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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8장 1-14절
찬송가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오늘 본문은 앞장들에서 고발된 이스라엘의 죄의 고발의 연장선상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북방(앗수르)이 독수리처럼 덮칠 것을 예언 (1-3)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나팔을 내 입에 댈지어다” 명령하시는 것으로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팔은 보통 잔치 날에 축하하기 위해서 또는 위급 상황을 알리거나 전쟁의 신호로 사용합니다. 새번역은 본문을 “나팔을 불어서 비상 경고를 알려라!”로 해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상 경고를 알리라고 하신 이유는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게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독수리와 같이 날렵하고 용맹스러운 북방의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여호와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마치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하나님을 배신하고 음행을 저질렀지만, 음탕한 고멜을 다시 부인으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전히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앗수르를 통해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호렙 산에서 언약을 맺으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압 평지에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과 언약을 확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혼서약을 어기고 간음한 신부와 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한 번 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배신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앗수르가 침공하게 되면,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2)라고 외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외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회개의 외침일까요? 아니면 이같은 시련을 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는 외침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본문 13절에서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에 맞추어 희생 제물로 제사를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셨지만,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아벨은 전심을 다해 제사를 지냈지만, 가인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며칠 전 신문에 다음과 같은 미담이 보도되었습니다.
9월6일 낮에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횡단보도 인근 인도에서 60대 여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시내버스 운전사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바로 버스를 세우고 쓰러진 여인에서 달려가서 심폐소생술을 행했습니다. 한 시민은 119에 신고했고,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은 불평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3분여동안 계속된 심폐소생술 덕분에 쓰러져서 의식이 없던 여인은 호흡과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여인이 의식을 찾자, 운전기사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 운행을 계속했고, 여인은 119 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운전기사는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산업안전보건 교육을 하는데 그때 심폐소생술을 배웠다"며 "언제나 심폐소생술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의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못본체 하고 지나갔지만, 유대인들이 개 취급도 안하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으슥한 곳에는 강도들이 출몰하곤 했습니다. 또 강도들이 환자로 위장해서 도우러 온 행인들의 금품을 탈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사람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제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혹여라도 그 사람이 죽었을까봐 더욱 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서 해박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망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면서, 결국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세운 무리가 바로 율법에 대해서 박학다식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에 축적된 지식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에 축적된 지식이 마음으로 내려가서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생 동안의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불과 30cm에 불과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께서는 “이미 선(하나님)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3)고 선포하십니다.
2. 우상 숭배의 죄와 심판 (4-8)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사시대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이 왕정 제도를 간구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정 제도로 인해 그들의 삶이 피폐해질 것을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웠습니다. 왕정 체제를 실시한 결과 이스라엘은 사울, 다윗, 솔로몬 이후 결국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약 344년을 존속하면서 다윗 가문의 왕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208년간 존속했지만, 잦은 쿠데타에 의해 왕이 19명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가리켜 “...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 내가 모르는 바이다”(4)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특히 솔로몬 왕 이후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이것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금송아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면서, 그에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다윗과 함께 했던 것과 같이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드리게 되면, 자신을 떠나갈 것을 우려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절기도 마음대로 바꾸고, 제사장도 자신이 임명해서 북이스라엘을 우상의 늪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우상을 섬긴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
(7)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 (새번역)
우상을 열심히 숭배하는 것은 헛된 수고에 불과하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이미 패망한 것과 다름없다면서 결국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그릇과도 같다고 선포하십니다.
3. 이방을 의지한 죄와 형벌 (9-10)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인 앗수르나 애굽에 조공을 바치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욕정이 찬 들나귀가 돈을 주고 욕정을 채우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한 나라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강대국에 바치는 무거운 조공으로 인해 결국 쇠하게 되고 말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10).
십자가 대속의 보혈의 은혜로 주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면 우리 역시 욕정에 찬 들나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은 물리적으로 좁은 문을 의미하지 않고, 그 문을 선택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간혹 물건을 구입하는데 현금가격과 카드가격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카드로 구입하면 ”10%“ 더 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현금 거래는 세금신고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으려면 현금거래가 서로에게 이익입니다. 어떤 선택이 좁은 문인지 넓은 문인지 우리는 압니다.
우리 눈에 진리의 문이, 생명의 길이 좁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넓은 문, 넓은 길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 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면서도 내면에는 썩어 없어질 내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닐까요?
4. 유다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의 죄 (11-14)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 제단을 많이 만든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제단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저마다 제단을 신축한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제물로 쓰인 고기를 먹으려는 탐욕만이 가득했습니다. 제물로 쓰인 고기를 먹는 경우는 화목제물의 경우에 국한되었습니다. 번제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불태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임의로 화목제물로 변경해서 제물의 일부를 갈취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은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순서가 뒤바뀐 경우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객이 전도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13b)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범죄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처럼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종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어서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왕들이 저지른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 군사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힘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화려한 왕궁들을 건축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건물이 화려해지고, 의식이 성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건축 중이었던 헤롯대왕의 예루살렘 성전은 화려함과 규모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웅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교회는 규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대한 예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성전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연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유다는 성읍을 견고하게 짓는 것으로 군사적인 위안을 삼았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유다를 향해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을 잊었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성읍을 견고하게 지어야 함을 당연합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성읍을 허술하게 짓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인이 취할 행동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견고하게 짓고, 하나님만이 성을 견고하게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간구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사업가는 사업가로서 최선을 다해 사업에 몰두하고, 교육자는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정치가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재물과 지위와 명예를 우상으로 삼는 세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고난과 역경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지만,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택한 넓은 길이야 말로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발정난 들나귀처럼 세상의 권력에 의지하고, 주객이 전도된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결실을 맺는 가을을 맞아 한 해 동안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해 흘린 땀의 결실이 아름답게 맺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가 마치 호세아의 시대와 같이 혼돈합니다. 아니 호세아 시대보다도 죄악이 더 관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주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재물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고,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자신만의 우상을 만들어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개개인의 죄임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을 더 깊이 ,더 넓게, 더 많이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바로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용기 있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파멸과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를 깨우고 생명의 길로 이끄는 나팔수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