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魏書•東夷傳•濊》에서 말하길: 箕子가 古朝鮮의 “王”이 된뒤부터,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李朝英宗實錄》46년 1월조에 또한 : “我東文獻以訛傳訛, 今不可證. 箕子以前, 雖存而勿論可也. 由箕子逮於箕準爲四十二世, 其間事迹傳之宜詳, 而不傳者居多.” 40여 世라는 대략적인 숫자는 箕씨의 古朝鮮族 통치가 무릇 42世라고 전해진다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古朝鮮族의 역량은 매우 강대해서 侯노릇을 걷어차고 “스스로 王을 일컬었다(自稱爲王)”.《三國志•魏書•東夷傳》에서 어환(魚豢)의 《魏略》을 인용하여: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라고 하였다. 그리고《三國志•魏書•東夷傳》과 《後漢書•東夷傳》모두 “至朝鮮侯準僭號稱王”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箕準은 秦말-漢초 시기의 사람이고 箕씨왕족의 말세에 해당되는데, 《魏略》의 기사로 보아 朝鮮侯가 王을 칭한 시기는 燕이 王을 칭하였을 때와 대체로 같아야만 할것이다. 또한 朝鮮侯가 王을 칭한것은 箕準때부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연히 그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王을 칭했어야 하며 《三國志》와《後漢書》의 기사는 잘 살피지못해 잘못실은 것이다.
燕나라 易王 10년 (BC 323)에 王을 칭했는데, 그전의 古朝鮮은 어떠하였는가 하면, 시종일관 周의 동방 해외의 일개 제후국으로써 齊, 燕, 韓, 趙 등과 한치의 차이도 없었다. 燕 易王이 王을 칭하자, 古朝鮮侯도 약하고 만만하게 보일 수 없어 스스로를 높여 王이 되었다. 아울러 “以尊周室”의 기치를 내걸어 중원 열국(列國)으로써의 古朝鮮의 시각을 재빨리 똑똑하게 말하여, 그 민족과 정치의 사상 및 의향이, 殷시기 侯國 유형에서 周시기 열국적인 속성으로 이미 다 바뀌었음을 고하였다.
古朝鮮侯가 王을 칭한것은 자발적인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그 주요원인은 이웃나라인 燕의 자극을 받아서인데, 燕과 맞붙어 보고 싶어했으며, “以尊周室”하여 周 천자에게 천하의 주인으로써의 권위와 통치를 안겨주려 하였다. 김육불(金毓黻)은 “당시 중국의 제후로써 패권을 다투던 자들은 반드시 周를 받들어(尊周) 자중(自重)하였다. 朝鮮 또한 병사를 일으켜 燕을 공격함으로써 周 왕실을 받들고 싶어하였다. 즉 그들이 처한 위치는 중국의 제후 등과 같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 설을 전적으로 옳다고 본다. 古朝鮮이 周 로부터 侯에 봉해진 수백년간, 통치자인 箕씨 뿐만 아니라 보통 족민(族民)들도 周 왕실을 벗어나 홀로 독립하지 않으려 하였고 제후로써의 자기책임을 잊지않았다. 이리하여, 古朝鮮과 燕 사이에는 모순과 투쟁이 생기는데, 이는 완전히 周 왕실 제후국간의 내부 패권다툼으로 7웅쟁패와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현대적인 의미의 일개 국가에 대한 일개 국가의 침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역사 상식이 짧은 어떤 사람이라도 이러한 점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어환의《魏略》에 “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라고 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은 BC 323년 이후, 古朝鮮族이 “擊燕以尊周室”와 중원 각 제후국과의 패권다툼을 목적으로 병사를 일으켜 요하유역에 진입하는 한편, 燕나라 군대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BC 280년 무렵에 쌍방의 충돌은 가속화되어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는데 古朝鮮의 군대가 패퇴하였다. 진개(秦開)가 이끄는 燕나라 군대는 신속하게 진군하여 그 땅 2천여리를 공격하여 滿番汗(지금의 압록강 하류 일대)까지 이르자, 쌍방은 이곳을 경계삼기로 동의하고 싸움을 잠시 멈추기로 하였다. 《魏略》의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때부터 古朝鮮族의 역량은 크게 쇠락하였다.
머지않아 전쟁은 다시 일어나고, 燕나라 군대는 滿番汗을 지나 “略屬眞番•朝鮮”(《史記•朝鮮列傳》)하고 그 땅을 燕이 통치하였다. 《山海經•海內北經》에 “朝鮮在列陽東, 海北, 山南, 列陽屬燕.”라 하였다. 원래 朝鮮侯의 관할 구역내에 있던 광대한 지역이 완전히 燕나라의 통치권안에 들어가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古朝鮮族은 전국시대 제후간의 쟁패전에서 실패, 종말을 고하였다.
箕씨로써 古朝鮮族을 통치한 마지막 인물은 箕準인데 燕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그는 족내 및 국내에서 여전히 높은 권력을 갖고 있었다. 秦이 여섯나라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古朝鮮은 “屬遼東外徼” (《史記•朝鮮列傳》)으로써 여전히 秦의 판도내에 있었으며 秦왕조 다민족 대가정 중의 일원이었다.
BC 2세기 秦•漢 교체기에 중원내에 전란이 일어나 “燕•齊•趙民避地朝鮮者数萬口” (《三國志•東夷傳•濊》)하였다. 漢 초기, 노관(盧綰)이 燕王에 봉해졌는데 朝鮮侯族은 燕王의 통치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燕王 노관이 反하여 흉노로 도망갔다. 燕人 위만(衛滿)은 古朝鮮으로 망명하는 한편 무리(黨)을 결성하고 그 세력에 편승하여 箕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그들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위만은 마침내 정권을 빼앗고 王險城에 도읍하였다. 箕準은 좌우의 벼슬아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 韓땅에서 韓王을 자칭하였으나 그후 멸절되었고, 뒷날 韓人은 여전히 그를 제사하여 모셨다.《後漢書•東夷傳•韓》에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미처 도망가지못하고 古朝鮮에 남아있던 箕準의 아들 및 친족들은 모두 성(姓)을 韓으로 하여 그 화(禍)를 피하였다.
첫댓글 5월 10일에 아이디님이 중국정체성연구방에 올린 글을 이곳에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