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 |
연도 |
월 |
내용(붉은 글은 중요한 내용임, 푸른 색 간지일은 해당날짜가 틀린 것 같음, 음력날짜를 이중으로 적은 것은 날짜 간지가 우리와 일본이 다르기 때문임. 우리와 중국은 같음. 처음것은 한국 및 중국간지, 뒤엣것은 일본간지에 따른 날짜임, 원본에는 일본간지를 따른 것같기에 참고로 이중으로 표기했음.) |
출처; 1874년간 탁영연보 |
1 |
1464 |
1월7일 |
慶尙道淸道郡上北面雲溪里少微洞의 옛집에서 탄생 |
8 |
1471 |
봄 |
龍仁寓舍로 이사. |
이 해에 부친 남계공(맹)이 藝文奉敎로 가게되어 龍仁 蒲谷面의 鴨皐里로 이사하였으나 모든 식구가 다 같이 살기 어려워 관사의 동북쪽에 別堂인 玉樹精舍를 짓고 형제들이 김시습(1435~1493)의 책을 공부함 |
9월 |
가정에서 小學을 공부함 |
10 |
1473 |
|
四子書를 공부함 |
14 |
1477 |
|
朱子, 通鑑, 綱目을 공부함 |
15 |
1478 |
2월 |
泮宮(성균관)에 입학하여 독서함, 木溪姜渾(1464~1519)과 어울림 |
3월 |
임오(20일)에 부인인 丹陽禹氏(병조참판 克寬의 따님)를 방문하기위해 湖西의 丹陽 집으로 감 |
8월 |
갑진(15일)에 청도로 가는 길에 善山에서 漁隱鄭仲虎(전외조부), 耕隱李孟專(1392~1480)를 만나고 신해(22일)에 운계에 도착하여 조부의 묘소를 성묘함 |
9월 |
계해(5일)에 서울로 돌아와 학교에 복학함 |
16 |
1479 |
8월 |
계유(50,49일)에 매헌공(기손)과 漢城府에서 進士初試에 응시 |
17 |
1480 |
2월 |
을축(15,14일)에 매헌공(기손)과 禮曹의 覆試에 응시 낙방 |
3월 |
신사(1일)에 부모를 따라서 청도의 운계로 돌아감, 남계공(부친 맹)이 老病으로 都摠府 經歷을 사직하고 모든 식구가 고향으로 돌아감. 동창공(준손), 매헌공(기손), 선생도 모두 같이 감 |
9월 |
신묘(14일)에 점필재(1431~1492)김종직의 문하(밀양)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함. 한훤김굉필(1454~1504), 일두정여창(1450~1504)과 사귐 |
12월 |
병인(21,20일)에 밀양에서 돌아옴 |
18 |
1481 |
2월 |
계해(19,18일)에 밀양의 김종직 문하에 다시 가서 韓文(한글?)을 공부함 |
7월 |
정유(24일)에 추강남효온(1454~1492)선생과 龍門山에 놀러감 |
8월 |
병오(4일)에 子虛元昊(?~?,憲의子)선생을 만나러 原州 酒泉山에 있는 信宿에 갔다가 돌아옴 |
19 |
1482 |
10월 |
경진(15일)에 3형제가 庭試에 응시,선생은 아프다고 하면서 일찍 나옴. 매헌공(기손)이 장원, 동창공(준손)이 2등 |
11월 |
경술(16,15일)에 청도 운계로 돌아옴 |
20 |
1483 |
2월 |
무인(15일)에 밀양의 김종직을 만나보고 4월에 돌아옴 |
9월 |
신축(11일)에 南溪公(맹) 별세(74세) |
11월 |
경술(21일)에 남계공(맹)을 청도 상북에 있는 水也山 乾坐 언덕에 장사지냄. 비명은 홍귀달(1438~1504)이 찬함 |
22 |
1485 |
12월 |
정해(10일)에 服闋(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음) |
23 |
1486 |
봄 |
군수 李鈞이 선생을 청도군의 學師敎授로 채용 |
7월 |
갑자(21일)에 嶺南左道監試 에 응시 初場에 1등 終場에 아마도(?) 3등 |
8월 |
정유(25일)에 覆試에 응시 생원1등, 진사 2등 |
9월 |
무진(26일)에 式年庭試 文科 初試에 三場연속 장원 |
10월 |
병술(15,14일)에 覆試(시험문제는 中興策,서거정(1420~1488)이 감독)에 장원, |
경자(29,28일)에 殿試에 응시 |
11월 |
갑자(23일)에 갑과(시험문제는 中興) 제2등, 出身이 됨.(이후에 조광조(1482~1519)가 시험을 감독할 때 송순(1493~1582)의 답안지를 보고는 '계운뒤에 이런글은 없었다'고 하였다.) |
기사(28일)에 承問院 授務功郞 權知 副正字 |
12월 |
갑술(3일)에 正字兼 春秋館記事官에 임명. 이때 동창공(준손)이 重試에 합격하여 弘文校理에, 매헌공(기손)은 吏曺佐郞에 임명되어 金氏三珠라 함) |
