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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팔선은 일본 제국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 광복을 맞이한 조선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북위 38도 위선을 기준으로 설정한 경계선이다. 총 길이는 312km이며 이는 군정이 끝나고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실질적인 경계선 역할을 하다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무효화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으로 현재의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
삼팔선에 대한 지정학적 유래는 러일전쟁 이전 일본 제국이 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에 제시했던 절충안 가운데,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양분하자는 구상이 최초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동양의 신생 제국으로 생각하던 러시아는 이러한 제의를 무시했고, 일본은 이후 러시아와의 대결 노선으로 돌아서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었다. 나중에 러시아 측에서 39도선 분할을 재차 제의했지만 이 때 이미 외교적 수세라 판단한 일본은 제의를 무시했고, 양국의 긴장은 러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일본군은 38도선 이북은 관동군이, 38도선 이남은 조선주재 일본군(17방면군)이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일본이 남북 분단을 예견 또는 유도했다'는 설을 제기하나, 이에 관해서는 명확한 인과관계가 부족한데다[3] 상술했듯 한반도를 특정 위도선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러일전쟁 이전부터 나왔던 것이므로 특별한 정치적 판단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적어도 근대 이후 북위 38도선이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은 이북 지역에 비해 면적이 좁지만 인구는 2배 정도 많은 데다 수도 서울을 포함하고 있는 대신 이북 지역은 면적이 더 넓으면서 북부 지방의 요충지인 평양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8월 8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이 물밀듯이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만주에 100만 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소련군에 의해 1주일 만에 무너졌고, 8월 15일 청진시까지 점령한 소련은 쇼와 덴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렇게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소련과 협상했다.
미군은 아직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계선 정도로 협상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군 사령관은 삼팔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삼팔선 이북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때 미군이나 연합군은 한반도에 없던 상황에서 소련이 먼저 삼팔선을 봉쇄하고 북한을 준비해둔 계획대로 공산화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다른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겠다고 하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게 되었다.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러나 북한을 일제로부터 자유를 주러 온 해방군이라고 선전하고 포섭한 소련은 1945년 8월 26일 공식적으로 삼팔선을 봉쇄하면서 전화 통신, 물자의 왕래 등 대부분을 끊고 당분간 민간인의 통행은 모르는 척 했을뿐이다.
3. 경유 지역
삼팔선은 서해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옹진군 - 벽성군 - 해주시 - 벽성군 - 연백군 - 경기도 개풍군 - 개성시 - 장단군[6] - 파주시 - 연천군 - 포천시 - 가평군 -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 춘성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양양군을 통과한 후 동해에 닿는다.
3.1. 지형지물
삼팔선이 지나는 곳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교차하는 곳은 백령도 동쪽 앞 바다, 경기도 연천군 매현리와 개성시 장풍군 매현리(1945년 8월 14일 기준으로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매현리)이다.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쪽에 위치한 대한민국 실효지배 지역은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백령도를 제외한 지역 기준으로 38선을 통과하는 도로 앞에 "여기는 38선입니다" 등의 38선 표지석, 표지판이 있다. 38선 표지석, 표지판은 38선 반경 1km 이내의 도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다. 아래의 지형지물은 바다, 산, 하천, 호수, 교통시설, 마을, 관광지 같은 곳이다.
4. 문제점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너무나 인위적인 분계선이었다. 같은 분단국인 월남(베트남)도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되었지만, 실제로는 북위 17도선보다 약간 남쪽인 강을 경계로 분단된 것이었고 남북으로 긴 영토 특성상 길이도 짧았다. 북위 38도선은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고립된 지역 발생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반도는 남한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월경지가 되었다. 또 38선 이북에 위치한 해주의 경우 해주항이 위치한 용당포 일부 지역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해주항 일부가 월경지가 될 판국이었다. 때문에 해주의 경우 용당포를 포함한 해주 전체를 소련이 관할하고 38선 이남의 해주만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으로 미군정과 소군정이 합의를 해서 월경지가 생기는 건 피했으나 해주항과 서해를 연결하는 해주만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6.25 이전까지 해주는 이름처럼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정작 바다를 쓰지는 못하는 무늬만 항구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
강제 분리되는 행정구역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면(面)이나 리(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방어상의 문제점
이는 특히 남한 측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10]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고 실제로 이 지역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결국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부 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38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12]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38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 미국의 조정 시도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38선은 남북의 경계선으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선이었고 1945년 11월에 미국 국무부는 주 모스크바 대사인 해리만 통해 소련과 38선 경계 조정을 협상하도록 지시했는데, 당시의 안은 38선 이남의 황해도를 소군정으로, 38선 이북의 경기도를 미군정으로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1월의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가 소군정 책임자인 테렌티 시티코프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황해도의 38선 이남 지역을 소 군정 관할로 한다.
