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아일랜드 오션 젠도
이강옥(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이곳은 뉴욕 맨해튼으로부터 차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롱아일랜드의 중간 지점이다. 집들이 숲 속에 있기에 창문으로 자연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창가에 앉으면 다람쥐며 딱따구리가 잔디와 나무 위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하루 내내 볼 수 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저리도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념에 빠지다가는 그들의 모든 일들이 뭔가를 입 안으로 집어넣어 씹거나 삼키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행동은 자동화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우리 사람의 하루가 떠오른다. 우리에게서야말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뭔가를 밖에서 가져와 내 것으로 만들려는 동기가 자동화되어 있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은 도로가에 즐비해 있는 거대한 몰로 차를 몰고 가서 이것저것 엄청난 물량을 카터에 집어넣는다. 대부분은 먹을 것들이다. 이런 이곳 사람들이 저 숲속의 다람쥐나 딱따구리와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다람쥐나 딱따구리와 좀 다른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일상의 습관적 반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여기에도 십자가를 단 교회가 있고 이슬람 사원이 있으며 겉으로 잘 나타나지는 않지만 절이나 선원도 있다. 사사로이 종교적 의례와 수행을 위해 모임을 만든 경우는 훨씬 더 많다. 가까운 스토니 브룩(Stony Brook) 대학에는 온갖 종교 관련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수강한다. 그리고 다양한 종교 단체의 모임이 끊임없다.
이곳의 불교 수행 단체는 한국, 티벳, 타이, 그리고 일본 등의 사찰 혹은 수행법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다채롭게 꾸려지고 있다. 내가 인연이 닿아 참여하게 된 오션 젠도(Ocean Zendo)는 일본 조동종(Soto Zen) 수행을 이어받는 곳으로 여기서 다시 한 시간 걸리는 바닷가에 있다. 부자들의 별장이 여기저기 보이는 숲속에 있는 그들의 사원은 참으로 검소하여 초라하기까지 하다. 지도자(Roshi)인 피터 마티슨(Peter Mattheissen)은 1990년대를 풍미한 저명한 소설가로 지금은 말기암을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후계자로 미첼 엥구(Michel Engu)에게 도통을 전해주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선생(Sensei)들이 함께 이 참선 수행 단체를 꾸려간다. 이들은 토요일마다 예불을 올리고 다른 날도 한나절 참선, 하루 참선, 5박 전후의 수련회를 개최한다. 예불 올릴 때는 일본말 기도문을 그대로 외기도 하고 영어로 번역된 반야심경을 구송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이 일본 불교처럼 형식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경건하고 엄숙하다.
이들은 모두 생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머리를 깎고 간절히 수행을 이끌어가고 있다. 나는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그들의 예불과 수련회에 거듭 참여하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고 또 나 자신의 수행에 경책으로 삼아왔다. 이들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수행을 하면서도 일상적 문제의식을 내려놓지 않는다. 가령 예불과 참선을 마치고는 옆방으로 가서 카운설토크(counsel talk)라는 것을 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작은 돌 하나를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면서 자기 수행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 이야기에는 일상 속 수행과 수행 속 일상이 긴밀히 엮어진다. 가끔은 엉뚱한 내용도 있고 유치한 도식화도 있었지만 모두들 진지하게 말하고 듣고 반응한다. 이야기가 한 바퀴만 돌아도 따뜻해지는 돌의 감촉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지혜와 신심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열려져 있다. 새로 온 사람이 자기들과 다른 수행법을 추구하더라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렇게 누구라도 평등하게 수행에 동참하게 하지만 수행 경험이나 수준에서 자치적으로 위계를 설정하였다. 그런 위계는 도반 사이의 위화감을 조성하기보다는 수행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네 명의 수행 지도자들 사이에도 격의 없고 따뜻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지난겨울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다섯 정도의 도반이 섬의 오래된 저택을 빌려 정진하였는데 그 열기가 만만찮았다. 이틀째 수행의 결의가 잔뜩 고조되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벽을 뒤로 하여 마주앉아 정진에 들어가 완벽한 적정을 이룬 것 같았을 때 갑자기 ‘엥구’하는 깊은 고함이 터졌다. 그 소리는 저택의 높은 천장에 울려 메아리가 지는 것 같기도 했다. 중심 자리에 앉아있던 지도자가 소리친 것이었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참석자 중 누군가가 허튼 행동을 했거나 집중하지 않는 것을 포착한 지도자가 그를 꾸짖기 위해 그 이름을 불렀다고 이해한 나는 매우 불편한 마음이 일어났다. 아무리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많은 도반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것은 너무 심하다며 내 나름대로 분별을 한 것이었다. 나는 휴식시간에 ‘엥구’가 다름 아닌 지도자 선생 자신의 이름임을 알고 다시한번 더 놀라고 감동했다. 지도자는 자기가 이끌어가고 있는 도반들 앞에서 자신의 망상을 고백하면서 스스로를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지도자가 자신을 기꺼이 망가뜨려준 데서 고귀한 살신성인의 정신을 감지한 나는 더 간절히 정진할 수 있었다.
(<명사칼럼>, 법주사, 법주회보, 2014.1)
첫댓글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수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