24 |
1487 |
1월 |
갑자(23일)에 대제학 서거정의 추천으로 弘文館 正字兼 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에 임명 |
3월 |
병오(6일)에 親(모친? 또는 부인?)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얼마간의 말미를 얻어 신해(11일)에 운계로 돌아옴 |
4월 |
정해(17,16일)에 부인 우씨 별세 |
5월 |
임인(3일)에 본직으로 복귀하라는 명을 받음 |
6월 |
병자(8일)에 부인의 사망으로 사표를 내었으나 수리되지 않아 말미를 얻어 신묘(23일)에 우부인을 청도의 상북과 豊角의 경계에 있는 蘿葍山 寅坐에 장사지냄 |
기해(31일?)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고 사표를 내었으나 불허됨 |
8월 |
을유(18일)에 杏州의 추강남효온 선생 방문하고 成聃壽(?∼1456)선생의 묘소를 찾아뵘 |
9월 |
경오(34일)에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상소하여 임신(36일)에 晉州牧의 學敎授에 임명됨 |
이해 봄에 매헌공(기손)이 夏官(兵曺)佐郞이었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창녕현감이 되어 옴. 선생(탁영공)이 부임차 내려오면서 금산의 曺偉(1454~1503,김종직의 처남)를 방문함. 정해(51일)에 창녕에 도착하여 모친을 뵘. |
10월 |
무술(32일)에 晉州學에 도착함 |
25 |
1488 |
3월 |
정묘(3일)에 목사 慶太素및 20여명과 촉석루에서 놀고 서문을 씀. |
기묘(15일)에 함양의 藍溪에 가서 일두정여창을 방문하고 3일 후 진양으로 돌아옴. |
7월 |
을축(4,3일)에 교수직을 사직하고자 상소를 올리고 출발함 이 때 매헌공(기손)이 돌아오자 선생도 역시 병으로 관직을 그만 둠. |
신미(10,9일)에 시조왕릉의 제사에 참석하여 제문을 씀. |
정축(16,15일)에 운계로 돌아옴 |
8월 |
병신(5일)에 추강남효온,여경홍유손(1431~1529),우자용이 내방하여 같이 雲門에 놀러감. |
기유(18일)에 운계로 돌아와서 3일 후 헤어짐 |
9월 |
임신(12일)에 雲溪精舍 완공, 慵軒李仲鈞이 축대를 씀 |
26 |
1489 |
2월 |
정사(29,28일)에 일두정여창이 내방하여 頭流山에 놀러가고 3일후 헤어짐. |
3월 |
계유(15일)에 翰林조지서(1454~1504) 신종호(1456~1497)등이 추천하여 宣敎郞 藝文館檢閱 겸 經筵典經 春秋館 記事官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함 |
4월 |
기해(11일)에 함양으로가서 경상도 관찰사 은경김여석(1445~1493)선생 배알. |
경자(12일)에 함양의 藍溪에 가서 일두정여창선생 방문. |
임인(14일)에 일두와 두류(현 지리산)에 놀러감. |
정사(29일)에 악양성(현 하동군 악양면에 있었나?)에서 배를 타고 내려감 |
5월 |
기미(2일)에 진주에 가서 사호 강혼을 만남. 임술(5일)에 밀양의 김종직 선생을 만남. 이때에 산천을 유람하며 강론함. 신사(24일)에 조정의 부름을 받음. |
6월 |
경인(3일)에 명령을 받고 계사(6일)에 倬卿崔漢能을 전별함 |
7월 |
경신(4일)에 새로 결혼하기 위해 관직을 오래 비울 것 같아 사직서를 내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아 말미를 얻어 집으로 옴. |
계해(7일)에 湖西의 木川에 있는 부인 예안김씨의 집을 방문함. |
임신(16일)에 서울로 돌아와 을해에 翰苑에 들어감. |
경진(24일)일 밤에 임금(성종)이 經筵을 열고 경회루에서 잔치하며 선생에게 술을 내림. |
병술(30일)에 임금이 주색을 즐기는 것을 보고 극간하여 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임금은 오히려 한계급 승진하여 가자함. 李深源(1454~1504)을 방문함 |
8월 |
경자(15일)에 명을 받고 여러 벼슬아치와 같이 掌樂院으로 가서 임금의 술을 받음. 병오(21,20일)에 2품이상의 벼슬아치와 양관이 北所에서 연회를 함. |