경기도의 38선 이북 지역을 미 군정 관할로 한다.
강원도는 38선과 근접한 행정구역(시군) 경계를 따라 관할 경계를 재조정한다.
이 안에 따르면 강원도는 철원-김화-양구-인제-양양 및 그 이북이 소 군정, 화천-춘천-홍천-강릉 및 그 이남이 미 군정 관할이 된다. 그러나 소련측이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경계가 조정되지는 못했다.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
6.25 전쟁의 정전 협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군사분계선(휴전선)과 삼팔선을 오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외국 언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인들도 현재의 경계선이 군사분계선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어휘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삼팔선은 휴전선보다 존속기간은 훨씬 짧지만 아무래도 최초로 남북한을 갈라놓은 정치적인 경계선이고 어감이 있는데다가 지구상의 위도선을 기준으로 했다는 점이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점 등이 꼽힌다.
휴전선은 1953년 휴전회담 이후에 설정된 선으로 38선과 비교해 보면 개성을 포함한 경기도 서북부와 황해도 연백평야, 해주 이남의 옹진반도 부분은 북한이 좀 더 남하하였고 거꾸로 연천, 포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설악산, 간성, 거진 등을 포함한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지역은 남한이 북상했다. 때문에 혹자는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평지는 북한이 더 많이 먹었고 남한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와 영토 자체를 더 많이 먹은 셈이다. 남한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38선 때보다 최단거리가 북한에 약간 가까워졌지만, 방어에는 더 유리해졌다.
왜 이런 모양이 나왔나면 1951년 4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UN군에 의해 격퇴된 이후 전황이 교착화 양상이 되자 6월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회담장소가 판문점이었고 그 때문에 그 주변인 서부전선쪽에선 전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협상이 완료되기 전까진 한뼘이라도 땅을 넓히려는 양쪽의 지루한 공방전이 동부전선 쪽에서 장장 2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UN군이 북으로 야금야금 밀고 올라간 결과 저런 모양이 나온 것이다. 김영옥(군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공군의 1951년 여름까지 이어진 대공세 이후에는 UN군이 오히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고지전을 전개하여 전선을 밀어올리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상술한 판문점 인근에서도 1953년 6월경에는 국군 해병대를 주축으로 해서 거의 개성 인근까지 연백평야 일부분을 전개하고 있다가 휴전 성립 직전에 예성강철교를 끊고[18] 수복지를 내준 후 퇴출해 와야 했다.
사실 38선 당시보다 군사분계선인 현재 서울특별시가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맞지만 주로 드는 강서구(구 경계 기준 휴전선과 24km)의 예시는 좀 잘못되었는데, 직선거리상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강서구는 휴전선이 그어진 1953년 당시 애초에 서울의 영역이 아니었고 이후 1963년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서울특별시의 영역 확장과 맞물려 서울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1953년 당시의 서울 시계 기준으로 38선이나 휴전선이나 직선거리는 거의 비슷했고 한강 하구와 임진강을 경계로 서쪽 돌출부만 방어하면 되는 휴전선이 의정부 방면에서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 38선보다 방어에는 훨씬 유리했다.
6.25 전쟁 직전에 개성시에서는 "1950년은 단기 4283년인데 4283을 거꾸로 하면 3824 3×8=24여서 이 해에 38선이 이사 가서 통일이 된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단기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북한이 아니라 남한 쪽이었다. 단군은 신화, 대종교의 인물이므로 공산주의 정부[21]에서는 단군기원을 쓸 이유가 없었다.
