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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0강
말씀/ 마가복음 6:30-56
요절/ 마가복음 6:38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지난 주 대전에 자리 잡은 오래 전 양을 심방했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중국요리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카톡이 날라왔습니다. “베드로 목자님, 대전 방문 이후 한의원 매출이 엄청 늘었습니다. 매출 관련 기도를 해주신 것인지? ㅎㅎ 우연일까요?” 비싼 중국요리를 시켜서 미안했던 마음이 싸그리 소멸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먹은 것과 비교되지 않을 축복을 주실거야’, 미리 예고하고 먹었다면 교회에 나가라는 메시지가 좀 더 권위 있게 전달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경험이나 계산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지, 제자가 아닌 사도로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대충 보고하지 아니하고 낱낱이 보고했다는 말씀은 제자들의 흥분된 마음과 감격을 담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사도들이 안수하자 병이 낫고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안수한 사도들이나 안수받은 사람들이나, 같이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은인이라 칭송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촌구석에서 이름 모를 인생을 살고 있다가 한순간 세상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도움을 구하며 뒤따라 왔는지, 제자들은 음식 먹을 겨를 조차 없었습니다.
보통의 리더라면 감격하고 흥분하여 제자들을 더욱 다그칠 수 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한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배가의 역사를 이루자!’ 그러나 예수님은 보통의 경영가와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31절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예수님의 관심은 역사보다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많이 수고했고 많이 지쳤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에 많이 민감해졌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예민해지고... 번-아웃 되기 쉬운 지점이었고 마귀의 시험이 파고들 수 있는 타이밍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제자들의 재충전을 돕고자 했습니다.(32)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가는 곳을 알아채고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SNS도 없던 시절, 순전히 입소문을 타고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목자 형편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필요에 앞세워 달려온 염치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신 이유입니다. 목자 없음이 왜 불쌍한 이유가 됩니까! ‘돈이 없어서 불쌍하다, 건강이 없어서 불쌍하다, 직장이 없어서 불쌍하다, 배우자가 없어 불쌍하다’, 이런 말은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반면 ‘목자 없는 양 같아 불쌍하다?’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4절을 다시 한번 보면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것은 제대로 가르칠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대마다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백성들을 건강하게 살도록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오로지 종교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거기에만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정치 지도자 헤롯왕이 삶으로 본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의인을 죽이고 정욕을 채우며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목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었으나, 목자가 아닌 도둑이요 이리였습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단절입니다. 아날로그 시대와 다르게 앞 세대의 경험이나 지식을 거부하고 가르침 받기를 거부합니다. 이전 세대와 달리 워낙 변화가 심하고 정보 전달의 속도가 빠르기에 앞 세대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세대를 향해 ‘나 때는 말이야’, 라떼를 꺼내면 꼰대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침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가르침도 문제이지만, 가르침의 부재 또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는 건강하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안에 정욕과 교만, 이기심과 탐욕의 죄성이 있고, 세상은 끊임없이 불안과 염려, 욕심과 경쟁의 바람으로 흔들어댑니다.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지혜있다 하지만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의 형상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우상숭배자가 되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때마다 깨우치고 격려하고 씨름해주는 영혼의 감독자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풍요롭고 똑똑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성인들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려는 이유입니다. 겉보기에 빛나는 청춘이지만, 한꺼풀 들여다보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으로 곤고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욕망에 휘둘려 끌려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으로 가이드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목자라는 호칭을 쓰지만, 실은 양입니다. 우리가 목자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인도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11절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을 구원과 영생의 세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고 빛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려가지로 가르치시다보니 어느 새 날이 저물어 갔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이 점점 근심과 염려로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조심스레 건의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36)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200데나리온은 커녕 2데나리온도 없는 제자들입니다. 그것을 뻔히 아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왜 이리 압박하는 것입니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 맞습니까! 경민 목자는 제자들이 각자 사먹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없었을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다 계획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더치페이하자고 하니까, ‘오? 그래? 훈련 좀 해야겠다?’, 마음 먹으셨다는 것입니다. 공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 해결보다 제자들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견에서 목자 없는 그 시대의 모습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지도자, 백성들의 아픔에 무관심한 지도자, 무능하고 심정 없는 지도자들, 그들과 다른 리더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먹여야 하는 사람이다. 너희가 책임져야 한다.” 목자는 상황이나 사람을 핑계대고 도망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책임지는 자리에 끝까지 남는 사람입니다. 책임지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애매하게 비난받을 수 있고 아픔과 희생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으며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끝내 내려오지 않은 이유도 그러합니다. “너희가 저지른 죄악이니 너희 스스로 해결하라”, 각자 문제는 각자 책임지는 것이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씀하고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우리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당함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 말씀으로 적용해본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먹을 것을 주는 자로 살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 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로 구원하신 모든 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들의 처한 현실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경쟁의 강도와 변화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살기에 쉽지 않은 세대입니다. 