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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화 시의 내면세계
김몽
1.
시의 핵심적 미학은 공감적 전율의 확인이 전제로 나설 때 가능하다. 공감적 전율이 확인될 때 우리의 삶의 실존은 비로소 드러나며 이로 하여 삶을 보다 이해하고 접근하고 충실히 하는 시의 사명감이 획득된다.
시의 공감적 전율이란 혼의 울림으로서의 시가 읊는 자에게 옮아가 같은 공감 영역에서 《너》와 《나》가 동일한 시각으로 현존 삶을 확인하고 조명하여 그 속에서 인생의 비희고락을 함께 씹어보고 생의 축을 새롭게 세워봄을 뜻한다.
시인은 자기의 특유한 주술(呪術)로 독자를 신들리게 함으로써 시인이 발사하는 자기마당에 독자가 스스로 들어서게 하는 재간이 있어야 한다. 성숙된 시인, 시적 기교가 높은 시인일수록 주술 능력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시인들이 다 훌륭한 주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숱한 시가 쏟아져 나오지만 명이 길지 못하고 요절하는 시가 많으며 그만큼 또 독자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시인도 많은 것이다.
시인이 독자를 감응시켜 기대하던 바의 공감권 내에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려면 여러 가지 시적 장치를 잘 동원하여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시인 자신이 깊이 묻힌 자신의 자아 확인부터 착실히 해야 하며 치열하고 처절한 자아 대결과 끈질긴 정신적 추구가 늘 뒤따라야 한다. 즉 시인 자신이 우선 깨끗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석화 시인은 간단없이 자신을 재확인하고 현유의 자신을 과감히 부정하고 더 청고한 삶에 도달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시인과 우리 사이에 교감과 화친이 이루어진다. 그 단적 예를 아래의 시가 비교적 잘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나를 위해
구슬픈 장송곡 목메게 부르며
나는 나의 무덤을 판다
그러면 파묻힌 내 몸에서 심장만이 살아
아, 그러면 심장만이 살아서 싹터 오른다
심장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을 찌르며 자란다.
나무에는 주렁주렁 새 심장들이 가득 열린다.
―《나의 장례식》에서
어딘가 좀 벌거벗은 느낌을 주고 격정을 남용하는 듯한 유감을 주기는 해도 치열한 자아결투 속에서 청고한 자신을 찾고 있는 장엄 처연한 모습이 돋보여 우리를 시 가까이에로 다가서게 한다.
어지간한 용기와 웬만한 담이 없이는 스스로 죽을 수 없고 구덩이에 들어 누울 수 없다. 죽은 무덤 위에 하나의 붉은 심장이 커다란 나무로 일어서고 그 나무에서 주렁주렁 새 심장들이 가득 《열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마치 더러워지고 구겨지고 병든 자신의 육혼(肉魂)을 시원한 샘물에 말끔히 씻어낸 듯 한순간의 거뜬한 감수를 줍게 된다.
석화 시인은 많은 시를 썼지만 크게 분류하면 정서적 격앙에 바탕을 둔 송시(여기에는 《두만강․둘》, 《북방의 산발》, 《겨울, 사나이의 계절아》, 《9월은》, 《모아산을 두고》, 《잔디의 노래》 등 15수 좌우), 겨레의 운명을 다룬 민족우환 시(여기에는 《이산가족이란 말》, 《발음문제》, 《두만강․하나》, 《쪽바가지》, 《아버지》, 《모아산》, 《제목 없이》, 《돌의 실어증》 등 20여 수), 인생 추구와 인간 완성을 다른 시(여기에는 《누나생각》, 《겨울과수원에서》, 《도시의 달》, 《코스모스》,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처럼》, 《거울을 닦습니다》, 《봄 앞에서》, 《가을과 마주서서》, 《돌》, 《별을 빛내기 위하여》, 《옥수수 밭에서》, 《나의 장례식》, 《나를 찾지 마십시오》 등 수십 편) 등 3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석화 시인은 정서적 격앙에 바탕을 둔 송시와 겨레의 운명을 다룬 민족우환 시들에서는 크게 성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적 성공은 주로 인생탐구와 인간완성을 다룬 시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시는 후기에 와서 점점 더 확연하게 인생탐구의 자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본론에서는 석화 시인의 시들 중에서 다만 인생추구와 인간완성에 주제를 둔 시들만을 집중적으로 비쳐보기로 한다.
2.
석화 시를 이해하고 사귀자면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누나》라는 낱말이다. 석화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시적 대상물로서의 이 낱말은 시인이 꾀하고 있는 인생추구와 인간완성에 있어서 자못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도 관건적인 것처럼 보인다. 직접 《누나생각》이라고 표제를 붙인 시도 있고 부제를 《누나에게》라고 단 시도 세 수 있으며 그 외에도 그이 시에는 가끔씩 《누나》, 《누님》이라는 정다운 시어가 튀어나와 시적 분위기를 차분하게 해준다. 또 직접 《누나》라고 호칭하지 않았으되 만은 시적 상관물들 이를테면 《돌》, 《꽃》, 《잔디》, 《거울》, 《가을》, 《하늘》 등 낱말들이 《누나》의 이미지로 변용, 파생 확산되어 석화 시를 석화 시답게 해주고 있다.
