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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주인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예정지구에서 17세기 조선시대 수전(정식명칭 -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행정타운 종촌리 수전유적)을 발굴하였다. 시굴조사시 토층상에서 수전면이 확인되었고 OSL 연대측적을 실시한 결과, 17세기 조선시대 수전층으로 판명되어 대략 3,200평 가량 되는 면적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주인장도 수전 발굴을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시작부터 우여곡절도 많았고,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내내 생소한 것들 뿐이라(일반 유구에 대한 조사방법론과는 전혀 다른 방법론이 사용되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유적은 대규모 범람에 의해 당시 수전층이 잘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당시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나와서 중요한데, 조선시대 수전을 전공하지 않는 주인장이 보기에도 관련 전공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저습지나 논에 대한 발굴조사가 많이 실행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앞으로 이런 자료들이 더욱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도 생겼다.
오늘은 수전을 발굴하면서 주인장이 이리저리 찾아봤던 자료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관련 논문이나 문헌 등을 찾아보면서 새로 알게 됐던 것, 기존에 잘못 알고 있던 부분 등에 대해 간략하게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발굴조사지역의 층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조사가 진행된 수전층의 연대는 OSL 측정결과 1,630±40년이 나왔고, 그 바로 아래층의 연대가 1,460±50년, 조사가 진행된 수전층 윗 수전층의 연대가 1,680±20년으로 나왔다. 즉, 15세기 중엽까지 저습지로서 개발되지 않았다가 17세기 초엽에 수전으로 개간된 뒤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17세기 초중반으로 편년이 가능한 자기편들이 현장 곳곳에서 수습되었으며 그밖에 당시 농민들의 발자국, 소 발자국, 경작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초반에 조사가 진행되면서 주인장이 염두에 둔 부분은 15세기 이전에는 왜 개발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현장조사시 바닥 모래층까지 굴토했기 때문에 아래쪽에서 이전 시기 수전층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왜 그간 버려져있던 지역이 갑자기 17세기 초엽 개발되었을까, 하는 부분이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1914년, 1970년, 2006년 지도를 비교해본 결과 예로부터 지형이 변했다던가(예전에는 저습지가 아니었다든가), 다른 용도로 사용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말~조선초에 해당하는 14세기를 둘러보면 당시 왜구에 의해 해안지대가 황폐화되면서 수십년간 농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려사절요』권33을 보면 우왕 14년(1388) 조준이 고려말 연해지역의 피해상황을 두고, “압록 이남은 대부분 산이고 비옥한 전토는 바닷가에 접해 있는데, 비옥한 들판에 있는 수천리 논이 왜구들에게 점령되어 갈대가 하늘과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나라가 이미 어염과 목축의 이득을 잃었으며 또한 옥야에서 들어오는 양전의 수입도 상실하였다(自鴨綠以南 大抵皆山 肥膏之田 在於濱海 沃野數千里稻田 陷于倭奴 蒹葭際天 國家旣失魚鹽畜牧之利 又失沃野良田之入).”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당시 대부분의 논이 바닷가(혹은 강가)에 접해 있는데 수계를 따라 왜구의 침입이 확대되면서 제대로 경작되지 못 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종 원년(1399)에도 “왜구가 우리나라의 근심이 된지 거의 50여 년이다(倭寇 爲我國患 幾五十年矣).”라는 대목이 나와 14세기 중후반 왜구에 의한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종의 경우, 1377년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의 왜구를 토벌한 경험도 있으니 그 폐해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50여 년간 바닷가에 접한 대부분의 농지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농업생산력의 극대화를 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고려시대때 사용되던 1년 휴한의 수경직파법 대신 연작법이 채택되는 등 농업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염정섭 2007). 물론 당시 인구증가에서 농업기술의 발달을 찾는 견해도 있으며(李泰鎭 1986; 1989) 이 견해는 훗날 인구증가 요인은 향약의술의 발달 때문이라는 견해로 발전하게 된다(李泰鎭 1988; 2002). 하지만 이건 다소 부수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당시 농경지 확대의 중요한 원인이 늘어난 인구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입의 확산, 국가경제의 확립 등에서 다양한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놀고 있는 농지를 경작해야만 했던 당시의 현실이 농업기술 발달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상황에서 연해지역 농경지를 재정비함은 물론 低地, 低濕地 개간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정부는『농사직설』을 편찬하는 등, 농업생산력 증대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草木茂密處(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지역)와 沮潭潤濕荒地(물길이 가로막혀 습윤하며 거친 지역)의 개간방법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산전개간에 해당하는 전자보다는 저습지개간에 해당하는 후자의 서술에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魏恩淑 1998).