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가 제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결국 아침에 눈 뜨고 밤이면 돌아와 눈 감는 일이 고작이다.
그것이 하루의 삶이며 그러한 하루가 모여 세월이 되고, 세월은 역사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눈 뜨고 눈 감는 단순한 하루의 일상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삶은 지루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그렇다고는 하나 막연히 떠난 여행은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면 어처구니없이
똑같이 지루한 일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되도록 여행을 떠날 때, 뿌리와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기를 권한다.
뿌리와 만나는 여행은 제자리에 돌아와 서있을 때도
늘 미소를 머금게 하고 기쁨의 여운을 한동안 지니게 한다.
여행에서 만난 뿌리가 바로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오전 7시 40분.
신촌 버스터미널에서 마니산의 입구인 화도로 가는 강화행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검은 등산복차림의 사람들과 나들이 차림의 가족들을 한가하게 싣고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건너
김포를 거쳐 정확히 한시간만에 초지대교를 넘어선다.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또 다른 바다 햇살, 몇 척의 여유로운 어선들
그리고 짙은 잿빛으로 드러난 거대한 갯벌들이 초지대교 밑에 누워
옛사람들의 자취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고요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강화도로 넘어가는 다리에 설 때마다 우리역사와 깊은 교감을 맺는다.
그 교감은 역사라는 느낌으로 가슴에 벅차게 차오르는데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 아니고,
불과 2백년 안팎의 가까운 것들과의 교감이다.
그 속에 넘나드는 나라지킴의 고뇌와 슬픔…
그것들이 강화도에는 가득 가득 담겨져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숨져간 많은 군사와 백성들의 아파하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강화도.
그러나 나는 오늘 그보다 훨씬 오래된 4천년의 역사 속의 여행을 위해 강화행 버스에 올랐다.
4천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화도에서 길고 질긴 우리들의 뿌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오전 9시. 출발한지 1시간 20분 만에 ‘화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도처에 서구형 펜션들이 늘어가는 강화도에 거의 70년대의 모습을 한 시골스런 버스터미널이
뿌리를 찾는 나그네를 정감어린 모습으로 반긴다.
한 무리의 일행들이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다,
한 할머니의 “한글도 모르시꺄?”하는 핀잔을 듣는 모습까지 강화의 옛모습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십분정도 걸으면 마니산 관광단지의 입구다.
넓은 주차장에는 이미 차 한 대 들이밀 곳이 없을만큼 북적인다.
멀리 마니산(469m)의 정상을 바라보며
늦가을의 단풍이 작열하듯 불타는 등산로 입구에 들어선다.
인천광역시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 꼭대기에는
아주 오랜 옛날 상고시대에 단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제단, 참성단이 있다.
자연석으로 쌓여진 이 제단(1964년, 사적 136호로 지정)은
우리들의 조상이자 뿌리인 단군할아버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4천년동안 한줄기의 조상을 갖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이 참성단과 만나는 일은
단순한 신(神)과의 접속을 뜻하지 않는다.
역사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괴로움과 슬픔, 모두와 접속하는 일이다.
고려말의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은 참성단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단군의 자취가 이 옛단에 머물러 있으니/세월 따라 흘러 선경(仙境)에 온 것이 분명하구나/ 질펀한 바람결에 갈매기만 깜박이니/하늘과 땅이 끝이 있을까/ 늙어만 가는 이 몸이 몇 번이나 이곳을 찾을 수 있을꼬.
단군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나
그 이전부터도 이곳은 신령스러운 곳으로 이름이 나있었던 곳이다.
강화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물로도
그 시대의 정황을 읽기에 충분하다.
나는 참성단으로 올라가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선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해 ‘계단로’와 ‘단군로’로 이름 지어진
두 갈래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계단로’는 가파르고 길이(2.4km)가 짧으나 무려 91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하지만 ‘단군로’(3.4km)는 능선을 따라 길이 나있어
산을 오르는 재미가 남다르다.
