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이근철 체육학과 3학년]

선진국들이 적어도 1세기 이상 거쳐서 발달시켜 온 문명을 우리는 당대에 불과 50 년도 채 못되어 다 겪어 버렸다. 내가 태어난 1945년의 해방에서 6.25 전쟁을 거쳐 자유당의 일당 독재의 세월까지만 해도 도시를 벗어난 시골의 가난은 정말 원시인의 생활이 따로 없을 만큼 헐벗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하나같이 문명도 없었고 문화의 혜택도 전무했다.

불과 50여 년 전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골 모습은 어떤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밑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옛 흔적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왜 이런 소리로 시작하는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는 짧은 생애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혜택에 대해 거의 무감각하다.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도 무딘 감흥을 갖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 지, 과거와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오늘에 대해 감흥을 못 느끼듯이 미래에도 관심이 없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숨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살기 바빴고 열심히 일을 했을 뿐 과거가 어쨌는지 그래서 어떤 미래를 계획해야 하는지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함께 달리고 있는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때문에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상대들은 현대 문명의 주역답게 훨씬 앞서 달리면서도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호흡조절과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세심한 신경을 쓰면서 달린다. 미국이 그렇고 유럽이 그렇다. 일본도 우리보다 훨씬 여유가 있다.

나는 오늘 우리의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겠지만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한 예로 우리나라의 건축을 보면 정말 부끄럽고 한심하다. 우리가 매일 매일 몸담고 살면서, 늘 보면서, 그 속에 적응하며 생활하는 우리의 주택이, 건물이 우리의 민족 정서를, 미적 감성을 결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함에도 아무도 그걸 걱정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 내가 건축가가 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괴테의 말을 들려주셨다. "건축이란 음악을 순간적으로 동결한 예술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후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문득 그 말이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장식이 화려한 중세의 건축을 보면서 문득 모차르트의 경쾌한 음악이 화사하게 전개되다가 순간 일시에 얼어붙는 느낌 그대로를 전달받았다. 음악이 먼저였을까? 건축이 먼저였을까? 이런 예술이 그 민족에게 주는 감각적인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 일까?

각설하고 영화 이야기로 들어간다. 요즘 영화가 좋아졌다. 돈이 잘 벌린다. 투자가 몰린다. 하면서 갑자기 다 죽어가던 영화가 벌떡 일어나 활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한류의 붐이 일고 경멸받던 딴따라들이 갑자기 우쭐거리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섰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한국영화가 다 죽어간다고 영화인들이 아우성을 쳤다. 스크린쿼터제를 시행하지 않으면 한국영화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울부짖었다.

대개의 국민들이 스크린쿼터제의 의미를 몰랐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먹고사는 데 영화가 뭐가 대수냐? 떠들 것 없다. 심지어는 많은 지식인들조차 한국영화도 잘 만들어 경쟁에 이기면 될 것 아니냐고 쌀쌀하게 말했다. 과연 지금 한국영화는 선전하고 있고 많은 관객들이 오히려 한국영화가 더 재미있다고 한다. 과연 지식인들의 예측대로 된 것일까? 아니다. 그때 지식인들은 절대로 한국영화가 미국영화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정말 한국에서 가장 뒤떨어진 분야는 정치와 영화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영화는 썩 훌륭하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영화가 지금처럼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으며 값비싼 할리우드 영화를 누르고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금새 끓고 금새 식어 지난 일을 곧잘 잊어버리는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한국영화가 잘 팔리고 있는지 밝히지 못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지난날을 되돌아만 보아도 되는데 거기에 인색하다.

영화의 처음 등장은 1895년, 프랑스의 르미에르 형제의 발명에서 비롯되었고 한국은 그보다 24년이 늦은 1919년이 되어서야 '의리 적구투' 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나마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밑받침이었다. 일본은 이미 영화의 탄생국인 선진국으로부터 곧이곧대로 대규모의 영화 스튜디오와 제작시스템을 도입해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서 밀려난 삼류 자본과 기술이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와 변태적인 영화제작을 했다.

초라한 스텝들로 구성된 제작 구조 속에서 원시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대개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우리 선배들, 조선의 영화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워낙 참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급하니까 목탄 에너지로 차를 움직이고 가미가제 특공대로 자살 폭탄 비행을 시도했던 전쟁 막바지의 일본군국주의처럼 식민지 조선의 모든 생산 형태는 이빨 대신 잇몸이었다.