6. 대체 역사
6.1. 미국의 안대로 조정되었을 경우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한 안대로 경계가 조정되고 그대로 분계선으로 고착화되었을 경우, 행정구역 경계는 일반적으로 산의 능선이나 하천 등의 자연 지형을 따라 그어지기에 그를 따른 이 경계는 삼팔선보다 육상 방어가 유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휴전선에 비해선 여러 모로 불리한 점이 많다. 물론 개성이라는 상징성이 높은 도시를 포함한 미수복 경기도[22][23]를 차지하게 되어 서울 방어가 다소 유리해지는 점[24],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자연경계를 따르게 됨에 따라 육상 방어하기 나아지는 점은 있으나 휴전선에 비해 경계선 길이가 긴 것을 시작으로 당장 서해 5도가 북한 땅이 됨[25]으로써 서해북방한계선 대신 북한이 1973년, 1999년 등에 주장했던 경계선과 비슷한 해상 경계선이 분계선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에 따라 교동도, 석모도, 용유도 등이 최전선 해군 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해주는 서해 5도로 남쪽 바닷길을 확보하여 실제 역사보다 민간 항구 역할을 잘 하게 될 것인 반면, 인천은 민간 항구로서의 중요도가 실제 역사에 비해 줄어들고 군항의 성격이 강해졌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은 물론 만들어지기 힘들었을 것이고, 김포국제공항도 제약을 많이 받게 되어 수원 공군기지가 민항 겸용화, 시설 확장 등을 통해 서울권의 대표 공항 역할하게 되었을지도.이어 동쪽 경계도 상당히 남하하여 철원 평야나 북한강 상류 지역[26], 설악산권은 북한령이 되고 춘천시, 강릉시 등이 최전방 도시가 되는[27] 등, 전체적으로 서부의 서해 5도를 위시한 영해와 동부의 철원, 북한강 상류, 설악산 및 동해안 영토 등을 포기하고 대신 중부의 미수복 경기도를 얻는 모양새가 된다. 한 마디로 서울 방어와 개성을 얻고 나머지를 다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삼팔선과 비교하면 강원도 지역은 경계선 차이가 적으므로[28] 서울 방어와 개성을 얻고 경기만 제해권을 포기하는 형태가 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을 수 있는게 동부전선이 상당히 남하한다 한들 서울이 위치한 경기도와 산악 지대로 인구가 적은 강원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단순히 물리 면적만 가지고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수복 경기도가 확보되면 적어도 전선이 서울과 2배 가까이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개성이 점하는 위상 역시 무시하지 못하는 게 만약 남한이 개성을 온전히 장악하면 남북간 역사적 정통성 문제에서도 큰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경우 역사적 도읍이었던 도시가 평양 하나밖에 남게 되지 않아 체제 선전에도 불리함이 작용했을 것이며 또한 한국사의 고려시대 연구 역시 현재보다 더욱 진전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성이라는 규모 있는 도시가 최전방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효용성도 무시할 수 없다.[29] 괜히 휴전협정에서까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개성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개성의 가치를 민족 대표의 명산인 금강산도 아니고 아류인 설악산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현재의 휴전선과 비교했을 때는 양자 간의 득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무엇이 낫다고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육지에서는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경기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현재보다 다소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도 있지만 반면 해안에서는 서해 5도, 양양 이북 동해안 지역의 부재로 인해 전선이 다소 남하하고 경기만에서의 현재와 같은 확실한 우위를 뺏긴다는 불리함이 존재한다.
6.2. 현재보다 남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논의된 적 없는 대안)
6.2.1. 북위 37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논의된 적 없음)
만약 북위 37도 30분을 기준으로 했다면 서울의 경우 북위 37도 30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 영등포구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광복 당시 경성부 영역의 사실상 대부분이 이북으로 넘어가고, 북으로 넘어간 경성부 영역은 남북 경계에 바로 맞붙게 된다. 39도선의 평양시처럼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한강 바로 밑에서 잘리게 되며, 인천광역시도 절반이 이북으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37도 30분선은 양평읍과 횡성읍, 동해시 바로 위를 지나가게 되며, 울릉도마저 절반으로 갈리게 된다. 이 시나리오의 경우 갈리게 되는 행정구역은 수도권의 경우 인천광역시, 부천시, 서울특별시, 하남시, 광주시, 양평군, 강원도의 경우 횡성군, 평창군, 정선군, 동해시, 경상북도의 경우 울릉군이 되며, 이로 인해 남한은 경기도의 40%를, 강원도는 1/4 정도만 차지하게 되어 중부 지방의 대부분이 북한 측에 넘어가게 된다.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상태로 휴전에 돌입했다면 해당 축선과 유사하게 분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아무리 서울이 명시된 수도라고 할지라도 사이가 험악한 이상 자기 쪽 서울이 언제 포탄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울을 비웠을 것이고, 정 안된다면 서울이 중립도시화 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대한민국의 수도는 대전광역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6.3. 현재보다 북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3.1. 북위 38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논의된 적 없음)
이와 비슷한 분단 가능성이 고려된 적이 딱 1번 있었는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북한이 미루나무 제거 작업 중 추가 도발을 했을 경우 미국 측에서 북한으로 진격해 서해안 부분 휴전선을 위로 올리고 옛 38선 이남 남한 영토 및 연백평야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이 경우, 옹진반도 연결 및 방어의 용이함을 위해 황해도 산악지대까지 올라갔다면 38도 15분선 내외로 휴전선이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현행 휴전선 중 수평에 가까운 철원-양구 축선이 약 38도 20분이다.
