에서 두살 이하의 유아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합니다. 그리고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 마태복음에서 두드러진 점은 아기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방박사들이 탄생한 아기에게 경배를 하러 왔고 헤롯왕은 그 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유아학살이라는 잔악한 일을 벌였습니다.
우리들은 성탄절이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고 노래하고, ‘왕이 나셨도다!’라고 찬양하지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면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피난하는 난민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그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인 난민이었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난민(難民)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전쟁이나 위험한 일을 피하여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때 조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 분들이 난민입니다. 한국전쟁 때는 엄청난 피난민이 생겼는데 그들도 난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난민은 집도 없고 보호해줄 국가도 없습니다. 그들은 정처없이 기약없는 피난생활을 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1억명 정도의 난민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난민들은 전쟁이나 기근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피하여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3천만명의 난민들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난민들을 맞아주는 나라가 이 세상에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이면 곤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민이 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탄생하자 마자 난민이 되셨다고 성경은 들려줍니다.
2.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이웃나라 이집트로 피난하셨습니다. 이집트는 애굽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으 ㅣ여러 곳에 나오는 나라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이 이집트로 이주하신 일을 설명하면서 마태는 다음과 같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설했습니다: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13~15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마태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이사야의 예언(사 7:14)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즉, 마태는 예수님을 임마누엘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오신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신 사건에 대하여 마태는 무엇이라고 해설하나요? 마태는 예언자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해설합니다. 마태가 인용한 호세아 11장 1절은 본래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마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비교합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아들이라 부르시고 애굽에서 건지심으로 불러내셨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애굽에서 불러내시기 위하여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스라엘도 자기 아들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이주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예수님도 목수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계속 읽다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홍해를 건너서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출 19:5~6).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태가 소개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보내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분이시므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으며,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는 새 이스라엘로 오신 분이시기에 애굽으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경험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교회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천하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곧 천하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마태가 소개하는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입니다. 요셉을 따라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처럼 예수님도 애굽으로 피난하여 들어가셨습니다. 다만 옛 이스라엘은 기근을 피하여 갔다면 새 이스라엘은 왕의 살해위협을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여 임무를 수행합니다. 사실 옛 이스라엘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했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이 무슨 의미인지를 바르게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준행하시고 새로운 백성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12사도를 기반으로 한 제자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만민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를 삼으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처럼, 이제 새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복이 실현되며, 동시에 다윗의 언약이 실현되어 예수께서 영원한 왕으로서 만국과 만민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고 기념하면서 그 탄생이 장구한 역사 동안에 하나님이 끊임없이 계획하시고 자기 백성을 부르시면서 이루고자 하신 바로 그 경륜을 이루시는 절정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이스라엘이시며 새 야곱이시라면 그로 말미암아 새 언약백성이 된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세상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 곧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이 이스라엘로서 온 세상을 축복하고 구원할 백성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며 사명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탄절은 새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며 동시에 새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인 교회의 탄생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도 난민이었고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도 난민이셨습니다. 난민은 가장 비천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삼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참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심을 믿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세상 경영 이야기는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실 때는 대리인을 통하여 위임통치를 하십니다. 그런 목적으로 아담이 지음을 받았으며 노아의 가족도 신세계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도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이 되게 하시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 약속이 이루어져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나그네로 살았던 비천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자를 들어서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세우시고 머리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까닭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기 때문이었습니다(신 7:7).
다윗은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아들이지만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도 유다 고을 중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온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난민과 나그네였고 예수님도 난민이셨습니다. 그렇게 비천한 자들을 들어서 자기의 일꾼을 삼으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비밀을 깨닫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9
하나님이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은 교만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자입니다. 그들은 음부에까지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마 11:23, 눅 10:15). 이 세상에 불행과 모든 불의한 일들은 다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거나 무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교만은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가장 낮은 자를 들어서 스스로 높이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들을 낮추시고 높은 자리에서 쫓아내십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민족을 택하셔서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 난민으로 보내시고 거기서부터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비천하며 멸시받는 사람이었는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실까요? 가장 약하고 자격 없어 보이는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기 앞에 서서 일하는 영광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4.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신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본래 나그네였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아 의롭게 되며 영광스러운 제사장 나라가 되어 나그네처럼 삶이 고단하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입니다. 그것은 율법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2:21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10:19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전에 죄인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계획을 깨닫고 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완고한 동족을 위해 자신을 바치면서 일깨우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소개하고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려고 자신을 바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에 고아였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고아를 돌보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에 나그네와 난민이었던 나라가 이제 난민을 돌보고 도와주는 세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난민을 돌보는 사역을 하는 박밀알 선교사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충성된 일꾼입니다. 우리가 박밀알 선교사님을 후원하는 것은 난민을 돌보는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이 용서받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세상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이 큰 죄에서 용서를 받았음에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결코 하나님 나라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거기는 흑암의 권세가 왕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을 조사하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형편을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들 중에 법조계 출신이 많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백성들을 섬기는 권세를 가져야 서로 긍휼히 여기고 더 많은 약자들이 더 크게 기뻐하는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도자들을 세울 때 학벌이나 지연이나 혈연에 매일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약자들과 나그네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연단과 훈련 과정을 거쳤는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나신 것과 유아시절부터 난민으로 사셨던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자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다는 사실을 다시 기념합니다. 그것은 한 영혼도 낮은 곳에 버려 두지 않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면 본래 우리들도 낮고 천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난민과 나그네로 살았기에 약하고 비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며 고통을 겪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과거에 그렇게 약하고 비천하고 억눌리면서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왜 그런 삶이 나에게 있어야 했는지 몰랐지만 이제 세상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 앞에서 우리는 새롭게 깨닫습니다.
나도 그렇게 고통을 겪고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고 긍휼히 여기고 다가가서 벗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나에게 먼저 고통을 겪게 하셨구나! 우리가 성탄절에 이런 깨우침을 얻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큰 허물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지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두팔 벌려 가로막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일이 무효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자신의 죄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훈련소입니다. 교회는 비천한 곳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비천한 사람들을 돕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서 냉랭하고 싸늘한 세상에 온기를 제공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 되도록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를 훈련하고 우리 교회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만들어 갑시다.
5. 난민에서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난민으로 나셨다가 만민의 구원자가 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왕이 되셨고 만민이 따르고 경배하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 요셉도 난민으로 애굽에 팔려갔지만 애굽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왕도 10년 동안 난민으로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난민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낮고 천한 사람들을 가장 높고 존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성령으로 나신 분입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도 어린 시절 내내 채색옷을 입으며 아버지의 가업과 조상들의 언약을 상속받을 사람으로 내정되었습니다. 다윗도 망명생활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모든 난민들은 본래 조국이 있고 안락하게 거할 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본래 존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섬기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면 그의 처지가 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처지가 딱하다고 해도 그는 본래 존귀한 사람이며,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고 물려받을 상속자로 채색옷을 입고 어린 시절을 자라난 요셉과 같은 귀한 몸입니다. 지금은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왔지만 그의 과거는 귀한 사람이며 그는 앞으로 더 존귀한 일을 할 사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정신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면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본래 그가 우리와 같이 존귀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이기 때문임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신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