이런 기질은 훗날 한국의 수많은 아파트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이른바 집장사 방식으로 건설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와 건축은 아주 흡사하다.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의 진행 과정이 매우 닮았다. 아주 섬세한 작업에서 엄격한 공정까지 모든 종합적인 기능이 고루 갖추어져야만 제대로의 작품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제작 과정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진행되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영화와 건축이다.

철저한 기획이 없고. 제작기능과 자본과 배급이 명확하게 구별되지도 않는다. 또 후반 작업이 전문화되지 않아 완성도가 상당히 뒤떨어지지만 아직은 별 도리가 없었다 단지 보잘것없는 촬영 현장의 제작 기술 하나 뿐. 엉터리라도 허가만 받으면 그 가치가 끝나는 설계사무소의 설계처럼, 헐값으로 빌려서 집장사 식으로 시공을 하는 건축 현장을 연상하면 딱 알맞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같은 난센스 대형 사고는 그래서 일어났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붕괴는 차라리 정직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이성과 감성의 붕괴를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로 무서운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너지고 있는 우리들의 정서와 정신세계의 파괴를 깨닫지 못하는 태평한 우리의 문화의식이다. 도처에 그 피해가 드러나도 깨우치지 못한다. 그야말로 구약시대의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내가 직접 겪지 못한 식민지 시대의 한 맺힌 많은 영화들이 어쩐 일인지 작품으로서 보존되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거의 모두 엿장수들에게 팔려가 밀짚모자의 테로 사용되어 토막토막 사라지고 말았다.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처럼 영리하고 악착같으면서도 과거를 보존하지 못하고 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는 기억 상실의 민족은 따로 또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기록과학의 개념이 전무하다.

해방 이후는 더욱 상황이 나빠졌다. 남과 북을 나누어 3 년간 통치했던 미. 소의 군정기간은 우리 민족에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게 했다. 이념의 대립과 정치적 혼란, 뿌리깊은 가난 속에 꼬리를 물며 항쟁과 테러가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동족간의 전쟁, 그리고 분단 사회의 불신과 불안 속에서 식민지 시절을, 문화를, 사회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렸다.

미국 생활에 익숙한 이승만 대통령은 할리우드처럼 영화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한국영화에 면세와 각종 특혜를 주었다. 이것이 영화산업을 건달 사업으로 키우는 지름길로 들어서게 했다. 예쁜 여배우들이 있고 한탕이 가능한 투기 사업에 면세와 특혜까지 주었으니 깡패들이 영화판에 눈독 들이는 것은 당연했다. 같은 시기에 패전 이탈리아의 영화는 예술영화 운동이 일어난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이승만 정권의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의 순결한 첫 세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랜 전통의 유교적 교육에서나, 또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에서나, 비교적 거리가 멀어 문화적으로 지금 신인류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에겐 진짜 살아있는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맥을 같이 한다는 의미다. 한문 공부와 거리가 멀고, 미국식 pop 문화에 익숙하고, 생각이나 행동이 식민지 때 소년시절을 보냈던 세대와 달라 무척 자유롭다.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은 서구식 소비 문화와 함께 재빨리 우리 속으로 파고들어 또래들에게 국산품과 토속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했다. 온돌은 침대보다 원시적이고 불편하고 건강에 해롭고 한국식 가옥의 모든 조건은 비위생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우리의 풍속은 미신에 원시적이고 우리의 먹거리는 불결하기 짝이 없고 영양가도 뒤떨어지고, 재래식 모든 삶의 방식에서 좋은 것, 칭찬 받을점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반면 백인은 우수하고, 영웅적이고 개척정신에 앞서 있고 당연히 미제 물건은 좋은 것이고, 서양문화는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루 빨리 재래식 한국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잘 사는 길이고 선진화된 생활이고 문화인이 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압구정에서 말죽거리, 송파, 아니 무주의 깊은 산골에, 해남 땅끝, 토말까지 산 중턱이고 논밭 가운데고 보기 흉한 아파트가 우뚝 솟아도 그게 그렇게 인기가 있다.

최근까지 미국영화를 무척 선호했던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그만큼 우리는 미국을 동경하고 살았다. 자유당 정권이 419로 무너지고, 이제 민주시민정신이 싹을 막 키우려고 하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그 박을 자르고 18년간 공포의 독재정치를 지속했다. 그 가운데 미국을 흠모하는 새로운 세대들 앞에서 한국영화는 확인 사살 당하는 길고도 잔인한 기간을 겪었다.