개인주의와 육신주의와 상대주의가 심해지고 가치관이 혼란스럽습니다. 고독과 우울의 강도가 점점 높아집니다. 윤리와 도덕의 붕괴로 말미암아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여질 정도로 기괴한 문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더치페이’의 정신으로 살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생존하고 나 홀로 중심 지킨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양식이 되고자 십자가의 자리에 서신 것처럼, 우리들도 먹을 것을 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에 외면하지 말고 응답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아니, 우리가 재벌 회장님도 아닌데, 우리에게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라는 말씀인가요?” 반발했습니다.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아예 가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없는 현실을 보고 괜히 마음만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간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향은 이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떡 몇 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요약하면,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눈앞에 부딪힌 현실과 비교해볼 때 너무 미약하여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을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절대 빈곤으로 인한 고통보다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작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절망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이백데나리온이 없음으로 빛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없는 이백데나리온을 말씀하지 않고 있는 떡 몇 개를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명에게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세상은 바벨탑을 쌓고 온통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하나님의 말씀과 아브람의 현실은 너무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당시의 아브람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 아무 비전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찾아가셨고 아브람은 반응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말씀’이라며 튕기지 아니하고 고향 친척 아버지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보았습니다. 자신은 오병이어처럼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이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만민구원역사를 이루고자 이 땅에 오셨는데, 갈릴리의 열두 제자들은 만민구원역사의 스케일에 비하면 턱도 없습니다. 숫자도 그렇고 인간됨됨이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없는 자들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 이는 예수님 당신부터 몸소 실천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을지라도 지금 있는 것에 주목하는 것, 하나님 역사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몇몇 청년들 또한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세속주의의 흐름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에게 드려지면 놀라운 역사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서 보라’는 말씀을 통해 그 믿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기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금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푸른 잔디위에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게 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놓고 ‘하나님 아버지여! 저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병이어를 통해 희망을 주셔서 감사하고 오병이어를 들고 나온 제자들을 통해 희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약시대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제 나를 통해 이들을 먹여 주옵소서 내가 당신의 아들이며 나를 통해 하늘의 양식을 얻고 영생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도록 하여 주옵소서’ 축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주시고 고기를 떼어 주셨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더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도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은 무상급식을 가능케 하는 빵공장 사장님, 혹은 현실문제 해결자가 되어줄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저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수천명을 먹이신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양식을 먹이신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5,40)
하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진 빵을 또다시 먹고자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무리들에게서 떠나 배 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45) 그리고 당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46)
해는 저물었고 제자들을 태운 배는 바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47) 그런데 4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를 힘껏 저어 10미터 전진하면 역풍이 불어 다시 9미터 뒤로 후퇴시켰습니다. 초저녁에 출행했는데, 역풍을 만나 사경, 새벽 4시까지 그렇게 바다가운데에서 사경을 헤매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돕고자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며 ‘유령이다’, 소리를 지릅니다.(49)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해주신 후에야 정신을 가라앉히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50)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그때에서야 바람이 그쳤고 제자들은 다시 한번 마음에 심히 놀랍니다.(51)
마가는 매순간마다 놀라는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해석을 달았습니다. 5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기적을 체험했으면 영적으로 더 예리해져야 하는데, 둔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와 정반대의 방향을 고집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정치적인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열망을 더욱 확고히 한 것입니다. “이 정도 능력이면 로마를 물리치고 강대국을 세울 수 있어. 권력을 쥐고 사람을 모아야 큰 일을 할 수 있지”, 현실에 갇혀 예수님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리새인들의 해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잣대로 예수님을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한손 마른 자를 고치거나 38년 병자를 고친 것을 불법자로 해석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볼수록 유력한 대권주자로 해석했습니다. 온 세상 만민의 구원자, 죽음을 뛰어넘어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구주, 무에서 유를 만드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적같은 은혜를 체험할지라도 마음이 둔하여지면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계산과 경험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 우리에게 있는 것을 찾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일하시는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