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시대의 점진적인 개간 장려가 아닌, 현실적인 생존의 필요성에 따른 개척의 역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고려 후기부터 이미 수리시설이 확충되고 수전이 확대되어 갔으며 조선초기까지 점진적으로 농경기술이 발달했다고 봐야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농업기술이 발달했다고 보는 대부분의 견해는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11세기 중반부터 고려는 연해농장을 설치하고 대몽항쟁기때 해도개발이 적극화되고 있으며 저습지 개발을 위한 수리시설이 각지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이평래 1991). 하지만 저자 스스로 저지나 저습지 개발에는 기술적인 한계가 있어 15세기 후반에 가서야 이런 지역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었다, 고 밝히고 있는만큼 점진적인 기술 개발 및 계승은 있어왔지만 15세기 무렵, 급격한 농업기술의 개발 역시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처음에는 15세기 중엽으로 측정된 수전층 아랫면 또한 이전 시기의 수전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토층상에서 수전면을 확인할 수 없었고 범람 등에 의한 퇴적 양상도 확인할 수 없었으며 논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논둑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수전은 초창기에는 저습지로 그냥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며 17세기 초엽, 어떠한 이유로 개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럼 17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살펴봤더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조-일전쟁이었다.
1592년(임진년)~1598년까지 7년간 조선을 불바다로 만든 전쟁이 바로 조-일전쟁인데 이 전쟁이 끝나고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농경지 재정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593년 충청도의 전란 상황을 보고한 장계에 아직 일본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역으로 연기현이 거론되고 있다(『선조실록』선조 26년 6월 5일 무자조). 하지만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공주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봤을때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역도 당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이듬해 각 지역 곡식량 보고기사에 따르면 충청도의 전체 곡식이 만여 석 뿐이며, 연기현은 면천, 청풍, 태안, 문의, 진천, 목천, 청양, 영춘, 제천, 음성, 지잠, 청안 등의 고을과 함께 太豆 10여 석만 있고 쌀은 한 되도 없는 정도(『선조실록』선조 27년 2월 3일 임자조)라고 기록되어 있다(행복도시 역사분야 공동연구단 2006).
조-일전쟁 이후 조선은 전분야에서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부분이 재정정책 분야였다. 조-일전쟁 이후 급속한 토지겸병이 일어났고, 교환경제가 발달하면서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는 등 조선은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토산물을 수세하는 현물 세제인 貢納制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자연경제를 반영하는 수취방식이라면, 부의 원천인 토지에 실물화폐인 쌀 또는 화폐로 수세하는 대동법은 분명히 조-일전쟁 이후 봉건적 경제관계의 쇠퇴기에 발전해가는 교환경제를 반영하는 수취방식임이 분명하다(金玉根 1988). 이상 조-일전쟁 이후의 재정정책은 대동법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 주인장은 17세기 저습지 개간을 대동법과 연관지어 고려해 보았다.
먼저 대동법은『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한 결과, 총 323건(大同法으로 검색하면 199건, 宣惠法으로 검색하면 7건이 검색)이 확인되었다. 그 중 주석에 언급되는 ‘대동법’은 제외하여 태종 1건, 성종 2건, 연산군 1건, 중종 5건, 명종 5건, 선조 2건 총 16건을 제외하면 최초로 대동법이 언급된 것은 광해군(중초본일기) 2년(1610) 9월 14일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곽재우가 상소를 올려 ‘선혜법(宣惠法=대동법)을 더욱 확대 적용하여 이익을 끼치게 하라는 주장(至於宣惠之法, 推演增益之說)’을 하는 기록이 바로 그것인데 그렇게 봤을때 1610년 이전부터 이미 대동법이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납세제도 중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인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아 그에 따른 폐단도 많았다. 또 방납(防納=代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로 그 폐단은 농민 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 수입을 감소시켰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조광조 · 이이 · 유성룡 등은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도록 주장하였다.
