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문·권선문 가지고 다니며 불사 참여 독려
전국 각지에서 신분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게 모연 활동 글 읽고 쓰는 능력 갖춰야 승단에서 연화승 소임 주어져 시간 지나 문해력 부족한 스님도 동참…수요·공급 지속적 국보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 복제본, 1463년(세조9). [문화재청] ‘연화(緣化)’란 ‘불사(佛事)를 경영하여 인연이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불사를 행할 때 승려가 일반 사람에게 돈이나 물건을 기부하게 하여 공덕이 쌓이는 좋은 인연을 맺게 한다’는 뜻의 ‘모연(募緣)’이라는 말도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이상 다음 한국어사전.) 그 밖에 ‘시주(施主)’나 ‘권화(勸化)’와 같은 말이 연화와 동의어로 사전에 기재되어 있다.(네이버 한국고전용어사전.) 사전의 기재 내용과 달리 실제로 연화와 시주는 상대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시대의 발원문(發願文)에는 ‘연화질(緣化秩)’과 ‘시주질(施主秩)’이 구분되어 기록되곤 하였는데, 각각 불사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불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사람의 명단이었다. 즉 시주들의 보시를 받아 불사를 실제로 경영하는 이들이 연화라고 불렸던 것이다.
한편 조선 전기 ‘실록’에는 ‘연화승(緣化僧)’ ‘연화승인(緣化僧人)’ ‘연화승도(緣化僧徒)’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특정한 불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연화의 소임을 맡게 된 승려를 서술하는 말인지, 아니면 연화라는 직능을 보다 전문적으로 담당한 일종의 기능직을 지칭하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숙찰의 여지가 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발원문 또는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다니며 모연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적지 않게 방납(防納)에 간여하며 국가 공권력을 대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록’에 가장 먼저 ‘연화승(도)’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태조 2년(1393)의 기사는 위의 첫 번째 용례를 잘 보여준다. 이때 태조는 도평의사사에 교지를 내려 “각도의 연화승도로서 내(태조)가 직접 서명한 발원문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양반과 백성을 속인 자[各道緣化僧徒稱齎親押願文, 誑誘兩班百姓者]는 일체 모두 금지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태조실록’ 3권, 2년 1월29일) 이것은 임금이 직접 서명한 발원문을 사칭 하며 불사의 모연을 주도한 연화승들에 대한 금지 조처인데, 연화승이 모연활동을 할 때 임금 등 권력자도 함께 하는 불사라고 과장하며 일반인을 참여하도록 했던 일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권력자를 사칭하며 모연하는 사례는 이후로도 근절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조 4년(1458)에도 “승도로서 권선문을 위조하여 마을과 관가를 돌아다니며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계문하여 추국하라[僧徒齎僞造勸文, 橫行閭里官家, 誅求作弊者, …啓聞鞫之.]”는 유시가 내려진 데에서 (‘세조실록’ 14권, 4년 12월18일)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연화승의 모연 행위가 언제나 이처럼 위조와 사기를 동반한 것은 당연히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불사의 모연활동을 전반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계 일각의 시각 속에서도 정상적인 연화승들의 활동은 왕권의 비호 아래 지속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1권, 즉위년 10월8일 ; ‘세종실록’ 85권, 21년 4월19일 ; ‘성종실록’ 272권, 23년 12월1일)
조선 후기에도 승려 또는 사찰 단위의 불사 모연활동이 계속되었는데, 비록 이 시기에는 연화승이라는용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권선문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보고되고 있다. ‘인조실록’ 20권, 7년 3월11일 ; ‘인조실록’ 35권, 15년 6월9일 ; ‘숙종실록’ 13권, 8년 9월13일)
일례로 숙종 8년(1682) 홍문관에서 “근일에 들으니 용문산(龍門山)에 절 하나가 새로 세워졌다고 하는데, 궁중에서 나와 독경(讀經)을 할 것이라 하며, 또 권선문 가운데 나라의 성씨(姓氏)와 연도(年度), 간지(干支)까지 적혀 있다고 합니다[且勸善文中, 至書國家姓氏年甲云]”라고 보고한 일이 있다. (‘숙종실록’ 13권, 8년 9월13일)
보고한 이는 이에 대하여 조사와 처벌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뜬소문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말았는데, 사실 임금이 모르는 사이 내명부 쪽에서 사찰의 모연에 응하여 시주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실록’에 실린 가치판단적 시각을 모두 배제한 채 당시 연화승들의 모연활동 양상을 보면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발원문·권선문을 소지하고 다니면서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불사에 참여할 것을 권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원문·권선문을 소지하면서 이를 근거로 사람들을 설득했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연화승들에게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전제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승단 내에서도 일정 정도 이상의 지적 소양이 있는 이들에게 연화승의 소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해독의 능력이 부족한 이들도 연화 활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15년(1484) “(개성) 화장사(華莊寺) 주지 지성(至誠)이 권문(勸文)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문자를 해득하기가 어려워서 슬그머니 승려 상명(尙明)에게 청하였더니, (다시) 상명은 승려 의철(義哲)의 권문을 훔쳤다”는 기사가 있다.(‘성종실록’ 163권, 15년 2월12일)
공교롭게도 의철의 권선문에 효령대군 등 왕실 일족의 서명이 있었던 터라 이후 서명 위조 등의 일이 덧붙여지며 결국 관련자들이 문책을 받고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이 일은 시간이 지나며 문해력이 부족한 스님들도 연화 활동에 참여할 정도로 그 활동이 일상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는 성종 대에 이르러 승단 내에 문해력이 있는 스님이 충분치 않을 정도로 승가교육 체계가 무너졌던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어찌 됐건 두 가지의 해석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화승의 활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지속적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연화승은 발원문·권선문을 가지고 다니며 모연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스님들이었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이야기한바 적지 않은 연화승들이 방납(防納)에 간여하며 국가 공권력을 대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방납이란 무엇이며, 연화승들은 어떤 방식으로 방납을 통해 국가 공권력을 대리했다는 것인가. 또 그 의미는 무엇인가. 지면이 부족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을 기약하기로 한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