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면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너무 아이들의 세계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모님들도 우리에게 그러셨던거 같다.
그래도 우리는 그저 꾸역꾸역 그런가 보다하며 자랐다.
지 먹을 복은 지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지금 생각하면 무지하기 이를데 없는 예정론이고 운명론이었다.
심지어 교사였던 자신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대학에서 공부했던 아동심리학이나 발달심리학은
그저 자격증을 따기위한 학점에 불과했었다.
아이들은 소유물이 아니다.
비록 아이들의 보호자는 부모이지만 부모의 소유물은 아닌데도
극단의 선택을 하는 부모가 아이들과 동반하는 비극을 자주 목도한다.
부모의 무능한 책임이 짐승보다 못하다.
한마디로 부모가 될 만한 자격과 면허증이 없이 자식을 길렀다.
지금도 주말 공원에 나온 젊은 엄마 아빠는 아이 양손을 나눠잡고
거의 어른의 보폭과 보행속도로 걸어가며
서너살짜리 아이를 빠른걸음으로 끌고가는 모습을 더러 본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며 너댓살짜리 아이에게 빨리 내려오라 호통치는 부모를 본다.
계단의 높이가 아이에게는 자기 키의 1/4~1/5이나 되어 무서운데도..
이렇게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함부로 했다.
늙어가며 철든다더니 그 말이 맞다.
먼저 先에 날 生이어서 선생이었지 아이들 보다 훌륭한거는 결코 아니었다.
회고하면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지은 죄도 적지 않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부모가 되었다.
부디 우리를 닮지말고 손자,손녀들 잘 기르기 바란다.
너희들이 자랄 때 느끼고 겪었던 우리들의 부족하고 불합리한 모든 것 감안하여
너희 자녀들에게는 후회없는 부모가 되기 바랄 뿐이다.
어린이날에 느낀 늙은 애비의 참회록이니
모쪼록
너희는 우리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