만약 북위 38도 30분선(북위 38.5°)을 기준으로 했다면 황해도에서는 송화군 대부분, 은율군 일부, 신천군 사실상 전역, 안악군 일부, 재령군 대부분, 봉산군 대부분, 사리원시 일부, 서흥군 일부, 신계군 일부가, 강원도에서는 이천군 일부, 평강군 일부, 회양군 극일부가 남한에 속하게 된다. 특히 김화군은 금성면과 임남면의 극히 일부와 원북면 대략 절반, 창도면 대부분, 통구면 전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한에 속하게 되어 남한에서 김화군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면적을 갖추게 된다. 금강산선 철도는 여전히 단절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좀 더 많은 연선지역이 남한에 속하게 되고 기점인 철원역도 남북 경계에서 멀어지므로 김화군에 교통 편의를 제공하거나 병력, 물자를 보급하는 용도로 활용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수복지구에 해당하지만 일부 지역이 군사분계선 이북인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우 인제군은 전 지역이, 양구군은 수입면 최북단 극일부를 제외한 사실상 전역이 남한에 속하게 된다. 대신, 현행 휴전선의 최북단이 38도 37분이므로 수복지구에 해당하는 고성군 현내면의 일부가 북한령이 된다. 동사리원역이 남한의 역이 되며 제진역은 북한의 역이 된다. 그리고 금강산 지구는 최남단 봉우리인 국사봉까지 모두 아슬아슬하게 이 선 북쪽에 있어 전부 북한령이 된다. 또한, 이 선은 구월산과 임남호를 관통한다.
중요한 점은 38도 30분선 이남에는 북한의 핵심 곡창지대인 연백평야 전부와 재령평야 절반 이상이 포함된다. 해당 지역에서 나오는 쌀이 북한 전체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것을 감안했을때 만약 해당 시나리오대로 분단되었다면 이곳을 잃은 북한은 식량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 외에도, 평양이 분단선부터 최단거리로 50km 내외로 들어가기 때문에 포 사정권에 충분히 넣을 수 있는 거리라 대한민국 측에서 평양 불바다(...)를 거론할 수 있게 되고,[52] 황해도 최서단인 장산곶도 손에 들어오므로 서해안 해상전력을 가둬두기에도 훨씬 유리해진다.
6.3.2. 북위 39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한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참모였던 에드워드 로우니의 회고록 《Smoky Joe and General》에 따르면, 일본의 공식 항복(1945년 9월 2일) 직전 조지 마셜 장군이 참모들에게 남북 분단선 설정안을 건의토록 제의했을 때 딘 러스크 대령 등 영관급 장교들은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오갔던 북위 39도선 분할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상관이었던 조지 아더 링컨 장군이 예일 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하면서 38도선을 주장했다고 한다.
만약 북위 39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평양의 경우 북위 39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남포시는 39도 이남, 원산시는 39도 이북이 된다. 대략 통일신라의 영토와 비슷해진다. 이 경우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포함해, 평양 도심의 1/4이 남한령이 된다. 그리고 평양역은 북위 39도선이 역 구내를 지나가기 때문에[57] 철도역의 기능을 상실한다. 다만 남한령 평양 시내가 39도선과 대동강 사이에 갇혀 사실상 고립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북위 39도선이 분단선이 되었을 경우에는 대동강을 따라서 경계 조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38도선에 아슬아슬하게 남한령으로 걸렸던 해주시 남쪽 끝 반도 지역이 결국 북한령으로 조정된 것처럼 경계 조정이 되지 않더라도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남한에서 남한령 평양 시민들을 대동강 이남으로 이주, 대동강 이북 지역을 비무장지대화 시켜 평양급의 대도시가 유령 도시가 되는 아스트랄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평안남도에서는 남포시를 포함한 용강군과 중화군 전체, 강서군 일부, 대동군과 평양시 일부, 강동군과 성천군 극일부가, 황해도에서는 곡산군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강원도에서는 통천군 일부와 이천군 극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그리고 함경남도에서 문천군 극일부와 안변군 2/3 정도가 남한령으로 들어오게 된다.
아예 간단하게 그냥 평안도와 함경도 전체를 북한에 내주는 방법도 있다. 왜냐하면 39도선은 평안도와 함경도 남쪽 경계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함경남도와 평안남도 남쪽 행정구역 경계가 그대로 자연적인 남북 분할 경계가 되었을 테니 오히려 큰 고민 없이 선택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러일전쟁 직전 일본과 러시아의 39도선 분할안도 이렇게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통째로 러시아가 갖는 안으로 하려고 했다.
여담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이 쭉 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닌 원산~남포일대까지 단기간에 침공하여 크게 승리후 전쟁을 정전 내지 종전 협상을 하자는 영국측 주장도 있었으나 압록~두만강 까지 북진통일을 원하던 당시 한국정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만약 이 주장대로 정전 협상이 진행되었을 경우 양측의 협상 끝에 결국 높은 확률로 39선으로 분단되거나 한국측이 원산항 일대를 받는 대가로 북측에게 평양을 내어주는 등 협상이 오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