석화 시에서의 《누나》는 바로 시인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선한 것, 순한 것, 정직한 것, 고결한 것, 청고한 것 등등의 상징물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는 의당 있어야 할 《누나》가 지금 없으며 혹은 시인 자신이 《누나》로 되어야 할 것인데 지금 되지 못하고 있다. 없는 《누나》를 찾으려고 애쓰고 《누나》로 되려고 분투하는 과정이 바로 석화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아울러 시인이 시적으로 인간적으로 커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누나,
꽃은 피어있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살결처럼 내 눈을 간질이던
얄포름한 꽃잎
꼬옥 다물었던 입술을 열고
조용히 미소 보내주듯이
한겹한겹 꽃망울 가만히 열고
고이 감싸 안았던 향기
꽃살에 피워 올리던
예쁜 꽃송이는 어데도 없습니다
누나,
그 파란 잎사귀는 지금 없습니다
다정스런 손짓같이
가느다란 미풍에도 하느작거리며
이 마음을 즐겁게 불러주던
이파리 이파리들
수많은 연두색의 편지봉투처럼
살뜰한 속삭임 가득 새겨 안고서
내 머리 위에 하늘처럼 펼쳐지던
천잎만잎 푸른 잎사귀들이
지금은 한 잎도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과수원에서 ―누나에게 3》에서
빈 액자 속같이 텅 빈 겨울과수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푸른 잎사귀도 어여쁜 꽃송이도 달콤한 열매도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삶의 피부는 삭막하고 쓸쓸하고 차갑고 적막하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이 그냥 이런 식으로 남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또 어느 땐가는 꽃피는 봄과 풍성한 가을이 꼭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시적 화자로 하여금 미련과 기대를 한가슴 안고 텅 빈 과수원에서 기다림으로 되어버리게 한다. 차가운 겨울, 삭막한 과수원 복판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누나》를 기다리는 그 초연하고도 숭엄한 시적 주인공의 모습이 《혼의 울림》으로 우리의 폐부에 와 닿고 이로써 시인은 주술에서 성공한다.
누나,
그래도 나의 가슴엔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이
그래도 가슴이 한가득 넘쳐 남은
무엇 때문일까요
누나,
지금 이 겨울과수원 한가운데서…
―《겨울과수원에서 ―누나에게 3》에서
시에서 《겨울과수원》과 《누나》는 겹쳐진 하나의 동일 이미지로 되고 있다. 《겨울과수원》이자 《누나》이고 《누나》이자 《겨울과수원》이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는 꼭 있게 될 《누나의 향기》와 《누나의 촉감》과 《누나의 체온》이라는 시구가 아주 따스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감각세계에 파고 들어와 공감적 전율과 미적 감흥을 일으킨다.
시인은 《겨울과수원에서》를 통해 있어야 함의 없음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누나에게》라고 부제를 단 《도시의 달》에서는 《누나》를 인정과 진실과 순결의 대상으로 내세우고 어지럽혀지고 있는 오늘의 콘크리트문화를 비난하고 시골의 순박과 진실, 순결을 그리고 있다.
누나,
여기 도시에서는 높은 아파트와 커다란 빌딩 사이를 비집고 나오느라 모서리가 닳고 여기저기 각이 부스러진 채 간신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
누나,
여기 도시에서는 색 바래어지고 구겨진 광고종이 한 조각처럼 깜박거리는 네온등의 오색불빛에 파리해져버린 밤하늘 저편에 겨우 붙어 있습니다.
―《도시의 달 ―누나에게》에서
광명과 빛의 화신인 달이 도시 콘크리트문화의 피해를 받아 각이 부스러진 채 간신히 떠오르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헌 광고종이조각처럼 밤하늘 저편에 겨우 붙어 있으며 나중엔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다.
오염되고 병들어 가는 도시인들의 삶을 《모서리가 닳고 각이 부스러진 달》로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달》로 《구겨진 광고종이 한 조각처럼 밤하늘 저편에 겨우 붙어 있는 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묘한 시어로서 이런 시어가 있기 때문에 이른바 시인과 접수체(接收體) 사이에 교합이 이루어지고 순수와 결백과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한층 더 강해진다.
또 한 수의 《누나에게》라고 부제를 단 《코스모스》는 인간은 마땅히 소박하고 정직하고 남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야 함을 읊조린 것인데 조용한 서글픔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고이 서려 있어 은연중 시를 껴안게 된다.
누구와의 약속이었기에
모두가 떠나가는 계절 뒤끝에
오히려 긴 목을 하고 피어있는 것일까
코스모스여
…
이 늦은 계절에게
엷은 향기 얹어주는
코스모스여
어느 통속잡지 뒤표지에도 오른 적 없는
내 시골누이 같은
코스모스여
하나의 약속을
한 송이 꽃으로 피울 줄 아는
안쓰러움이여
―《코스모스 ―누나에게 1》
코스모스는 계절과의 약속을 지켜 뭇 꽃들이 다 가버린 길가에서 뽐냄도 원망도 저주도 없이 애절한 정도로 조용히 미소를 품고 서있다. 코스모스의 형상은 곧 《하나의 약속을/ 한 송이 꽃으로 피울 줄 아는》 소박하고 아름답고 인정 많은 시골누이의 형상에 다름 아니다.