영화판은 어느새 슬그머니 하나 둘. 다시 깡패들이 나타나 기승을 부렸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복을 벗고 민정이양의 형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시기였다. 내가 영화에 뛰어들 무렵이었다. 세계적으로 영화가 처음 사양길로 접어드는 어려운 시기였다. 미국의 컬러텔레비전 보급이 일반화되고 거기에 대응하여 할리우드는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양산하더니 마침내 MGM같은 메이저 컴퍼니도 휘청거리며 무릎을 끊었다.

한국도 민간 텔레비전 MBC까지 개국되자 지금까지의 영화의 주관객이었던 마줌마(속칭-고무신이라고 했다)들이 안방 TV 앞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부랴부작 총천연색 영화로 탈바꿈을 시도했지만 신필림같이 잘 나가는 대회사가 임금을 체불하기 시작했다. 고용인만 200명에 육박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엔 추석날 극장에 개 한 마리만 올려놓아도 손님이 때워 터졌다고 농을 할 정도로 좋았던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1964년 6.3 사태 이후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비상계엄령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는 군사통치수법이 이빨을 들어내었고 독재권력은 먼저 깡패들이 휘어잡고 있는 영화판을 가장 쉽게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강한 것 앞에선 쉽게 무릎을 끓고, 약한 것 앞에선 잔인한 깡패들의 속성이 이처럼 간단하게 길들이기에 순종했다. 또 사전 검열 하나만으로도 돈벌이만 목적으로 하는 제작자 본의 출처쯤 목 조르는 일은 간단한 일이었다.

숨도 못 쉬는 영화판은 독재정권이 원하는 바, 정책영화, 목적영화, 계몽영화, 문예영화를 잘도 만들어내면서 대종상, 외국영화수입특혜 등 홍당무 미끼에 눈이 어두웠다. 드디어 20여 개의 허가제로 등록이 된 영화사만 남겨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독과점의 특혜로 한국영화는 꼭두각시가 되어갔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장이 짙은 국적불명의 가상현실을 18년 동안 그려내는 동안 한국영화엔 리얼리즘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통제와 감시, 단속의 사회에서 가장 만만한 것은 여성이었다. 학대받는 여성의 비극을 멜로드라마로 만드는 일이 가장 쉬웠다. 눈물만 괄 수 있다면 고금을 가리지 않고 궁중과 안방을 뒤져 눈물샘을 자극했고 때로는 난센스 코미디로 철딱서니 없는 시선을 빼앗기도 했다. 액션멜로라고 해서 건달영화도 심심참게 만들어졌으나 영화는 점점 인기를 잃고 극장은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겨우 홍콩의 황당한 무술영화가 수입되어 한 몫을 하던 시절에 나는 데뷔를 했다.

최인호의 인기소설을 확보한 나는 비교적 고자세로 데뷔를 했는데 지금의 제작풍토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한밭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9000피트의 완성 프린트를 만들기 위해 당시 영화감독들이 사용하는 네가필림의 총 길이는 15000피트였다. 1 : 2 도 못되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량이었다. 나는 제작자에게 3000피트를 요구했다. 지금은 신인감독도 150000 피트에서 300000 피트를 사용한다.

하프사이즈라는 한국특유의 네가필림을 아끼는 촬영 방법이 영화판을 휩쓸기도 했고 사운드 필름을 아끼려고 절반을 오려서 사용하기도 했다. 배우 개런티와 스텝 인건비, 그리고 필름값, 진행비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소년소녀 가장에게 지급하는 법정 최소 생계비라는 것이 있던가? 그처럼 최소제작비란 것이 있다면 거기에 훨씬 못 미치는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최고의 독재자가 안가의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간단하게 끝을 보면서 겉으로는 민주화의 열기와 새로운 바람에 대한 기대가 일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고 허탈에 빠졌다. 그 무서운 18년의 공포정치가 자기들끼리의 총 싸움으로 그렇게 우습게 무너진 것은 정말 예측 못한 충격이었다. 마치 무서운 초긴장이 갑자기 풀리는 순간 웃음이 폭발하듯, 그때 수입 홍콩영화 ' '취권' 은 아주 적시에 나타나 빅 히트를 했다.