무신(23,22일)에 經筵에 입시하여 李胄와 같이 사관이 기사를 쓰는 규범에 대해서 아뢰었다. |
9월 |
경신(5일)에 임금이 공문을 내려 道로서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고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말미를 얻어 집으로 옴. |
계미(28일)에 檢閱에서 承訓郞 兼 弘文館 正字에 임명되어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불허됨 |
10월 |
정해(3일)에 선생의 명성을 시기한 掌令 李承健(1452~1502)에 의해 무고하게 탄핵을 당했으나 갑진(20일)에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옴. |
임자(28일)에 正字에 임명되어 철회를 상소하였으나 불허되자 또 사양함. |
11월 |
무오(4일)에 특별히 遼東의 質正官에 임명되어 병인(12일)에 임명장을 받고 정묘(13일)에 출발함. |
27 |
1490 |
1월 |
鳥蜜館(현 玉河館, 북경에 있었음)에 체류함 |
2월 |
계축(31,3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가 갑인(32,31일)에 명령을 받고 丕顯閣(경복궁내)으로 감. |
3월 |
임금이 駱山園亭을 내려 사양하였으나 불허됨 |
경신(8일)에 通善郞 承政院 注書 兼 檢閱에 임명되어 세번이나 사양하였으나 불허. |
을축(13일)에 經筵으로 입궐하여 임금(성종)께 숙배와 사은하고 魯山君(단종)의 복작을 진언하였으니 불허. |
3월 |
병인(14일)에 史館에 들어가 史草를 수정하면서 김종직의 弔義帝文을 실음. |
4월 |
정해(5일)에 政院(승정원)에 들어감. 기축(7일)에 六臣傳(사육신전)을 완성. |
병신(14일)에 翰苑이 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계묘(21일)에 함양에 이르러 무신에 모친을 모시고 운계로 돌아옴. |
신해(29일)에 한훤김굉필(1454~1504)가 내방하여 가야산 구경을 감. |
갑인(32일)에 靈山의 노인들을 위하여 申澹의 生祠堂記를 씀 |
5월 |
갑자(13,12일)에 초계로 가서 巡相鄭佸(1435~?)을 찾아뵘 |
무진(17,16일)에 합천(군수는 金永錘)으로 가서 梅月樓에 올라 갔다가 경오(19,18일)에 운계로 돌아옴. |
신미(20,19일)에 通德郞 弘文館 著作 兼 經筵說經 仍帶注書 檢閱에 임명되어 빨리 올라 오라고 하였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음. |
병자(25,24일)에 冶城을 따라서 한훤김굉필과 함께 가야<산>에서 유람 |
7월 |
병진(6,5일)에 弘文館 博士 兼 經筵司經 春秋館 記事官 世子 侍講院 說書 仍 帶注書 檢閱로 승진되어 사양하였으나 불허 |
8월 |
계미(3일)에 遞注書說書 에서 朝奉大夫 弘文館 副修撰 知製敎 兼 經筵 檢討官 春秋館 記事官 仍 帶檢閱에 승진되어 두번 사양하였으나 불허되어 취직 |
9월 |
경신(11,10일)에 秋江(남효온)과 같이 삼각산을 유람하고 雪岑僧 김시습을 방문. |
병자(27,26일)에 成均館 典籍 兼 中學敎授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불허. |
윤9월 |
정해(8일)에 翰苑의 겸직을 사양하였으나 불허. |
10월 |
병진(8,7일)에 朝散大夫司憲府監察 겸직에 임명되어 고사하였으나 불허 |
무인(30,29일)에 檢閱 職은 일두 정여창의 추천으로 된 것이므로 사양하니 허락함 |
기묘(31,30일)에 遞檢閱에 승진되어 두번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여 명령을 받듬. |
11월 |
기축(11일)에 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서울(북경)에 감. |
28 |
1491 |
1월 |
鳥蜜館(현 玉河館, 북경에 있었음)에 체류함 |
2월 |
경술(4,3일)에 禮部員外郞 程愈를 만나서 小學集說을 구함 |
3월 |
계묘(27일)에 서울로 돌아와 복명하고 小學集說을 바쳐 임금이 校書館에 명하여 인쇄하도록 함. |
을사(29일)에 司諫院正言에 겸직되어 고사하였으나 불허하여 병오에 취직함. |
