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절머리나는 보도 블록 공사
아시다시피 유럽의 도시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서 조그만 도시일지라도 공사를 하는 곳이 항상 있습니다.
여기 벨기에 루벵(Leuven)도 예외가 아니라서 건물보수 공사, 도로 보수 공사 등등 1년 내내 지겹도록 공사 장면을 구경합니다. 특히 올해는 봄철이 시작되면서 유난히 그런 공사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아파트 앞 도로변 보수 공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비록 “심한” 불편을 겪었지만, 벨기에 사람들이 보도 블록을 어떤 절차로 교체하는지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1월 중순에 시청에서 어떤 편지가 1통 배달되었습니다. 저는 화란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우편물을 처리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겉 봉투에 제 이름이 안 보이면 무조건 반송함에 넣어 버립니다. 둘째, 겉 봉투에 제 이름이 있으나, 속에 든 문서에는 제 이름이 없으면 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쓰레기 통으로 버립니다.
셋째는 진짜 저한테 온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매달 청구되는 각종 고지서들이 주종을 이루나, 가끔씩 시청 등에서 안내문을 보냅니다. 특히 시청에서 보낸 안내문을 그냥 버렸다가는 나중에 뭔가 모르지만 항상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회사에 가져와서 벨기에 사람들한테 내용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1월 중순에 시청에서 온 안내문은 2월부터 우리 아파트 앞의 도로변 정비 공사가 있을 예정이고 통행이 불편할 것으로 예상되니 “인내”를 가지고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Brouwersstraat 길이가 기껏 300 m 정도 되니까 한 보름 정도하면 끝나겠지 간단하게 생각하면서 그 정도는 인내를 가지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진설명) 당시 우리 가족이 살았던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는 "놀이터"라고 쓰인 쪽에 있음)
우리집 앞의 도로변에서 벌어지는 공사의 내용은 보도 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도로변에서 우리 지하 주차장 입구가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락날락 하는데 지장을 받습니다. 보도 블록을 새로 교체하는 김에 그 밑 땅 속에 묻힌 각종 파이프들도 함께 손을 보겠지요. 파이프 보수 작업을 하면서 땅을 다 파헤치기는 해도 예상대로(?) 우리 집 지하 주차장 입구는 임시로 철판을 덮어서 차는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공사를 하는데도 주민들 입장에 서서 주차장 입구는 임시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니까 역시 선진국은 다르다고 만족해 있는 2월 어느날…
아침에 학교 가는 애와 함께 출근을 하려고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이상하게도 지하 주차장에 차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어제 주차장 들어 올 때 입구에 무슨 흰 종이가 하나 붙어 있었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주차장 입구로 나가보니, 그 임시 통로를 철거해 버리고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갈 수 없었습니다. 공사 십장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나 지금 차를 끄집어 내야 한다고 했더니, 저기 흰 종이를 읽어 보라고 합니다. 제가 어디 화란어를 읽을 줄 압니까? 인부가 설명해 주기를, 오늘은 입구 출구를 막고 공사를 해야 하니까 아침 7시 전까지 차를 빼내라는 안내문이랍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7시 전에 차를 다 뺐고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애를 학교에 데려다 주느라 지각하고, imec에는 버스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좌우간 이렇게 우리집 주차장 출구 부분은 공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보도 블록도 새로운 것으로 깔렸습니다.
보름 정도가 지났는가 봅니다. 주차장 출구 이외에도 우리집 아파트 앞 인도 전체에 깨끗한 블록들이 깔렸습니다. 하루 불편함을 겪었지만 이 정도는 “인내”를 가질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퇴근길에 이번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또 무슨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물론 자세히 보아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다음에 주민들 중 누구를 엘리베이터 속에서 만나면 물어 보아야지 하면서 간단하게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애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 왔습니다. 순간적으로 “또 공사?”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차장이 또 텅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차장 출구 앞으로 가보니 진짜로 출구를 또 다 파헤쳐 놓고 보도블록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오늘 공사가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차를 모두 빼냈던 것입니다. 나만 쏙 빼고 주민들이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궁금하여 공사 십장한테 미리 주민들에게 공지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엘리베이터 속에 붙은 안내문을 못 보았느냐고 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지난 번에 공사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또 다시 주차장 입구 보도 블록을 파헤치냐고 물었더니, 그 때는 임시로 주차장 입구만 깐 것이고 이번이 진짜로 까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 또 학교에 지각했습니다.
또 보름 정도가 지났는가 봅니다. 그 동안 우리 아파트 쪽 보도 블록 교체 작업은 깨끗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왜 “인내”를 요구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이제 길 반대편의 보도 블록 교체 작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길 저 건너편에서 매일 공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저쪽 주민들 꽤나 “인내”를 발휘해야겠군 생각했습니다. 길 건너편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어서 저도 통행은 좀 불편했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 주차장 입구는 막히지 않을 테니 그 정도는 “인내”를 가지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퇴근을 했더니, 집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 무슨 안내장이 붙었는데 ‘garage’ 어쩌구 저쩌구 하는 단어가 써 있는데 못 보았느냐고 합니다. 그 날 저는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계단을 이용해서 집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에 그 안내문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쪽은 보도블록 공사가 완전히 끝났으니 설마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막겠다는 안내문은 아니겠지 하면서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면서 그 안내장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우쩌구 garage 저쩌구 vanaf 07u tot 12u (7시부터 12시까지)…” 또 텅 빈 지하주차장을 보아야 했습니다. 십장 아저씨에게 또 물었습니다. 공사는 지난번에 완전히 다 끝났는데, 왜 또 파헤치느냐고요? 십장 아저씨 말씀은 이것이 Belgium에서 보도블록 교체하는 정상적인 절차라고 합니다. 도로변 전체적으로 블록 교체 작업을 마무리 한 후에 얼마가 지나면, 주차장 입구는 무거운 차들이 들락날락 하기 때문에 지반이 과도하게 다져져서 그 부분만 다른 곳에 비해 보도블록 높이가 낮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 차를 통행 시킨 후 지반이 완전히 다져지면, 특별히 주차장 입구 부분만 흙을 더 깔아서 차가 안 다니는 부분과 보도블록 높이를 맞춘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틀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교 지각까지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퇴근 길에 또 엘리베이터 속에 붙은 안내장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긴장되어 정말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아는 단어는 garage 라는 한 단어…,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번 더 높이를 맞추겠다는 것인가? 이번만은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아예 그 안내문을 떼어서 옆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이게 무슨 내용의 안내문인지 물었더니, 옆집 할머니 말씀이 건설회사에서 붙인 감사의 글이라고 합니다.
“이번 공사 기간 동안 garage 입구가 몇 번 폐쇄 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참아주신 주민들 덕분에 공사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무슨 건설회사 십장 드림.”
2002. 0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