온 사회가 18년 동안 강요당한 가치관을 일시에 잃어버리고 아직 새로운 가치관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공백기에 '취권' 은 아주 적절한 테마였다. 이어서 잠깐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의 열기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반짝 사람들을 들뜨게 했치만 곧 다시 캄캄한 어둠이 덮쳤다. 내가 만든 '바람불어좋은날' 은 그 틈새에 이루어진 성급한 봄바람이었다.

신이 나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회복을 외치며 바람불어좋은날을 들고 나왔지만 촬영을 한참하고 있을 때,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모든 언론이 통제된 가운데 광주 민중항쟁과 공포의 유혈진압의 흉흉한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개인적으로는 대마초를 흡연한 연예인 무리에 끼어 4년 동안 활동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문학 평론가 염무웅씨의 '민족문학' 을 읽고 우리 역사와 사회를 다시 보게 된 그런 시절이었다.

리얼리즘에 겨우 눈을 뜨고 벼르고 벼르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느슨해졌던 영화검열이 다시 매섭게 변하고 있었다. 문공부와 경찰, 안기부, 그리고 이번엔 보안사까지 요원이 나와 검열을 했다. '바람불어 좋은날' 이 무사할 리 있었을까?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검열위원으로 참석해 한 장면도 자를 수 없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라톤 회의가 벌어졌고 아직은 제5공화국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결국 박완서 선생의 조용하지만 강인한 고집에 한 장면도 자르지 못하고 통과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감독을 만나자고 했다. 감독 스스로 한 군데만 잘라달라는 부탁이었다. 알고 보니 정말 요절복통할 사연이었다. 노래 속에 순자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잘라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 까닭을 몰랐지만 곧 이유를 알게되었다.

계속해서 나는 리얼리즘을 고집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영화로 만들었다. 마침내 문공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어둠의 자식들' 3부작을 기획해서 제1부가 히트를 쳤고 이제 제2부의 시나리오를 문공부로 보내 제작 허가를 받으려는데 반려 당했다.

제목도, 원작자의 이름도, 내용도, 모두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시한부 제작이라는 악랄한 제도로 한국영화를 겨우 연명시키고 있을 때였다. 시한부 제작이란한국영화제작을 기피하는 제작자들에게 강제로 제작을 강요하는 제도로서 일년을 사분기로 나누어 매 분기마다 영화 한편을 제작해야만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주는 제도였다.

어둠의 자식들 3부착을 한꺼번에 계약한 나는 책임이 무거웠다. 제작사는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정부는 허가를 해주지 않는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마침내 이 더러운 영화판을 포기하고 떠날 결심을 했다. 자포자기로 만든 것이 바로 '바보선언'이었다. 평균 제작비 1억 5000만원 시절에 5000만원으로 청개구리처럼 무조건 반대로 만든 영화였다.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화제작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고 누구나 제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나도 자신의 프로덕션을 가지고 영화를 직접 제작했다. 그러나 영화검열은 여전히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다. 어우동은 검열을 통과하고 단성사에 상영 중이었는데 감사원의 지시로 필름이 수거되어 다시 검열을 받고 왕이 어우동의 발을 핥는 장면이 뒤늦게 가위질을 당했다.

이유인 즉 당시의 감사원장이었던 황영시라는 군 출신에게 누군가 투서를 보내 어우동에 나오는 왕의 모습이 최고권력자를 비유해 불손하게 그리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우동뿐만 아니라 당시 공연윤리위원장이었던 최창봉씨까지 경질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 후 영화제작신고도 공연윤리위원회에서 하게 되었는데 "공포의 외인구단" 은 제목이 공포라는 단어가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고 반려되었다.

사후 검열에서는 더욱 심한 가위질을 당했다. 군사독재의 마지막까지 발악이었다. 그나마 검열의 사정이 좋아진 것은 김영삼 정부에 들어와서다 그 첫 번 혜택이 아마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이었을 것이다. 전에 같으면 상상도 못할 너그러운 심의를 받고 통과되었다. 그 동안 공무원의 비리를 영화에서 그리는 것은 금기였다 투캅스는 아닌게 아니라 대히트를 쳤다. 1991년 주식회사 판영화는 대기업 SK의 투자를 받아들여 2편의 영화를 기획했다 재벌기업들의 영화투자가 한창 검토되기 시작했다.