병오(30일)에 집에 잠시 가보겠다고 상소를 올려 허락받음 |
4월 |
무신(3,2일)에 운계로 돌아옴 |
정묘(22,21일)에 奉列大夫弘文館修撰의 겸직을 명받고 모친의 병환으로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여 또 사양함 |
5월 |
신사(6일)에 北征都元帥 從事官에 임명되어 취직. |
기축(14일)에 龍驤衛 司正에 임명됨. |
을미(20일)에 본직을 마치고 校書館 博士隸綱目校讐廳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함. |
을사(30일)에 또 임명하여 수락하고 갑인에 직무를 시작함. |
8월 |
경오(26일)에 兵曹佐郞의 겸직을 명 받아 校讐綱目은 사양하였으나 불허. 임신(28일)에 취직 |
9월 |
계미(10,9일)에 伯符趙之瑞(1454~1504)를 만나기 위해 白雲洞(현재 어디?)에 감. |
신묘(18,17일)에 智翁유순정(1459~1512)을 송별하기 위해(이때 함경도평사로 나감) 돈의문 밖에 나감. |
기해(26,25일)에 吏曹佐郞에 겸직되어 校讐綱目은 다시 사양하였으나 불허. 임인(29,28일)에 취직 |
10월 |
정미(4일)에 奉正大夫 및 帶銓郞으로 승진 |
무신(5일)에 中訓大夫 忠淸道都事 兼 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됨. |
임술(19일)에 昭陵의 位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 |
정묘(24일)에 공주의 임지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갑술(31일)에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 |
11월 |
병자(4,3일)에 모친의 병환으로 상소를 올려 허락되어 운계로 옴. |
11월 |
정해(15,14일)에 김해에 가서 납릉을 배알하고 회로당기를 씀 |
29 |
1492 |
1월 |
기축(18,17일)에 목천의 농막에 갔다 옴. |
2월 |
임자(11일)에 修撰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불취 |
계해(22일)에 운계로 돌아와 모친을 뵘. |
기사(28일)에 밀양의 김종직을 방문하여 주역을 강론하고 7일 후 운계로 돌아옴. |
신미(30일)에 복직을 명받았으나 사양하여 불취 |
3월 |
경진(10일)에 吏曹佐郞에 다시 임명되어 취직하고 사가독서를 상소함. |
병술(16일)에 또 입궐을 명받아 신묘(21일)에 임금을 배알하고 임진(22일)에 또 상소하였으나 불허 |
4월 |
을묘(15일)에 修撰의 겸직을 명받고 사양하였으나 불허 |
5월 |
을해(6일)에 端午帖子十二章을 지음 |
7월 |
계미(15,14일)에 中直大夫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藝文館奉敎에 승진되어 두번 사양하였으나 불허 |
8월 |
정미(9일)에 임금을 따라 成均館에 감 |
임자(14일)에 成均館 直講의 겸직을 받음 |
9월 |
기사(1일)에 김종직의 부음을 듣고 통곡함. |
9월 |
갑신(16일)에 매헌공(기손)이 별세, 38세 |
9월 |
무자(20일)에 司諫院獻納의 겸직을 받고 형님의 상중이라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여 계사에 취직. 忘軒(李胄,1464~1504)과 같이 이극돈(병조판서)과 성준(북도병사)이 분당하여 권력을 다투는 것에 대해서 상소를 올림. |
병신(28일)에 副校理의 겸직을 명받고 賜暇湖堂讀書를 하게됨 |
10월 |
계묘(6,5일)에 호당에서 추강(남효온)의 부고를 듣고 통곡 |
임자(15,14일)에 누이의 아들인 趙如愚를 보내어 김종직의 제례에 조문함 |
11월 |
경오(3일)에 매헌공(기손)을 용인에 장사지냄 |
11월 |
계유(6일)에 而信鄭誠謹(?∼1504), 德優辛永禧(1442~1511), 浪翁李黿(?∼1504)이 내방 |
을해(8일)에 친구인 希仁朴增榮(1464~1493?)이 사망 |
30 |
1493 |
1월 |
계미(17일)에 弘文館校理로 승진, 사양하였으나 불허. 갑신(18일)에 해직을 요청. 병술(20일)에 특명으로 頒諭御史가 되어 민정을 살피려 가는 길에 정해(21일)에 용인으로 가서 鄭光弼(1462~1538)과 時事에 대하여 토론함 |