등산로 초입에서 한 시간쯤 오르면 발아래 짙은 운무에 몸을 감춘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얼굴을 내민다.
이곳에서부터 참성단에 이르기까지 아기자기한 돌무더기들이 모여 만든 암릉길이
수려하게 일어나 등산객들을 힘차게 맞이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갈참나무, 소사나무,
상수리나무, 산벚나무 그리고 정감어린 소나무들과
수 천년동안 이 길을 만들어낸 조상들의 발자취를 길벗삼아
느릿느릿 오르는 암릉로 등반 재미는 여느 등산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이른바
신선들이 노니는 선경(仙境)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에 내려가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니,
아버지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에 내려와 신시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 일렀다.
곰은 끝까지 참아서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그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 역사의 기술이다. 환웅은 이 곰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분이 바로 우리들의 조상인 단군인 것이다.
학자들은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단정하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도 단군의 이야기를 역사적사실로 여기기보다는
꾸며진 이야기로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고인돌과 토기들을 비롯하여
고려인의 체취 그리고 조선인의 발자취까지 곳곳에 산적해 있는 것을 보면
단군의 이야기를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로 홀대하는 것은
조상들에 대한 올바른 예의가 아닌 것이다.
턱에 차는 숨과 힘든 다리품을 툭툭 트인 서해바다와 바위 그루터기들에 내려놓고
또 내려놓다보면 이윽고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치루고, 또 7선녀에 의해 전국체전에 쓰일 성화를 채화하는 참성단에 이른다.
넘쳐나는 관광객들의 손길에서 보호하기 위해 둘러쳐진 철장들로 해서
참성단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철장 사이로 묻어난 돌이끼들로 해서 역사의 진한 흐름을 가슴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
오로지 자연석으로만 쌓은 이 제단은 돌의 이음새에 접착물을 바르지 않고 쌓았다.
기초는 둥글며(지름 4.5m) 위의 단은 네모(한변의 길이 1.98m)로 되어있다.
‘둥금’은 하늘을 뜻하고 ‘네모’는 땅을 뜻한다.
하늘의 자손인 단군은 조상인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니산에 이 제단을 쌓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
전국에 수많은 높고 수려한 산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단군은 이곳 마니산 정상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만큼 마니산은 정결한 기운과 장엄하고 뛰어난 신령스러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기(氣)가 세고 좋다는 평까지 받는 것을 보면
사천년을 쌓은 마니산의 정기는 오늘에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참성단과 지척으로 마주 보고있는 마니산 정상에 서면
석모도와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으로 내리고 뜨는 비행기,
강화를 오고가는 초지대교와 운 좋으면 멀리 인천시가까지도 내려다보인다.
4천년전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군할아버지가 지금의 분주한 우리들의 모습을
이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실까?
참성단을 쌓은 구조는 ‘둥금’을 뜻하는 하늘 위에 ‘네모’로 상징되는 땅이 얹어져 있는 형상이다.
이것을 일러 “하늘 위에 땅이 놓여지다!”라고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자손 단군 그리고 그 단군의 자손 우리들.
바로 하늘 위에 놓여진 하늘의 나라는 ‘한국의 땅’이며 우리들의
그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뿌리가 이곳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곳의 우왁스럽고 거친 가시철망을 벗고 좀 더 세련된 우리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정감어린 울타리로 바뀌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암합장
댓글목록
오시환 아이피 작성일
맨하튼의 32번가..큰집...제가 있던곳이니..그곳을 이용하면서 제 생각좀 하셔.ㅎㅎㅎ 그리고 한국에 오면 그냥가지 말고 꼬옥 들리셔요...보구 싶으니깐....
강정백 아이피 작성일
오랜만이다. 익히 알고 있지만, 너의 다양한 "삶"그리고 "앎"에 절로 감탄 된다. 글 솜씨는 물론, 영화평론, 불교에 대한 경지, 해탈(?) 어째든, 여행기등.등,등.....제3막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 너에게 빚 진것도 있고, 해장금 맛도 볼겸 조만간 들릴께..New York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