특히 이이는 선조 2년(1569)에 그의 저서『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 했다. 그 후 조-일전쟁과 조-청전쟁으로 인해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국가 수입이 감소하자 선조 41년(1608) 영의정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부터 실시되었다(하지만『조선왕조실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없으니 어찌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관장은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실시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중 10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6말은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인조 2년(1624)에는 조익의 건의로 강원도에도 실시되었는데 연해 지방은 경기도의 예에 따랐고, 산군에서는 미곡 5말을 베(麻布)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효종 2년(1651)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 춘추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에 5말씩 도합 10말을 징수하다가 뒤에 2말을 추가 징수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산군 지대에서는 미곡 5말을 무명(木棉)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전라도에는 효종 9년(1658) 정태화의 건의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토지 1결에 3말을 징수, 연해 지방부터 실시했으며, 산군 26읍에는 현종 3년(1662)부터 실시했는데 부호들의 농간이 적지 않아 현종 6년(1665)에 폐지되었다가 다음 해(1666)에 다시 복구되었고, 뒤에 13말에서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경상도는 숙종 3년(1677)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는데 다른 지방과 같이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변두리 22읍은 미곡을, 산군 54읍은 돈, 무명을 반반씩 바치게 하였다. 황해도도 숙종 34년(1708)에 대동법을 모방한 상정법(詳定法)을 실시하였는데 1결당 미곡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함경도와 평안도는 제외) 실시된 후 전국적으로 세액 12말로 통일하였으며 산간 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는 미곡 대신 베, 무명, 돈(大東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여전히 이중적 부담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 수입의 부족을 메울 수 있었다. 특히 대동법 실시 후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 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고종 31년(1894)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하여 결가(結價)를 결정했을 때에 대동미도 지세(地稅)에 병합되었다.
이처럼 대동법이 조-일전쟁 이후 점진적으로 확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조때 40건, 효종때 62건, 현종때 32건(『현종개수실록』에는 61건), 숙종때 51건이나 등장해(전체 기사 중 76%에 해당) 조-일전쟁, 조-청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의 재정정책이 새롭게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봤듯이 충청도의 경우, 효종 2년(1651)에 대동법이 실시되는데 금번 조사에서 실시한 수전층의 연대가 1,630±40년으로 나왔기 때문에 상당히 주목된다 할 수 있다. 실제 종촌리에서 그 시기, 대동법의 확산과 더불어 저습지 개간이 이뤄졌다는 적극적인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상의 역사적 정황을 살펴본다면 금번 조사에서 확인된 수전면이 대동법을 전후한 시점에 개간된 논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대동법이 실시되었을때 충청도의 세액은 총 12말이다. 1결은 15마지기, 3,000평 정도에 해당하는데 금번 조사지역이 대략 3,200평 정도가 되니까 조사지역 정도 면적의 논을 가진 사람은 당시 12말(1말은 8㎏, 1가마는 80㎏), 지금으로 치면 1가마가 약간 넘는 대동미를 세금으로 내면 됐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금번 조사에서 확인된 13개 수전면 가운데 2개 수전면에서 밭 이랑이 확인되었다. 이는 윤답법의 일종인 회환농법의 흔적으로 볼 수 있겠다. 회환농법은 14세기 고려 말~조선 초에 이르는 농법인데 동일한 논에 한해는 수도를 재배하고 다음 해에는 다른 한전작물을 심는 방식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고려때는 1년 휴한의 수경직파법을 썼는데 조선 초에 접어들면서 연작법이 채택되었으며 이후 조선에서는 지력 보호를 위해 땅을 놀리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인구의 증가, 농업기술의 발달 및 수리시설의 확충, 농업생산품의 상품화 촉진, 시장의 확대, 대동법의 확산시행 등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부분은 연작법이 채택되었다고 해서 대부분 이앙법을 채택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앙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그 효용성이 입증되어 점차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 일반적으로 경상도에서부터 시작된 이앙법은 16세기 무렵에는 삼남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심지어 16세기 후반 전라도 옥과현에 거주하던 유팽로는『農家說』에서 수전 경작법으로 이앙법만 거론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점이 알려짐에 따라 17세기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廉定燮 1994).