2월 |
병진(21,20일)에 운계로 와서 모친을 뵙고 3일을 있다가 돌아감. |
3월 |
기사(4일)에 밀양으로가서 김종직 선생의 묘소에 제문을 바침 |
3월 |
임신(7일)에 김해로 가서 臨錦堂記를 씀 |
3월 |
갑술(9일)에 儲福山에 있는 선조묘에 성묘함 |
정해(22일)에 하동을 지나면서 일두(정여창)을 방문하고 대학에 대해 토론함 |
4월 |
계묘(9일)에 창녕으로 부터 운계로 돌아옴 |
5월 |
경진(17,16일)에 문경에 이르러 민정을 살피고 서울로 향함 |
갑신(21,20일)에 便殿(임금의 궁궐)에 들어가 민심을 보고함 |
을유(22,21일)에 司憲府持平에 임명됨. |
기축(26,25일)에 通訓大夫弘文館校理 겸직에 임명됨, |
7월 |
무술(6일)에 藝文館應敎가 되어 賜暇讀書함(홍귀달이 임금께 요청하여 허가) |
정사(25일)에 임금의 술잔을 받음. |
8월 |
무자(26일)에 御製四十八詠詩의 발문을 씀 |
9월 |
기묘(48,47일)에 용인으로 가서 매헌공의 小祥(1년기제사)에 제문을 씀 |
10월 |
기유(48일)에 茂豊副正 李摠(?∼1504,태종의 증손)이 내방하여 거문고의 曲에 대해 토론함 |
11월 |
정해(56일)에 진주로 가는 士浩姜渾를 송별함, |
12월 |
경술(50,49일)에 남원으로 가는 사성이희순을 송별함 |
31 |
1494 |
1월 |
무오(28일)에 議政府檢詳의 겸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불취 |
2월 |
계미(24,23일)에 獻納이 됨. 천재와 변란이 있을 때 혜성이 보인다고 상소하여 간당들이 숨을 죽임 |
3월 |
임자(23일)에 兵曹正郞의 겸직에 임명됨 |
4월 |
계유(15일)에 사직이 허락되어 부인과 같이 운계로 돌아옴. |
5월 |
경인(3,2일)에 弘文館校理知製敎守藝文館應敎文臣兼宣傳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불허 |
6월 |
갑자(7일)에 부름을 받고, 임신(15일)에 명령을 받고 경인(33일)에 사양하였으나 불허 |
7월 |
기해(13일)에 禦侮將軍忠武衛副司直知製敎兼世子侍講院文學春秋館記注官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여 계축(27일)에 취직 |
갑인(28일)에 東宮(세자)을 가르침. |
을묘(29일)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돌아옴. |
8월 |
신미(15일)에 校理兼文學에 임명되어 사양하고 불취 |
9월 |
병신(11,10일)에 吏曹正郞知製敎兼承文院校理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에 임명하여 사양하였으나 불허 |
10월 |
계미(28일)에 仲雍李穆(1471~?)이 연경에 가는 것을 배웅함 |
11월 |
갑진(19일)에 본직에 겸하여 兩館應敎經筵侍講史館編修春坊弼善에 임명되어 3번 사양하였으나 불허하여 무신(23일)에 취직 |
12월 |
경신(5일)에 大學을 강론하여 임금이 술을 내림. |
병인(11일)에 특별히 編修官直史館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불허. |
경오(15일)에 또 사양하였으나 불허 |
12월 |
기묘(24일)에 성종대왕 붕어 |
32 |
1495 |
2월 |
병자(22일)에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불허 |
3월 |
기축(6,5일)에 戒辭十條로 인하여 면직을 요청하였으나 불허 |
계사(10,9일)에 스스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옴. |
갑오(11,10일)에 임금이 준 집을 돌려드린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회답이 없어 다음날 바로 실행함. |
경자(17,16일)에 제천을 지나면서 자범권경유(?∼1498,1495년에 제천현감)를 방문함. |
정미(24,23일)에 운계에 도착함. |
10월 |
갑자(15일)에 거센바람이 불어 지조가 굳은 선비의 고심을 아는듯 했다. |
12월 |
경신(11일)에 獻納에 임명되어 두번 사양하였으나 불허(이조판서 어세겸(1430~1500)이 추천) |
33 |