석화 시인의 시적 추구는 바로 우리 모두가 《하나의 약속》, 《한 송이 꽃으로 피울 줄 아는》 인간으로 되자는 것이 아닐까.
3.
위에서 석화의 시는 직접 《누나》라고 호칭되지 않아도 《꽃》, 《돌》, 《봄》, 《거울》 등 많은 시적 대상물들이 《누나》의 이미지로 변용, 파생, 확산되어 석화의 시를 시답게 해준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제부터 그러한 대상물들이 어떻게 동원되어 인생추구와 인간완성으로 파고드는 시인의 작업에 충실히 참여하고 있는 가를 보기로 한다.
한 잎 또 한 잎
그 작은 잎들을 물들이던
빛깔과
피어나던 향기와
모습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금
…
지금은 내 곁에 없는 당신
꽃 한 송이의 크기가
이렇게 엄청난 줄은 몰랐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처럼》에서
5연으로 된 시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예문에 올린 두 개의 연만으로도 시가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니 어쩌면 더 함축된 시, 더 훌륭한 시로 될는지도 모른다. 《당신》과 《꽃》과 《하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자유스럽게 조화되고 있는가. 세 개의 시어는 하나로 겹쳐져 동일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 시단에서 이와 같이 삼합일체(三合一體)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시를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줄로 안다. 《당신》과 《꽃》과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이야기》가 구경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딱히 풀이하기는 어렵지만 《누나》의 세계에로 소급해 올라가면 그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잃었을 때의 허무감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고달픈 자아확인과 처절한 자아대결, 인간완성에 대한 끈질긴 집념과 천착은 아래의 시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① 분명 이 도시 어느 거리 어느 골목 어느 문지방 밑에 묻혀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헤매 돕니다.
엄마.
② 명예라는 것 만족이라는 것 욕심이라는 것 아픔이라는 것 회의라는 것 수치라는 것 모두 다 걷어 안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헤매 돕니다.
엄마.
―이상 《어느 밤, 태를 찾아서》에서
③ 천지꽃 꽃잎마다에
부끄럼 없는 눈길을 얹기 전에는
봄을 함부로 부르지 말자
④ 조약돌 뛰어넘는 맑은 시냇물소리에
더럽힌 적 없는 귀를 열 자신이 없다면
봄을 봄이라 부르지 말자
―이상 《봄 앞에서》에서
위의 시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엄마》와 《태》, 《봄》은 《누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①과 ②는 괴롭고도 고달픈 자아확인과 순수에의 귀의를 노래한 것이고 ③과 ④는 참된 인간으로 되기가 얼마나 힘겨운가를 읊조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탐구와 인간완성의 시를 논함에 있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시가 있으니 그 시가 곧 1996년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의에서 우수상을 탄 《거울을 닦습니다》이다.
당신 닮은 모습으로
저희를 만드셨다기에
당신을 보고 지고 거울을 닦습니다.
…
거울에 비춰진 볼 꼴 없는 저 모양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당신일순 없는데
당신과 닮은 모습
저희들이라 하셨기에
당신을 보고지고
그래도 열심히
거울을 닦습니다.
―《거울을 닦습니다》에서
시에 등장하는 거울은 누님일 수도 있고 하느님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가장 성스럽고 고상한 극치의 그 무엇일 것이다. 어쩌면 불교적인 법열을 노래한 것 같고 어쩌면 기독교적인 자아완성을 노래한 것 같은 이 시는 이제껏 이 시인이 창작한 모든 시들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처럼》, 《겨울과수원에서》, 《코스모스여》, 《도시의 달》과 함께 시적 기교면에서 가장 성공한 시이며 인생탐구와 인간완성을 노린 면에서도 가장 우수한 시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시 중간부분에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더러 끼워 있어 좀 손상을 주기는 해도 그것이 이 시의 값을 높이는데 그리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석화 시인은 바야흐로 성공하고 있는 시인이며 창창한 미래가 예견되는 시인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문에 올린 시들과 그 밖의 예문에 올리지 않은 《노래》, 《고독》, 《나를 찾지 마십시오》 등 시들을 제외하고 독자들과 공감적 전율을 확인하는 시들이 별로 많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일지는 몰라도 그저 그러루한 평범무이한 시들이 퍽 된다는 점이다.
특히 정서적 격앙에 너무 치우친 시들 예로 《우리는 개인가》, 《9월은》, 《겨울, 사나이의 계절아》, 《북방의 산발》 등 시들은 시의가 거의 반나체 상태여서 되씹어볼 멋이 없다. 좀 더 은유적이고 은폐적이고 상징적인 데로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나름대로의 견해일 뿐 꼭 정확한 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평자에 따라서 시비가 다르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석화 시인이 금후 더 훌륭한 시들을 많이 만들어 우리 조선족시단을 빛내줄 것을 기대한다.
1996년 8월
《문학과 예술》 1996년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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