하지만 16세기 중엽 경상도 성주 지역에 넓은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던 이문건 家에서는 당시 이앙법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묵제일기』(조선전기 중종~명종대에 살았던 묵제 이문건(1494~1567)의 일기이다. 1535년부터 1567년까지 기록하였는데 1545년 이후 성주에서의 유배생활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를 보면 그는 자신이 소유한 경작지를 날씨와 시기 등에 따라 다르게 파종한 것을 알 수 있다. 비가 오는 날에 파종하는 부종법이 사례가 가장 많고(부종했는데 모가 살지 않으면 다시 뿌리는 방법을 택했다), 가뭄이 심할때는 부건종법이나 건부종불후법을 사용했다. 또 비가 많이 내려 논에 물이 많이 차면 수부종법을 사용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분명 이앙법을 알고 있음에도 이앙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직파의 기술에 능통해있었고 이앙할 경우 생산력이 높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김동진 2001). 이처럼 15세기 이앙법이 최초로 시행되던 경상도에서조차 16세기 중엽까지 이앙법이 생산력 저하의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경상도 전 지역에서 이처럼 이앙법이 사용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보편적으로 이앙법이 시행됐음은 유진 · 유원지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위빈명농기-전사문』에 잘 나와있다. 1618년 유진이『농사직설』을 참고하여 경상도 상주 지역의 농사관행을 정리한『위빈명농기』를 지었고, 이 농서를 근거로 유원지가 여러 지역의 사례를 보충하여『전사문』으로 확대 개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논을 개간하는 방법을 비롯해 이앙법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싣고 있다. 특히 旱害로 인해 수앙을 할 수 없을 경우에 건답을 잘 熟治하여 건앙을 키우는 건앙법이나 이앙을 적시에 하지 못해 탈이 난 경우 시행하는 소모앙법 등을 소개하고 있어 이앙법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염정섭 2004). 즉, 당시 이앙법은 단점이 있었음에도 장점이 더 컸기에 단점을 보완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갔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암튼 금번 조사지역에서 이앙법을 썼는지 유무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연작법의 일종으로서 회환법이 사용되었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휴경법, 연작법, 직파법, 이앙법 등의 농업기술은 기술적인 내용의 선진성을 내포한 농법이 아니라 실제 현실의 농사일에 활용되는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융통성있게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있어 흥미롭다. 실제로 조선시대 수도작이 휴경직파법에서 연작이앙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농업기술의 발달과 교육 속에서 직파법이 새롭게 개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농법의 변화는 당대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염정섭 2007).
그밖에 조사지역에서 소발자국이나 둑을 보수하는 당시 조선인의 발자국이 그대로 확인되어 눈길을 끌었다. 조사지역 전체적으로 상당히 많은 발자국들이 확인되었으나 수전을 경작하는 내내 생겨난 것이기에 동시기성이 확보되지 못 했고, 어떠한 동선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사 막바지에 일련의 동선을 그릴 수 있는 발자국이 확인되었고, 확인 결과 비가 많이 온 날 물꼬를 내려고 했던가, 아니면 무너진 수구 및 논둑을 보수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암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조사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금번 조사로 인해 또 다른 분야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차후 주인장의 개인적인 공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350여년전에 이 곳에서 논을 갈고 모를 심었을 한 이름모를 조상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우스갯소리로 어떤 선배님은 이번 기회를 잘 살려 계속 공부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만큼 종촌리 수전유적은 굉장히 중요한 유적이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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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定燮, 1994,「15~16세기 水田農法의 전개」『韓國史論』3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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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2007,「14세기 高麗末, 朝鮮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농업사연구』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魏恩淑, 1998,『高麗後期 農業經濟硏究』,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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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도시 역사분야 공동연구단, 2006,『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예정지역 내 문화유산 지표조사-역사분야-』, 한국토지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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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전유적을 찍은 일제시대 지도는 1914년이 아니라 대정 9년, 즉 1920년임을 밝힙니다. 제가 잘못 알았네요. 수정 요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