1496 |
1월 |
신묘(12일)에 임명수락을 재촉하는 교지가 있어 임진(13일)에 말을타고 올라가 경자(21일)에 성밖에 도착하고 신축(22일)에 배알하여 명을 받을 때 사양하였으나 불허. |
계묘(24일)에 昭陵의 복권을 상소하였으나 불허. |
병오(27일)에 文宗廟室에 불을 켜야 한다고 정미(28일)에 상소하였으나 회답이 없어 무신(29일)에 다시 상소하였으나 불허 |
2월 |
신해(3,2일)에 모친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실행함. 정사(9,8일)에 운계에 도착. 경신(12,11일)에 승인이 됨. |
정묘(19,18일)에 향지권오복(1467~1498)과 같이 水樓에서 유람함. |
신미(23,22일)에 湖(함창)의 고향집에 있던 홍귀달(1438~1504)을 찾아뵘. |
갑술(26,25일)에 운계로 돌아옴. |
3월 |
병술(8일)에 吏曹正郞兼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불취 |
갑진(26일)에 非鄠人對를 저술 |
윤3월 |
정축(29일)에 모친 용인이씨 별세(73세) **정축의 중국력은 30일임** |
5월 |
모친을 남계공(맹)의 좌측에 장사지냄.묘지를 직접 씀 |
35 |
1498 |
1월 |
임자(16,15일)에 遊月官賦를 저술(연산군의 淫虐을 걱정하는 내용) |
6월 |
정축(12일)에 服闋(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음) |
경진(15일)에 김숙인을 송별 |
임오(17일)에 김해에서 조상의 묘를 성묘 |
6월 |
계미(18일)에 盆山의 농막에서 涵虛亭記를 씀(부사 崔澹의 요청) |
6월 |
병술(21일)에 함양으로 가서 일두정여창을 방문 |
경인(25일)에 風疾(현기증)이 있어 청계정사에서 요양 |
7월 |
갑오(-1일)에 聚星亭賦를 지어 정여창에게 보야줌 |
7월 |
병신(5일)에 史事로 체포됨(**병신일은 2일임, 5일은 기해일임**) |
관리가 명령을 받고 청도로 왔으나 선생은 이때 함양에 있어서 대유가 달려와서 남계에 이르러 고하니 선생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말도 없이 웃었다. 정여창이 선생에게 사화가 일으났는데 웃음이 나오는가 하니 선생이 이는 분명히 극돈이 일으킨 것이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대 형님께서는 부디 몸조심하시라 하자 정여창이 말하기를 말을 많이 하지 말아라 나도 역시 이 일로 죽을 것이다.하자 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都事가 와서 체포의 명령을 내리니 선생은 즉시 마당 아래로 내려가 북면(북쪽 임금이 계신곳, 또는 청도 상북면의 조상묘가 있는 곳)을 보고 4번 절을 마치고 마음 편하게 송환길에 올랐다. |
7월 |
신축(7일)에 의금부에 갇히고 조의제문에 대한 국문을 당하였다. |
을사(11일)에 仲雍李穆(1471~?),文炳許磐(?∼1498)도 빈청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
7월 |
무신(17일) 형을 결정하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무신은 14일임**) |
7월 |
정사(26일) 형을 결정하여 올리는 답서(回啓) (** 정사는 23일임**) |
김종직은 剖棺斬屍 |
김일손,권오복(1467~1498),권경유(?∼1498)는 凌遲處死, (權沇(권경유의 아들);능지처사) |
李穆(1471~?),許磐(?∼1498)은 處斬 |
강겸(?∼1504)은 곤장 1백대, 가산몰수, 노비전락 (강계유배이후 능지처사) |
홍한(1451~1498,경흥유배도중사망),정여창(1450~1504,경성),茂豊副正 이총(?∼1504).강경서(1443~1510,회령),이수공(1464~1504,창성),정희량(1469~?,의주),정승조,이종준(?∼1499,부령),최부(1454~1504,단천),이원(?∼1504,곽산),이주(1468~1504,진도),김굉필(1454~1504,희천),박한주(1459~1504,벽동),임희재(1472~1504,종성),강백진(?∼1504,정주),이계맹(1458~1523,영광),강혼(1464~1519,후에 연산군에게 아부)은 곤장과 유배 <대부분 갑자사화때 능지처참당함> |