비디오 시장이 확대되면서 극장 수입보다 비디오가 더 대기업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나는 재벌 기업들의 투자를 환영하는 쪽이었지만 지금까지 영화에서 독점적인 이익을 챙겼던 기존 제작자나 수입업자들은 중소기업보호육성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반대를 했다. 이전까지의 제작 방법은 큰 변화 없이 도제 시스템에서 습득한대로 촬영현장(프로덕션) 중심의 제작을 해왔다.

그러나 1992년이 지나자 약 1년 이상을 영화투자에 관심을 갖고 검토하던 재벌 기업들이 독립된 법인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영상관련사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젊은 엘리트들을 고용해 영화제작과 투자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지속해오는 동안 기존의 영화감독들이 제작부장들을 소외시키고 새로운 기획자들을 키워내는 방식을 택했다.

저절로 영화판은 새로운 자본에 의해 새로운 인재들이 길러지고 있었고 이들은 도제 시스템에 의해서 길러지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기획에 의해 스스로 개척하고 배워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시행착오로 많은 돈이 허비되었지만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새로운장이 들어서는 것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 결과적으로 그것은 대기업에서 나오는 돈으로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프리프로덕션의 개념이 없는 제작 형태였다. 기획 중심의 영화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신씨네의 신 철 대표였다. 신 철은 고등학생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설문과 조사를 통해 꾸준히 시나리오를 개발하면서 기획을 키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투자를 외부에서 끌어드리고 전문적인 기획과 프로듀서의 기능을 영화에 새롭게 도입했다.

여기서 많은 새로운 영화감독과 기획자와 시나리오 작가가 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삼성과 대우. 현대, 등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영화에 투자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제작풍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케팅을 전공한 전문인력들이 영화에 대거 투입되었고 이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새로운 유통과 다양한 한 홍보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때마침 미국이나 유럽의 방식이 도입되어 복합 상영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한국영화보다 외국영화 수입에 더 많은 투자를 했고 경쟁적으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잡기 위해 과다한 비용을 지출했다. 1998년 외환위기를 맞게 되자 대기업들은 모두 일제히 영상산업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때 쉬리가 상상을 초월한 빅히트를 기록했고 그게 계기가 되어 한국영화가 관객들의 신뢰와 사랑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영화는 경제불황에 역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즐기는 오락산업이어서 더욱 그렇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손을 떼었지만 마지막으로 투자한 영화가 비히트를 쳤고 엄청난 이익은 신화처럼 소문이 퍼져 그 후 창투사와 밴처 투자가들이 눈독들이는 업종이 영화제작이 되었다. 이제 영화를 만드는데는 어떤 통제도 없다. 아무 제약도 단속도 없는 자유로운 표현속에서 오직 돈을 목적으로 만들어도 떳떳한 세태 속에서 영리한 젊은이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아이디어를 만들고 있다. 놀랍게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그만큼 얻으면 또 그만큼 잃는 것도 있다 박정희 정권이 한국영화에서 18년 동안 리얼리즘을 사라지게 한 과오를 보인것처럼 지금의 젊은 세태의 상업주의는 또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향기를 잃게 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사명감을 갖고 이 바닥에서 벗어나 향기로운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전보다 몹시 어려운 것은 언론이나 평론들이 바로 이런 상업주의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에 뜻있는

자들을 몹시 외롭게 한다.

오늘 한국의 모든 사회적 문제는 그 동안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정치와 행정 , 그리고 언론과 사회 문화, 경제가 서로 책임을 전가할 뿐 똑같이 세계의 변화, 시대의 현화를 적극적으로 리드하지 못하고 알고도 깨닫지 못하는 총체적인 방황을 하고 있다.

쉬지 않고 달려왔을 뿐이지 자신의 호흡조절과 컨디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를 겪고 있다. 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이후의 결정적인 실패를 면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변화를 리드하기 위해선 변하지 않는 옛 힘이 강해선 안되고 또 새로운 힘은 너무 앞서서 강행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오늘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현명한 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이성과 감성의 붕괴를 미리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미래는 과거와 현계의 연속이다. 눈에 이미 보인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은 미래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추게 할 것이다.

이 원고는 2002년 5월 31일 원광대학교 열린정신포럼에서 주최한 제 14회 열린정신포럼에 발표한 원고임.

[조재영]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