어세겸(1430~1500),유순(1441~1517),윤효손(1431~1503)등은 罷賤 |
홍귀달(1438~1504),조익정(1436~1498),허침(1444~1505),안침(1445~1515)등은 左遷 |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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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무오(27일) 정오에 被禍(화를 입음, 즉 사형이 집행됨) (** 무오는 24일임**) |
별세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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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경신(26일)에 期叟朴兆年(1489~?) 선생이 선생의 가족들과 같이 시신을 수습하여 楊州의 石橋언덕에 장사지냄 |
1506 |
9월 |
무인(2일)에 누명을 벗고 관작 복권 |
이때 동창공(준손)이 남원에 있으면서 중종반정의 격문을 지음 |
10월 |
경오(20일)에 묘소를 木川의 鵲城山으로 이장 (**경오는 25,24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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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大壯)이 奉祀(제사를 모심)를 시작함 |
1507 |
5월 |
갑진(2,1일)에 집의 재산을 되돌여 받음 |
1508 |
8월 |
병자(11,10일)에 묘지를 水也山 戌坐의 언덕으로 이장 |
1512 |
9월 |
계축(42일)에 通訓大夫 弘文館 直提學 兼 藝文館 應敎 經筵 侍講官 春秋館 編修官으로 증직됨 |
10월 |
임오(42,41일)에 임금이 김일손을 칭송하는 글을 내림 |
1518 |
2월 |
경진(11,10일)에 교지를 내려 자손들을 관직에 채용함 |
1519 |
2월 |
을사(41일)에 문집의 간행을 완성 |
1548 |
1월 |
신축(24일)에 연보의 초본완성 |
1578 |
가을 |
紫溪祠가 書院으로 됨 |
1608 |
봄 |
紫溪書院 重建 |
1660 |
2월 |
경상도 유생 李光鼎등이 상소하여 書院의 賜額을 청함 |
6월 |
예조에서 허락함 |
1661 |
4월 |
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藝文館 直提學 尙瑞院 正으로 증직함 |
紫溪書院의 額號를 내림 |
1664 |
3월 |
木川의 竹林祠에 배향 |
1668 |
5월 |
문집의 중간본 완성 |
1676 |
봄 |
충청도 유생들이 竹林祠의 賜額을 청하여 허락함 |
|
가을 |
道東書院으로 賜額 |
1723 |
9월 |
神道碑銘 완성 |
1830 |
2월 |
경상도 유생 金相閏 등이 김일손, 절효공, 삼족당공의 시호를 청함 |
8월 |
三道유생 李浚 등이 세분 선생의 시호를 청함 |
9월 |
이조판서 徐能輔(1769~1835)가 공문을 올림 |
11월 |
영의정南轍, 좌의정李相璜(1763~1841), 우의정鄭晩錫(1758~1834)이 시호를 청하여 임금이 허락함 |
12월 |
資憲大夫 吏曺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事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世孫左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증직됨 |
1834 |
6월 |
시호가 내려짐(文愍公) |
1835 |
5월 |
임금이 禮官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냄 |
1838 |
1월 |
重刊 문집이 완성됨 |
1872 |
10월 |
木川의 鵲城山에 있던 부인 김씨(예안)의 묘소를 옮겨 선생묘의 우측에 부장함 |
1874 |
6월 |
新刊의 연보가 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